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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31화 (31/189)

31화. 마차에서 내려선 아가씨들 (4)

“그런데 빛의 날이면 평일인데…… 아카데미 안 가시나요?”

조심스레 물어 오는 라이언의 말에, 클로에가 순간 당황하여 작게 굳어 있을 때였다.

“푸하하!”

미라벨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늘 종일 함께 다니는 동안, 미라벨이 가장 저답게 뱉은 웃음이었다.

* * *

제 ‘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다음 날, 클로에는 오랜만에 누아제트 남작부인의 호신술 수업을 받고 제 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동안 잘 피해 다니고 있었는데, 오늘 하필 데메트리안과 집에서 만나기로 한 탓에 집에서 여유 부리는 것을 들킨 덕이었다.

인질로 잡혀서 목이 그일 위험에 처했던 것 때문인지, 뒤에서 달려드는 것을 처치하는 방법이나 붙잡히고서 상대를 무력화할 수 있는 급소 찌르기 등에 중점을 둔 수업이었다.

‘아가씨의 호신술은 원래 원거리에 특화된 걸 기억하셔야 해요!’

그래도 바싹 땀 빼고, 향유를 푼 물에 목욕하고서 보송한 침대를 뒹굴거리는 것은 좋았다.

‘체면 차리지 않아도 되는 고향 집이 최고야.’

클로에는 행복감에 배시시 웃었다. 오전에는 책이나 읽으며 게으름 조금 부리고, 오후엔 데메트리안이 오기로 했으니까……

크레벨 소공작이 간만에 방문한다고 하자 들떴던 라크루아의 사용인들은, 현관에 들어선 그를 보고 다들 놀란 기색을 숨기느라 바빴다. 최근 몇 년간 아카데미 제복만을 고집하던 그가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나타난 것이었다.

정장의 효과는 대단했다. 그를 어려서부터 봐 온 라크루아의 사용인들이 새삼 그의 외모에 경탄했으니까. 목깃이 올라오는 까만 제복도 나름의 멋이 있기는 했지만, 감색 재킷 밑으로 드레스 셔츠와 은은한 무늬가 있는 조끼를 포인트로 받쳐 입은 것이 역시 우아한 신사라는 인상이었다.

게다가 그의 팔에는 꽃다발까지 한 아름 안겨 있었다.

“어머, 데메트리안, 웬 꽃이니?”

“어머니께서 온실 정리하시는 김에 좀 가져왔어요.”

그렇게 궁정백부인에게 답하며, 데메트리안은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기실 그는 감정이 드러나는 말을 내뱉기를 생리적으로 어려워하는 인간이었던 것이니…….

어머니의 온실에서 클로에가 좋아하는 꽃들을 좀 가져온다는 게 화단을 추수 끝난 밀밭처럼 만들어 버릴 뻔하고는, 시내의 화원으로 가서 물가도 모르고 돈을 쓴 것이었는데 말이다.

데메트리안은 제게 스스로의 노력을 평가 절하하는 재주가 있음을 오늘 처음 알았다.

“왔어?”

“응, 좋은 오후야.”

궁정백부인의 등 뒤에서 클로에가 빼꼼, 튀어나오자 데메트리안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클로에에게 그 꽃다발을 건넸다. 데메트리안의 품에서도 한 아름이었는데, 클로에가 들자니 양팔에 들어차는 것이 꽃다발이라기보다 꽃 무더기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거기에는 주황색 아네모네와 크레벨 온실의 봄을 상징하는 프리지아가 다른 여러 가지 꽃들과 어우러져 있었다.

마치 크레벨 온실을 담아 온 것 같은 이 꽃다발은 정말 좋았지만…… 또 꽃 선물이라니.

‘대축일 주간도 끝났는데 아직도 이러나.’

그들의 우정에 없던 것을 자꾸만 선사하는, 뭔가 달라진 듯이 구는 그는 여전히 낯설었다.

그런 궁금증들을 속으로 삼키며 클로에는 꽃다발에 얼굴을 묻었다.

‘근데 크레벨 온실에 이런 꽃들도 있었나…….’

라크루아의 타운하우스 2층에 자리한 소응접실. 아주 간소한 다과상을 사이에 두고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있었다.

데메트리안의 방문이 실로 오랜만임에도, 그들이 둘만의 독서회 때면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빠 다과에 손도 못 댈 정도인 것을 잊지 않은 라크루아의 사용인들은 식어도 괜찮은 티푸드로만 다과상을 꾸려 올렸다.

“아무래도 앙헬라타로서는 그게 최선 아니었을까? 왕권의 차이가 거기서 느껴진 거지. 저는 국서 자리를 놓고도 시달리는데 프란츠는 사생아를 두고도……”

클로에는 이어나가던 말끝을 흐리면서 눈을 돌려 데메트리안을 바라보았다.

‘이쯤에서 데미가 말을 끊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는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쳐 놓은 채, 턱을 괴고서 클로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제가 아는 대로 ‘어디까지 가나 지켜볼 테니 일단 계속 말해 봐’의 뉘앙스를 풍기던 것과는 사뭇 달라서, 클로에는 아연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듣고 있어?”

“그럼.”

계속 말하라는 듯이 데메트리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하지만 ‘원래’ 데메트리안이 그쯤에서 말을 끊었었기 때문에, 이을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요 며칠 황자궁에서 빌려 온 책이다 뭐다 해서 짬이 없었던 탓에, 클로에는 책을 다시 들춰보지 못하고 일전에 제가 떠들었던 것들을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 돌려주려고 내어 놓은 책에는 가름끈이 애매한 중간쯤에 끼워져 있었다.

“……까먹었어.”

“앙헬라타 옹호 더 해야지.”

또 뭔가를 안다는 듯이 말한다. 괜히 심통이 난 클로에는 그를 곁눈으로 노려보았다.

《왕국에서 제국으로─시대적 전환을 목도하며》. 데메트리안의 제국 아카데미 정치학 전공 교재였던 그 책은, 칭제 전 아르투젠과 캄포의 통합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책에 실린 내용은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학자의 평가가 갈리는 것이어서, 클로에 역시 데메트리안과 엄청난 설전을 벌였어야만 했었더랬다.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캄포의 마지막 왕 앙헬라타는, 그 영토가 에르드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부패한 관리들 때문에 국운이 기울자 아르투젠 왕실과의 정략혼을 통해 양국의 통합을 꾀했다. 안으로는 외척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귀족들에게 시달리니 국운을 일으킬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내린 결정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통일된 제국에 대한 자부심과는 별개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다.

‘지금 제 상태로는 귀족들을 뒤엎을 힘도 없는데 그걸 참아야 한다는 거야? 무능한 외척에게 힘을 불어넣어 줘야 했다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군주로선 무책임했지. 왕국 내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결정을 내린 걸 군주로서 옳았다 할 순 없어.’

‘그럼 예견된 불행대로 굴러가게 두는 게 책임을 지는 거야?’

‘예견된 불행이 오지 않도록 하는 게 책임이지.’

‘상황을 바꾸지 않으면 어떻게 그걸 막아? 제 기득권을 버려가면서까지 실익을, 정말 백성들을 위하는 길을 추구한 건데 그게 더 큰 책임감 아냐? 네가 말한 건 책임감을 핑계로 현실에 안주하는 비겁한 행위야.’

‘너도 방금 말했잖아, 버렸다고. 왕국으로서의 캄포를 저버린 게 됐는데 그게 어떻게 책임감이겠어? 축복을 받은 캄포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한순간에 다른 나라의 영지민으로 전락했잖아.’

‘그래도 자치권을 인정받는 대공령이잖아? 성국도 여전히 캄포에 있고. 아르투젠이 캄포에 달리 원하는 게 없는데 어떡해? 그냥 성배 넘겨? 차라리 결혼하고 가져간 게 나은 거 아냐?’

‘그걸 해결하는 게 정치지. 결국 게으른 방법이었을 뿐이야. 덕분에 제국에는 번거로운 정략혼의 전통만 남았잖아.’

그놈의 책임감, 책임감, 책임감. 클로에는 제가 무슨 말을 하건 ‘무책임하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하는 데메트리안에게 화가 난 나머지 애꿎은 소파에 주먹다짐까지 했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생긴 전통의 정략혼을 아주 제 운명처럼 생각하고 있는 인간이 말야.’

그때의 논쟁이 얼마나 격했었는지, 퇴근하려던 퓌잘리 누스가 잠시 들여다보고 갈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의 데메트리안은 제가 무슨 말을 하건 응, 그렇구나, 일리 있어 등등의 추임새만 넣을 뿐.

“공부한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 재미없게 왜 말이 없어?”

“그럴 리가.”

데메트리안의 입꼬리가 빙긋이 올라갔다. 역시, 더 떠들어 보라며 이기죽거리는 미소는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그냥, 네 말이 다 맞구나 싶어서.”

‘다정하다고나 할까.’

또, 데메트리안이 저답잖게 구는 기색…… 클로에는 황자궁에서 빌려 온 책에서 환상 로망스의 소재 중에 ‘평행 우주’라는 것도 있다던 것을 떠올렸다.

‘혹시 이게 그냥 5년 전이 아니라, 데메트리안만 뭔가 달라진 다른 평행 우주 아냐?’

클로에는 그저 불쾌한 기색을 폴폴 풍기며 찻잔에 입을 묻는 바람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데메트리안의 낯에 뭔가 복잡한 심경이 비치는 것을.

‘책임감’이라는 것을 무슨 마법의 단어인 것처럼 외던 그 시절을, 그가 어찌나 후회했었던가.

‘로이의 말이 다 맞았어. 진짜 책임질 수도 없는 걸 책임진답시고 붙드는 건 비겁한 행위지. 예견된 불행……을 막자면 더더욱.’

데메트리안은 빙긋이 웃으며 클로에를 쳐다보았다. 그 미소에 빈정거리는 기색이 떠올라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전한 기쁨만이 배어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데메트리안은 그 어떤 내색도 않으려 애쓸 뿐이었다.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이 얼마 전부터 ‘감정을 돌보는 일’이란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을 꿈에도 모를 터였다. 그에게는 아직 어려운 일이었지만, 덕분에 클로에를 만날 때 저만의 즐거움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옳은 대화’를 위해 논리만 재던 그때와 달리, 말할 때 격해지는 손짓이나 오물거리는 입술,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눈썹 같은 것들을 살피자면……

제 입매가 속절없이 풀어지려는 것을 인지한 데메트리안이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 그런데 그런 책들은 왜 빌렸던 거야?”

“그런 책?”

“‘크로낭베르 블랑의 환상 여행,’ ‘고대 그롤쉬가 남긴 정신적 유물’ 뭐 그런 책들.”

“아아.”

클로에는 그제야, 지난주에 황궁에 갔을 때, 데메트리안이 저와 미라벨이 들고 있던 책들을 들어 줬었음을 기억해 냈다.

‘표정은 안 좋았으면서, 고새 그 제목들은 보았단 말이지.’

관심이 생겼다기보다……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클로에가 눈동자만 굴릴 때였다.

“갑자기 관심사가 바뀌기라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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