소설리스트

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32화 (32/189)

32화. 마차에서 내려선 아가씨들 (5)

“너 정치 고전들만 읽었잖아.”

데메트리안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그랬지…….”

그땐 그랬지. 제가 데메트리안의 전공 책을 빌리기 위해 그런 소리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반쯤은 스스로도 관심이 있는 게 맞았지만, 나머지 반은 보좌관 일 때문에 바빠진 데메트리안이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는 것마저 미룰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가 다시 읽을 필요 없는 책들을 주제로 삼는다면 데메트리안이 저를 만나는 데에 부담이 없을 것 같아서.

물론 데메트리안이 클로에와의 약속을 가벼이 여긴다거나, 처음 읽는 책을 읽는다고 한대서 고생할 건 아니었지만…… 그냥 제 마음이 그랬다.

‘리도테에 들어간 것도 일부러 데미가 제국 아카데미 들어가는 것에 맞춘 거였는데, 리도테 학제가 더 짧아서 나만 심심해져 버렸지.’

열여덟 살의 봄에 3년제 리도테를 졸업하고서 다시 일과랄 것이 없어진 클로에는 그저 사교계 모임만 다니며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전까지 그녀의 사교란 데메트리안과의 것뿐이었는데.

사교계에 데뷔하고서 새로운 연들을 쌓기 시작한 덕에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지만, 저에게는 데메트리안과 나누는 토론이,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원로원의 정치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그런 이유로도 클로에는 리도테를 졸업하고서 늘 데메트리안의 책을 빌려 왔던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데미랑 굳이 꼬박꼬박 만나겠다고 그 무리를 해 가면서…….’

클로에의 얼굴에 다시금 씁쓸함이 번졌다.

호수에 번지는 물결이나 하늘에 피어오르는 구름 같은 것을 감상하듯 클로에의 얼굴을 살피던 데메트리안의 마음에 작은 당혹감이 일었다.

‘내가 말실수를 했나?’

제가 누군가의 안색이랄 것에 이리 전전긍긍하게 될 날이 올 줄을 어찌 알았을까.

그에 대해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데메트리안의 입술이 달싹이던 찰나.

“그나저나 다음번 책은 어떻게 하지? 이번에는 네가 우리 집에서 빌려 갈래?”

“아, 어쩔까…….”

불쑥 클로에가 내뱉은 말에 데메트리안의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다. 지금 빌려 가는 거야 문제는 아닌데, 그러면 다음 모임 때까지 최소 2주간 만날 명목이 없다.

‘물론 이유야 만들면 되는 건데, 맥락 없이 그러자면 로이가 또 껄끄러워할 테니까……’

이즈음의 저는 어째서 책을 핑계로만 클로에와 만나 왔던가.

사실 그도, 대축일 주간 동안 잠깐이라도 더 보겠답시고 라크루아의 마차를 기다린 것이 참 설득력 없는 행위임을 알았다.

물론 설득력 없는 일을 있게 만드는 것이 사랑일 것인데, 그 어떤 일이든 이성적으로만 생각해 온 그가 이를 수용하기는…… 아직 버거운 일이었다.

“다음번에 내 집무실로 와서 빌려 갈래?”

“언제?”

데메트리안의 머릿속이 다시 재빨리 돌아갔다.

‘만만한 것은 오늘처럼 물의 날인데, 그럼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하니……. 내일은 구휼 기금 심사가 끝나서 야근해야 할 것 같고, 모레는 퓌잘리 경에게 소개할 영식 찾으러 사교클럽에 가야 하는데. 주말에 저택으로 초대할까…… 아니, 그러면 어머니께서 다 같이 차 마시자고 하실 것 같고…….’

한참을 입가를 매만지며 고민하던 데메트리안이 최고의 절충안을 만들어 냈다.

“다음 주 빛의 날 어때?”

“아, 나 선약 있는데, 그날.”

“선약이라고?”

데메트리안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혹시……’

‘사업’상 라이언과의 만남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데메트리안은 지난주 황궁에서 마주친 그 왕자를 난데없이 떠올리고 있었다. 비참하게도.

똑똑.

데메트리안이 무슨 상상을 하는지도 모르고 클로에가 차만 홀짝이고 있을 때, 응접실의 문을 두드리고서 집사가 들어왔다.

“아가씨, 마님께서 소공작께서도 함께 저녁을 드시고 갈 것인지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응, 잠깐만.”

클로에가 찌푸리고 있는 데메트리안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어쩔래?”

“나 오늘 간만에 외식하려고 했는데.”

“그래?”

클로에가 집사를 보며 말했다.

“그렇대. 소공작 빼고 준비해 줘. 오늘 저녁 뭐래?”

“아니, 같이 가자고.”

“나랑?”

“응, 파이겐 경이랑 둘이 갈 순 없잖아.”

그렇게 말하고, 데메트리안은 또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데메트리안의 갑작스런 외출 제안에, 클로에는 급히 방으로 돌아가 야회복으로 갈아입었다.

“소공작 님이랑 외출하시는 건 성년 되시고서 처음 아니셔요?”

“그러게요, 다른 영식들과는 몇 번……”

“야.”

폼폼이 제 동료인 쥘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화제를 바꿨다.

“거기 예약하기도 힘들다던데.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이거 완전 데이트 같은데요?”

“쥘.”

폼폼이 다시 한번 쥘의 옆구리를 찌르고는 노려보았다. 대충 제가 보기에도 그렇긴 하지만 소공작께는 정혼자가 있으니 그런 소리 어디 가서 함부로 꺼내지도 말라는 의미를 담아서.

꽃과 함께 방문해서는 같이 외출하자고 청하는 게 아주 전통적인 데이트 신청 방식이긴 했지만.

‘글쎄…… 데미가?’

클로에는 혹시나 하며 기대를 품는 제게 작게 조소하며 거울에 비친 폼폼을 바라보았다.

“나 작년 가을에 입었던 와인색 드레스 있지? 그거 입자.”

“아, 마레 공작가 정찬회 때 잘 어울린다고 칭찬 많이 받으셨다던 그거요?”

기대를 품지 않기로 했지, 안 꾸민다고는 안 했다. 어쩌면 그와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외출일지도 모를 일, 클로에는 기분을 내기 위해 제가 만족할 수 있는 최대치로 꾸몄다.

크레벨의 마차에 기대고 선 파이겐은, 오늘도 불충한 시선으로 제 주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공자님이 라크루아의 현관에서 뿌듯한 기색으로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는 꼴이 너무나도 못마땅한 것이었다.

‘아, 물의 날에는 조기 퇴근인데…….’

평소처럼 집, 황궁, 집 하셨더랬으면 진즉에 공작저에서 쉬고 있을 시간이건만, 퇴궁하고서 약속이 있다고 다른 곳으로 향하더니…… 뭐, 여기까지야 그렇다 칠 수 있었다. 데메트리안의 규칙적인 생활에서 늘 예외가 되는 친우분이었으니까.

‘그런데 심지어 저녁까지 먹고 들어가겠다니, 무슨 바람이야 정말?’

그가 귀택할 때까지 퇴근도 없는 것이었으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것뿐이랴, 데메트리안이 클로에와 응접실에 들어가자마자 미라벨이 자꾸만 보채는 통에 대련을 하고 있었는데, 거의 다 이겼을 때쯤에 시내 레스토랑에 가서 예약 좀 하고 오라는 바람에 따 놓은 승리도 놓쳤다.

‘하인이나 전령을 빌리시면 될 걸, 라크루아에 빚이라도 지신 것도 아니고.’

다시 생각해도 짜증나네, 파이겐은 윗입술을 들어 올렸다. 그 주군께서 라크루아에 잘 보이려 노력하시는 걸 알기야 알았지만, 제가 이토록 휘둘리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이길 수 있었는데, 젠장.’

“호호호, 다녀오셨나요, 패자 경.”

그러고 있을 때, 옷을 갈아입은 미라벨이 쏜살같이 달려와 얄밉게 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마지막 판이야 제가 이길 뻔했다지만 첫 두 판을 이미 내리 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기습에 당했고, 두 번째 판에서는 어느 정도 합을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갑자기 미라벨이 연무장 옆의 벤치를 활용해서 파고드는 터에 당했다. 그래서 이를 갈고 세 번째 판을 이어갈 때에…… 심부름을 받아 버렸고.

‘뭐라고 핑계를 대든 당한 건 당한 거지만.’

수련복을 입고 나타난 미라벨은 파이겐이 지금까지 본 무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날쌨고, 반응 속도 또한 뛰어났다. 근력이야 남성들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걸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게다가 지형지물을 활용해 허를 찌르는 탁월한 감각까지.

‘피는 못 속이나 보네.’

궁정백저에 간다기에 은근히 기대했던 그 농브르의 실력자는 만나볼 수 없었지만, 미라벨의 실력을 알게 된 것은 기꺼웠다. 제 주군과 미라벨이 호위를 맡은 분이 절친하시니 어쩌면 등을 맞대고 싸울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졌다는 사실이 기분 좋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영애가 저보다 근거리에 더 유리하신데, 여기 연무장은 너무 좁잖아요. 다음번엔 공작저나 황궁 연무장에서 붙죠.”

“패자가 하는 말은 안 들려서 못 알아듣겠네요?”

까르륵 웃으며 미라벨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야회복으로 차려입은 클로에가 현관을 나서며 파이겐의 불충한 휴식 시간도 끝났다.

프란츠 광장에서 앙헬라타 대로로 뻗어 나가는 길목에 자리한 레스토랑, ‘마레와 라쥐르’. 제국 최고의 곡창지대인 마레령과 서해를 끼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한 라쥐르령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만큼, 각지에서 포털을 통해 그날그날 공수되는 해산물과 제철 농산물을 활용한 파인 다이닝으로 유명했다.

위치도 좋고 맛도 월등해 늘 북적이는 곳이고 오늘은 제국의 준휴일인 물의 날이라 만석에 가까웠지만, 크레벨 소공작에게 내어줄 좋은 자리 하나쯤은 언제든 있는 법이었다.

‘스칸다르를 떠날 때까지도 못 와 봤던 덴데.’

인기 좋단 말이야 들었지만, 이런 곳에서 만남을 가질 만큼 깊은 사이의 영식도 없었던 클로에는 평생 갈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곳이었다. 이전에 못해 봤던 일을 할 때면 역시 스무 살로 돌아온 게 좋긴 좋았다.

그 새로운 경험이, 데메트리안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 못마땅했을 뿐.

그러고 보면 못마땅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야회복을 차려 입고 나왔을 때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굴던 어색한 표정이라든가, 자꾸만 제게로 돌아오는 시선을 감추지 못하는 것 등등.

‘같이 참석한 무도회가 몇 번인데, 새삼스럽게.’

클로에는 그렇게 박정한 평가를 내렸다.

지금껏 단둘의 사적인 만남이 오후에만 이뤄졌던 덕에 야회복을 선보일 일이 없었고, 더구나 제가 담백한 사이인 척하느라 자연스럽게 치장한 것만 봐 왔던 걸 생각하면 데메트리안의 새로운 감회도 이유가 있는 반응이었는데 말이다.

클로에의 삐딱한 마음도 모르고 데메트리안의 심장 근육은 평생 느껴보지 못했을 정도로 거세게 박동하고 있었다.

‘이러니까 정말 뭐랄까, 데이트하는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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