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여전한 것과 여전하지 않은 것 (11)
“오늘 하루 고단하셨겠습니다, 영애.”
오간자 실크로 겹겹이 싸인 캐노피를 걷으며 그가 말했다.
“……아니, 부인.”
오늘부로 제 부군이 된 스칸다르의 젊은 왕, 뷔욘. 그가 한쪽 무릎을 침대에 올려, 천천히 무게를 실어 제 신부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등진 등불로 인해 드리워지는 그의 그림자에, 원래 알던 것보다 그의 체격이 더 큰 것처럼 느껴졌다. 고티유에서는 늘 묶고 있던 것을 풀어 내린 긴 머리칼이 제 쪽으로 쏟아져 내려서일까.
“예, 전하께서도요…….”
다리를 한 쪽으로 모아 앉은 채 바짝 얼어 있는 클로에의 낯을 한참을 쳐다보던 그가, 짧게 웃음기를 뱉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한 손을 뻗어 가까운 쪽에 있던 클로에의 손을 살포시 덮었다.
“너무 겁먹으실 것 없습니다. 우리가 구면이라지만 초면이나 진배없고……”
잡은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그의 낯을, 클로에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라도 다 제 머릿속에 새기겠다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것이 그에게는 어떤 자비를 바라는 초식동물의 두려움과도 같이 여겨질 듯했다.
“부인의 염려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다만,”
노래하듯이 말하던 그가 클로에의 손을 쥐어 들고, 그 손등에 입을 깊게 묻었다. 수많이 받았던 손등 키스지만 지금처럼 깊고 아득한 느낌은 처음인 것도 같았다.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 왔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황궁의 중정에서, 어느 연회에서, 또 어느 살롱에서, 라크루아 영애의 미소를 마음에 담아 둘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시간들에 말이지요.”
클로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에 제 떨리는 눈동자를 비추었다. 그의 황갈색 눈동자가 순간 금빛으로 빛났다. 등불에 비쳐서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 클로에는 이것이 그 내면의 어떤 열기가 비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었다.
“기다리겠습니다, 부인의 마음이 제게 올 때까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첫날밤, 저의 두려움을 이해한다며 후일을 기약한 부군. 그날 밤 그의 마지막 말들은 그들이 부부로 지낸 세월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마음속에서 간지럽게 울리고 있었다.
“우리에겐 앞으로 많은 시간이 있으니까요.”
어째서 이런 때 그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처음 입어 보는 스칸다르의 전통 제례복을 입고서 스칸다르의 제2왕비로 선포되었던 그날, 제 긴장한 마음을 읽기라도 한 양 나긋나긋 말하던 제 부군의 목소리.
고티유에서부터 안면이 있던 왕자님은 늘 그렇게 말을 건네 오곤 했다.
“괜찮으신 거지요?”
“네에…….”
저도 모르게 말을 잊었던 걸 깨닫고는, 냉큼 그가 건네는 책을 받아들었다.
“폐하를 알현하러 오셨나요?”
“네, 갑자기 입궁하라 하시기에.”
곱게 미소 짓고 있던 그의 낯에서, 난처하다는 듯 눈썹이 늘어졌다. 세 해를 부부로 지내면서 가장 많이 본 표정 중 하나에, 클로에는 묘한 반가움을 느꼈다.
클로에가 무엇을 부탁하거나 어떤 의견을 낼 때에 많이 보던 것이었다. 에둘러서 거절하는 표정,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표정.
그 얼굴은 저와 마찬가지로 다섯 해 어렸으나, 표정만은 제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그때마다 클로에는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가 알려주지 않는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분리 독립파가 체포된 것 때문에 문초하러 불러들이신 거겠지.’
원래대로라면 거사가 성공해서 숨길 것 없었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 어느 생각 없는 자라도 감히 물어보지 못했겠지만, 그 거사가 실패하고 만 지금에는 분리 독립파가 경시청에 구금되어 있는 것 자체가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으니까.
때문에 그에게 좋은 시간 보내시라느니 따위의 인사말을 할 수가 없어서 클로에는 대강 대꾸하는 편을 택했다.
“그러시군요. 고단하시겠어요.”
그렇게 말하고서, 클로에는 제 대꾸가 적절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때의 뷔욘에게 제가 가졌던 호감은 그 어떤 이성적인 성질을 띠는 것도 아니었건만, 그와 부부의 연을 맺고 산 세월이 자꾸만 떠오르자니 저도 모르게 떨리는 마음을 가눌 수 없었던 것이다.
고향을 떠나 외로워하는 클로에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는 금은보화며 비단옷이며 많은 호화로운 것들을 안겨주었지만, 클로에에게 더 기껍게 다가왔고 그래서 마음을 열게 만들었던 것은 그의 어떤 다정한 말들이었다.
‘만나면 다정하게 웃어주시는 왕자님’이었던 그가 실은 고티유에 체류하던 시절부터 이미 저를 사모하고 있었다는 고백.
‘제국에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저는 부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협상이란 수단으로 그대를 얻긴 했지만…… 그렇게라도 기회를 얻은 게 어딜까요.
‘이렇게 부인이 제 나라의 옷을 입고, 제 나라의 음식을 드시며, 제 처소에 계신 것이 꿈만 같군요.’
정중한 미소를 꾸며낸 얼굴 너머로 저를 은애하는 마음을 감추고 있으실 거라고 생각하니, 클로에의 마음이 수줍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 속도 모르고 뷔욘은 오늘따라 말수가 적으신 영애님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 그는 조금 고민하다가, 제가 방금 주워 준 덕에 클로에의 품으로 돌아간 책을 살피며 말을 붙였다.
“그나저나 ‘크로낭베르 블랑의 환상 여행’이라……. 영애께도 허무맹랑한 취미가 있으셨군요."
‘이런 로망스도 읽으시고, 부인께도 허무맹랑한 취미가 있군요.’
언젠가 들었던 말이 겹쳐 오자, 또 반가운 마음에 실룩이는 입꼬리를 감추기 곤란해졌다. 저를 그리 내어놓고 아끼시던 때에 들었던 말을, 그 마음을 짐작조차 못했던 때의 젊은 그에게서 듣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괜스레 간질거리는 마음에 클로에는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알뫼 정원……이 그리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알뫼 정원, 말씀이십니까?”
가면을 쓴 듯 고운 미소를 단단히 만들어 놓았던 그의 얼굴이 기묘하게 얼어붙었다.
“네, 겨울에 호숫가의 정자에서 보는 풍경이 좋다고…….”
스칸다르로 간 첫해, 어느 겨울날 그와 함께했던 알뫼 정원 정자에서의 티타임.
클로에가 스칸다르로 간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셰비크의 왕궁에 겨울이 내려앉았을 때, 해가 짧아진 탓에 향수병에 경미한 우울증까지 더하게 된 저를 위해 부군은 일과 시간을 따로 빼어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더랬다.
왕궁 후원에 너른 호수를 끼고 조성된 알뫼 정원. 그곳의 모든 나무가 눈을 뒤집어쓰고 호숫물은 한껏 얼어붙어서 모든 것이 순백이었던 풍경. 그 설경을 보며 궁정백령에서의 겨울 휴가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을 때, 제게로 다가와 눈가에 입을 맞추던 그 감촉. 마정석 손난로를 쥐고 있던 제 두 손을 그러모아 단단히 감싸 쥐던 그 손의 습한 온기.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리던 다정한 말.
‘이제는 제가 부인의 가족이지 않습니까.’
이어진 깊은 입맞춤과 함께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그에게 열었던 그날. 더 이상 외롭지만은 않게 된 스칸다르의 기나긴 밤들.
그 잊지 못할 낭만이 담겨 있는 정원을 언급한 것은, 일말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제가 보고 있는 스물일곱 뷔욘의 모습에서 훗날 제 부군의 기미가 보였기 때문에.
저를 그리 아껴 온 부군이 혹시라도 저와 같은 일을 겪고 있는 건 아닌지. 그것은 셰비크의 왕궁에서만 일어난, 혹은 스칸다르 왕족에게만 일어난 신비는 아닌지.
그래서 그도 5년을 거슬러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애께서 제 모국의 왕궁에 대해 들으신 바가 있으실 줄은 몰랐군요.”
하지만 왠지 떨떠름한 듯한 그의 낯은, 어느새 입꼬리로만 간신히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었다.
“뭘 물어본 거야?”
그게 유명한 거야?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잠자코 지켜만 보고 있던 미라벨이 속삭이듯이 물어왔다. 뷔욘이 다시 고운 미소를 만들어서는 ‘그럼, 다음에’ 하고 지나치고 난 뒤의 일이었다.
“그냥 좀 확인할 게 있어서.”
클로에는 살포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부군께선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 같지.’
또 뭔가 얼버무리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난처한 듯한 기색이 클로에의 낯에 떠오르자 미라벨은 더 캐묻기를 멈췄다. 저에게 비밀이 없는 제 젖자매가 이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거였다.
‘때가 되면 알려주겠지……?’
그 대신 미라벨은 고티유의 영애들이 뷔욘을 보고서 조건 반사적으로 흘리곤 하는 말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저 왕자님은 언제 봐도 예쁘시네.”
예쁜 왕자님. 그것이 고티유 사교계에서 뷔욘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뷔욘 스칸다르는 고티유에서 보기 드문 유형의 미남이었다. 1황자 프레더릭도, 데메트리안도 굳이 분류하자면 선이 굵은 편인 미남자들이었는데, 피부색도 밝고 머리칼도 밝고 눈동자도 밝은 그는 미남이라기보다는 미인이란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가 무슨 유형이든 간에 어쨌든 잘생긴 이국의 왕자님이어서 인기가 좋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도 이따금 희미한 미소를 만들어 낼 때면, 그리고 그것이 가끔씩 그 고운 미소로 이어지면, 고티유의 영애들은 한 번쯤 그와 스칸다르로 사랑의 도피를 펼치는 것을 상상하곤 하는 것이었다. 상상 속 세계에서 고티유 사교계의 딸 가진 귀족들은 모두 한 번씩은 피눈물을 흘렸더랬다.
아직 스칸다르가 제국 연방에 속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쇄적인 스칸다르 왕실에서 제국 출신 왕비를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실현되기 힘든 상상이었다. 하지만 원래 상상이란 실현 가능성이 낮을 때 더 짜릿한 법이 아니겠는가.
그 편견들이 모두 깨졌던 제 미래를 떠올리며, 클로에는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응, 그러시지, 예쁘시지.”
신랑이 신부보다 예뻤다던 제 결혼식. 피로연에서 스칸다르 사교계의 부녀자들이 나서서 그런 소리를 떠들고 다녔다며 미라벨이 분통을 터뜨렸었다.
하지만 저 낮게 묶은 머리칼을 풀었을 때 제 손에 금사처럼 흘러들던 그 올올의 감촉을, 그것이 얼마나 부드러운지를, 그런 말을 지껄인 그 누구도 모르리라.
“저 왕자님 호위, 암기도 쓸 것 같은데. 셀까?”
미라벨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클로에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도 주책이야, 한참 먼 일인데.’
클로에는 고개를 한 번 털어내고는, 다시 발을 재촉하려 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어, 오늘 두 번이나 뵙네요.”
놀람을 담아 울린 미라벨의 목소리.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외궁으로 향하는 중정 어귀에 데메트리안이 서 있었다.
낮에 만났을 때엔 무슨 업무가 잘 처리되기라도 했는지 미세하게 들떠 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의 그는 그저 표정을 굳히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타오르는 듯 번득였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히려 슬픈 듯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