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여전한 것과 여전하지 않은 것 (12)
황궁 중정에서 마주친 데메트리안은, 그렇게 뭔가 침통한 낯을 하고서 한참을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어?”
클로에와 미라벨이 다가와서야 그는 대충 제 얼굴에 일었던 감정을 지워 냈다.
“책을 빌렸어? 들어 줄게.”
힘없이 내뱉는 그 말에 클로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책을 넘겨줬다. 예전 같았으면 한 번은 소공작께도 이런 기사도가 있으셨냐며 놀림 삼아 거절했을 것인데……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면 늘 무감정을 표하던 그의 낯이 어떤 감정으로 가득 찬 것이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그 기색이, 굳이 분류하자면 음울함이었던 것이다.
평소 그의 무표정이 감정을 굳이 내보일 필요가 없는 여유로움 덕분이었다면, 지금의 것은 무언가를 억누른 쪽에 가까웠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야 할지 괜한 오지랖은 아닐지, 마음이 어려워서 클로에는 외궁을 통과할 때까지 아무 말도 걸지 못했다.
데메트리안도 무언가 생각에 깊이 빠지기라도 했는지 묵묵히 걷기만 할 뿐이었다. 클로에를 기다린 게 아니라거나, 우연히 마주친 거라는 등의 핑계 비슷한 것을 입에 올리지도 않은 채.
“퇴궁하는 길이야?”
라크루아의 마차가 서 있는 것을 확인한 클로에가 간신히 그럴싸한 말을 지어냈을 때,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데메트리안은 잠깐의 공백을 두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 1황자 전하 뵈러 가야 할 것 같아.”
“괜히 우리 때문에 다시 나왔구나?”
“으음, 뭐…….”
사실 지금 막 그러기로 마음먹은 거였던 데메트리안은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침울한 기색을 걱정했던 클로에는 그냥 그것도 대답이려니 여기기로 했다.
미라벨이 먼저 책들을 넘겨받아 마차에 올라타고, 클로에가 뒤이어 마차에 오르기 위해 데메트리안의 손을 맞잡았을 무렵이었다.
“맞다, 손수건 돌려줘야 하는데.”
“다음 주 물의 날이던가.”
클로에의 침실에 일주일 넘게 펼쳐지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는 그 두꺼운 책을 돌려주는 날이 다가온 것이었다. 그들의 십수 년 우정의 전통인 둘만의 독서회 날.
“응, 오후에 원로원으로 올게.”
“……내가 갈게.”
“우리 집 온다고?”
“응, 오랜만에 말야.”
그가 원로원에 근무하고서부터는 오전 근무만 하는 준휴일인 물의 날에 원로원 응접실에서 만나곤 했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외궁을 빠져나오는 내내 어두웠던 그의 낯이 조금 밝아지는 것을, 클로에는 의아한 낯으로 쳐다보았다.
* * *
알현실 앞에 선 뷔욘 스칸다르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긋지긋하다.’
열 살 때 아르투젠에 볼모로 왔으니 제 인생의 반도 넘는 시간을 이 도시에서 보냈다. 그리고 제국과 제 처지에 대한 염증은, 해가 갈수록 커져만 갔다.
‘형님, 제 아들놈 잘 좀 봐 주십쇼.’
그리고 더 역겨운 것은 제 아버지. 속도 없는 종자. 어떤 신경줄을 가졌기에 이 진절머리 나는 시절 동안 어떻게 제국의 황자와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워진 건지.
볼모 기간은 사실 성년이 되면 끝나는 것인데, 한없이 비겁한 제 부왕을 대하기가 싫어 뷔욘은 스물일곱이 된 지금까지도 아르투젠이 저를 놓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속으로 작게 이를 갈고는, 마음을 진정시키고서야 뷔욘은 시종에게 눈짓했다.
“스칸다르 왕자 뷔욘 왔사옵니다.”
“들라 해라.”
황제의 말에 알현실의 문이 열리자, 제 호위를 문밖에 대기시킨 뷔욘이 안으로 들어섰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래, 너도 잘 지냈겠고…….”
옥좌에 앉은 황제가 저의 다갈색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운을 뗐다.
“네 나라의 잔챙이들이 또 무슨 작당을 했더구나.”
대륙의 일인자는 괜한 인사치레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지, 아주 단도직입이었다.
볼모라도 왕자 신분으로 체류한 것이 열일곱 해가 되다 보니 경시청에서 동향을 찔러 주는 이도 있어서, 분리 독립파가 어떻게 체포되고 어떤 죄목으로 발고되었는지 뷔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제 부왕이 폐하를 하늘같이 존경하는바, 저희 나라에서도 그 잔당들을 궤멸하려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 아우의 노고를 내 알고는 있지. 다만 충분하지 못했던 모양이야.”
“면목이 없습니다.”
뷔욘이 침통한 낯을 지어내며 고개를 숙였다.
“놈들이 대축일 주간의 경비를 뚫었던데. 혹시 도울 만한 자가 있었겠느냐.”
“송구합니다.”
있을 리가. 자기들의 그 잘난 축제 기간에는 스칸다르인들이 서쪽으로 오줌도 안 누는 걸 알면서 같잖은 소리를 한다.
하나 마나 한 대화.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는 알현.
뷔욘은 부왕에게 제후국의 신의를 보여줄 수 있는 소정의 성의를 요구하겠다고 약조하고서야 알현실을 나설 수 있었다.
“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에, 뷔욘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만큼 방금의 굴욕감을 덜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괴로운 굴레. 지겹다, 지겹다, 진절머리가 난다.
열 살 때 이 도시에 내던져진 이후로 그가 저 방에 들어설 때면, 늘 뭔가 황송해해야 하고 무언가를 죄송해해야 하고, 늘 무언가를 읍소해야만 했다. 철에 따라 해에 따라 카펫이며 샹들리에며 바뀌었지만, 기본적인 것은 바뀌지 않았다.
황제. 옥좌. 고개 숙인 저 자신.
제국의 사교계는 호화로웠지만, 그 구성품들은 혐오스러웠다. 제게 끈덕진 시선을 보내는 영애들은 광대 짓 하는 앵무새 같았고, 머저리 같은 영식들은 또 어떤지. 우연히 제국의 귀족 태에서 났다고, 일국의 왕자와 맞먹으려 드는 반편이들. 거기에 이국의 왕자님이랍시고 귀빈 취급받을 때면 그 한심한 역할극 속의 노리개가 된 것만 같았다.
그나마 그를 거슬리지 않게 하는 것이 있다면…….
‘라크루아 궁정백 영애.’
저를 보자마자 볼을 붉히는 앵무새들과 달리, 그녀는 그를 특별하지 않은 낯으로 대하곤 했다. 제국에서 만난 뭔가 말다운 말을 하는 여성 중 하나였고, 그래서 그녀와 마주치면 좀 숨통이 트이는 듯도 했다. 제 같잖은 고국에까지 관심을 가지는 게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뷔욘은 조금 전 중정에서 마주친 그 얼굴을 한참 생각했다.
* * *
데메트리안은 1황자 프레더릭이 분리 독립파를 후원하는 ‘그 누군가’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을 때 가장 득을 보게 되는 것이 그였으니까.
황실은 화목했고 황자들과 황제 부부의 사이도 원만했다. 유일한 문제는 황태자 책봉이 늦어지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프레더릭을 홀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내무부의 일을 하고 있으니까.
황제가 책봉을 늦추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주신의 계시를 기다린다는 식으로 말할 뿐이었다. 논리와 이성으로 판단하는 데메트리안은 황제의 그런 태도를 납득할 수 없었지만, 제가 소공작이 아니라 선선대 공작이었어도 별수는 없었다.
‘1황자가 조급해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데메트리안은 후계자로 자라났고, 실제로 공작위를 향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고 있었다. 에티엔도 경시청의 일에 익숙해지면 행정청으로 가서 라크루아 궁정백의 후계자 수업을 받을 것이다.
다른 가문의 영식들 또한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을 걸음마를 뗄 때부터 알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1황자는……’
명확한 이유도 없이 제게 줄 것을 자꾸만 미루는 부황에게 어쩌면 불경한 마음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또 그런 위인은 못 되었다. 데메트리안은 그에 대한 제 마음의 일부가 동정심임을 알았다.
“우리 보좌관 나리께서 예까지 무슨 일이신가.”
황자궁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얼마 안 되어 가벼운 셔츠 차림의 프레더릭이 나타났다. 제 악수를 받으면서 어깨를 툭툭 치는 그 친근한 황자님에게 데메트리안은 툴툴거리듯 대꾸했다.
“느끼하게 그리 말하지 마시지요.”
제가 공작가의 후계자고 그가 황자인 것과 별개로 20년을 알아 온 사이였다. 아무래도 나이 차가 덜 나는 2황자 대니얼과 더 가깝기는 했지만, 프레더릭 역시 제게 오래 알고 지낸 형과도 같았다.
“그래, 무슨 일로 왔어?”
“아까 구휼 기금 관련해서 내무부에 갔을 때 말입니다.”
“아, 괜찮아, 괜찮아. 일하다 보면 감정 상할 때도 있고 그런 거지.”
하하핫, 웃으며 그가 아직 수염을 기르지 않은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데메트리안은 그런 사소한 몸짓이 황제의 것을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제 것이 될 그 자리를 보고 배우며 자랐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소공작 나리께서 워낙에 훌륭히 중재해 주신 덕에, 미욱한 내무부 관료들도 대강 다 알아들었어.”
그래, 이런 점……. 전반적으로 호인인 그는 다 좋은데, 가끔 이런 옹졸한 구석이 있었다.
보릿고개를 건너고 있는 제국민들에게 풀 구휼 기금에 대해 원로원의 입장을 내무부에 전달하고 조율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였는데, 귀족들의 재산세로만 충당하겠다는 것에 자선기금을 모아 보태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낸 것이 문제였다.
절충하여 보다 나은 안을 만들자는 것을 그는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열등감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대니얼이나 올리비에 같은 인간들하고 자라면 사람이 저렇게 되나…….’
그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한 한 살 터울의 아우와, 그보다 모든 것을 조금 더 빨리 성취한 동갑 사촌을 둔 자의 숙명일까. 데메트리안은 평생 가도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 기실 프레더릭의 단점으로 굳이 손꼽히는 단 한 가지였다.
데메트리안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저 또한 또 다른 후계자로서 그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요인 중 하나였고.
“전하와 내무부 관료들께서 양해해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에이, 당연한 소릴. 그걸 신경 써서 이 저녁에 다 찾아오고 말이야.”
찾아와서 입이 귀에 걸린 것이 다 보이는데, 괜한 소리를 한다.
‘이렇게 마음을 살펴 주다 보면 상황이 좀 달라질까.’
‘그때’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지만……
똑똑.
데메트리안이 예의 바르게 꾸며 둔 낯 너머에서 혼자만의 계획을 점치던 그때, 프레더릭의 시종 하나가 아주 송구스러운 낯을 하고서 응접실로 들어섰다.
“전하, 저…….”
그가 건넨 귓속말에 일순간 프레더릭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걸었다.
“소공작, 내가 깜빡하고 있었는데 선약이 있었어. 내일 등청해서 보도록 하지.”
“아, 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갑작스런 축객령에, 굳이 더 머무를 이유도 없었던 데메트리안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선약의 손님이 응접실로 올 것인지 프레더릭은 일어서지 않고 손만 들어 그에게 인사했다.
타인의 마음을 돌보는 것이라.
예전의 그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을 일이었다. 감성보단 이성이, 감정보단 논리가, 친분보단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으니.
하지만 감정이 어떤 일까지 일으키는지 알게 된 그로서는……
‘감정에 휩쓸려서 실수하는 것도 있겠지만, 감정을 놓쳐서 실수하는 것도 있었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복도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프레더릭의 그 ‘손님’일 것이었다.
데메트리안의 낯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 요즘 들어 데메트리안은 종종, 제가 조금 전 생각하던 그 ‘감정’에 이렇듯 쉽게 휩쓸려 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크레벨 소공작 아니십니까.”
연한 금발을 낮게 묶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
“예, 왕자 전하. 이런 데서 뵙습니다.”
낮에 클로에의 수줍은 미소를 받고 있던 그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