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여전한 것과 여전하지 않은 것 (10)
‘캔달우드 공녀의 서신이 왔나 봅니다. 부인의 낯에 핀 웃음꽃을 보면요.’
제 부군도 이를 아실 정도로 말이었다.
그럴 때마다 클로에는 얘 말하는 것 좀 보라며 편지를 거의 보여 줄 뻔했다. 정말로 보여 줄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이미 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클로에는 제게 오는 서신의 밀봉이 뜯어진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제게 오는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굴 때가 있던 것을 기억했다.
그렇게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며 티푸드를 반쯤 해치웠을 때, 창밖 너머의 정원에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미인이 시녀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황궁의 내궁에 머무르고 있는 또 다른 여인, 말레카의 왕녀였다.
“저분은 늦게까지 계셨어?”
“그럼요. 공녀님 돌아가시고서 2황자, 3황자 전하들하고 한 번씩 춤추시고 들어가셨어요.”
준황녀인 캔달우드의 공녀님께서는 제 파트너인 2황자와만 춤추고 바로 들어가 버렸는데, 말레카의 왕녀는 그보다는 조금 더 체면을 차려야 했던 모양이었다. 사교계의 외국인 신분이 어떤 건지 아는 클로에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속도 좋으셔, 정말. 나라면 황태자 정해지고서 고티유에 왔을 텐데.”
“네가 좀 어울려 드리지 그래?”
“뭐, 친해져서 노하우라도 물어볼까? 남의 나라에 시집가면 뭐부터 해야 되냐고?”
“외로우실 거 아냐.”
“나도 나중에 외로워질 거야.”
“그래도 너보다는…….”
클로에가 하려는 말을 모두가 알았기에 더는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 대의 황후로 정해져 있는 말레카의 왕녀는, 황태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덕에 이도 저도 아닌 별궁의 손님으로 지내고 있었다. 말레카의 첫째였던 그녀가 제 남동생이 성인이 되어 왕세자 책봉을 받을 때쯤 자진해서 고국을 떠나 온 것이, 벌써 세 해 전의 일이었다.
“왕녀님은 누구와 결혼하실까.”
클로에는 한숨처럼 내뱉는 메리앤의 그 말이 한편으로 자기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았다. 내후년에 성년이 될 메리앤의 혼처는 끝의 끝까지 제후국들을 저울질할 황제의 손에 달려 있었으니까. 아직 프레더릭이 명확한 이유 없이 황태자 책봉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메리앤이 결국 스체르바뇰로 가게 될 것 같다…… 라는 게 마지막 소식이었지.’
또 한편으로 클로에는 제 처지도 떠올렸다. 저 역시 혼처가 정해지지 않아 이맘때쯤 메리앤과 만날 때면 늘 제후국의 왕자들 이야기로 열을 올리곤 했더랬다. 제국의 사교계에 크레벨 소공작보다 멋진 남자는 없으니, 클로에의 관심사는 자연스레 타국의 왕자들에게로 뻗어 갔던 것이었다.
‘그땐 폐쇄적인 스칸다르 왕실은 후보에도 없었지만…… 이제는 알지.’
제가 남은 2년을 어떻게 살더라도, 스칸다르에 가게 되는 건 저라는 것을.
‘갑자기 5년 후로 돌아가지 않는단 확신만 있으면 이것저것 해 보고 싶은 게 많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클로에는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새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을 지닌 말레카의 왕녀에게는 별 표정을 짓지 않아도 처연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처음 오셨을 때의 환영연에서 인사 올릴 때의 인상은 그랬는데, 말레카의 왕세자보다 뛰어나셔서 쫓기듯 온 거란 풍문이 있는 걸 보면 다른 면이 있을 듯도 했고.
‘어떤 분일까.’
그녀를 뭐라 칭해야 할지 몰라, 또는 제 부모님이 1황자파 또는 2황자파여서 등등의 다양한 이유로 고티유의 영애들은 선뜻 말레카의 왕녀와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녀가 황태자비라도 되었다면 다과회를 열어 영애들을 초대했겠지만, 그저 손님 신분인 지금에야 언감생심이었으니까.
덕분에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클로에도 마찬가지. 몇 년 뒤 다른 나라 사람 될 거라 툴툴대는 메리앤은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 사정이 이젠 낯설지가 않아, 클로에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클로에가 그녀에 대해 아는 단 하나가 있다면…….
“아무래도 프레더릭 전하 아니겠어?”
마침 정원에 프레더릭이 시종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클로에만 알고 있는 미래에서 곧 결혼하게 될 두 남녀는, 내외하듯 거리를 한참 띄우고 서 있었다.
티타임을 마치고서 클로에는 메리앤과 함께 원래 목적이었던 황자궁 서고로 향했다.
여러 도서관들 중 이곳을 먼저 찾은 것은, 학술적인 가치보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재미에 좀 더 치중한 책들을 구비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책에 실린 일견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들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들이었고, 사실을 꾸며서 소개한다 해도 아주 없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었기에 제 경험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면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으리라 여긴 것이었다.
“근데 왜 갑자기 어렸을 때 읽은 게 생각이 났어?”
“글쎄, 그냥 며칠 전에 갑자기 떠올랐는데 머릿속에서 안 사라지는 거야.”
“언니도 배운 걸 까먹는 때가 있구나? 하긴, 어렸을 때 읽은 거면 그럴 만도 한가.”
메리앤과 미라벨에게는, 어린 시절에 영지에서 읽었던 책의 뒷이야기가 갑자기 너무 너무 궁금해져서 온 거라고 둘러대었다. 무슨 책인지도 기억이 안 나서 일단 도서관을 다 둘러봐야겠다고. 그중에 몇 개 빌려서 집에서 읽어 보면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그리고 그 사연을 들은 메리앤이 황자궁에서 자란 이력을 살려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제 집도 아닌 곳에 부모도 없이 내던져진 어린 공녀에게, 황자궁의 방대한 장서들이 벗이며 가족이 되어 주었으리라.
메리앤은 익숙하게 역사나 종교, 구전 설화 등의 책들이 진열된 서가로 클로에를 안내했다.
“이쪽이 민담이나 구전 설화가 모인 쪽이야.”
“응, 고마워. 혹시 여기서 시간 여행……이라거나 과거를 거슬러 오른…… 뭐 그런 내용이 들어간 책이 있을까?”
“진짜 우리 어렸을 때 좋아했을 만한 거네.”
메리앤이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클로에는 심장이 콕콕 찔리는 것 같았다.
“있어 봐, 나는 저쪽 가서 찾아볼게.”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메리앤이 다른 서가로 넘어가자, 클로에도 제 나름으로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보통 귀족들 사저의 서재가 가문의 일원들이 대대로 구입한 책들로 꾸려진 반면, 황궁에는 출판사에서 진상하는 초판본들이 다 모여 있기에 책의 종류도 그 제작 연대도 다양했다.
오르발의 환상 체험, 쉬메이가 폭로하는 선사시대의 비밀, 라쇼페에서는 사람들이 사라진다, 기타 등등.
그럴싸한 제목의 책을 꺼내 보고, 그 목차와 서문을 일일이 훑고, 실망하고, 또 그럴듯한 제목의 책을 꺼내 보고, 목차와 서문을 훑고, 또 실망하고…… 원했던 종류의 책은 많았지만, 또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와중에 클로에가 찾는, 시간을 거슬러 오른 체험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잘 보이지 않았다.
‘기담이나 유령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데……’
30분쯤 클로에가 혼자 고민하고 있으려니, 반대편 서가에서 한참 있다 온 메리앤이 트롤리에 책을 한가득 싣고 왔다.
“신화나 에르드교 비사 쪽에 시간 여행 관련된 책들이 많이 있더라고.”
역시, 친우에게 도움받는 맛이 이런 거였지. 클로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트롤리에 쌓인 책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렇게 고른 것이 다섯 권. 메리앤의 이름으로 빌린 뒤, 책마다 제각각인 무게를 고려하여 제가 세 권, 미라벨이 두 권씩 나눠 들었다.
“그럼, 다음에 반납하러 올 때 편지할게.”
“응, 너무 더워지기 전에 와. 다음엔 테니스라도 치자.”
메리앤과 헤어지고서 외궁을 나서는 클로에의 발걸음은 가볍고 손은 무거웠다.
“찾던 게 있을 것 같아?”
“집에 가서 읽어 봐야 알 것 같아. 그래도 미아 덕에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니 잘 됐지.”
“영지 내려가서 찾아보면 좋을 텐데…… 겨울이 한참 남긴 했으니까.”
여상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 미라벨의 모습에, 클로에의 마음에는 자그마한 미안함이 깃들었다.
대축일 주간에 누아제트 남작부인이 남작을 만나러 궁정백령에 갔을 때, 미라벨은 어쨌든 클로에의 호위였기 때문에 고티유에 남는 쪽을 택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미라벨이 저와 붙어 있느라 아버지도 남동생도 마음대로 못 만나는 것이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내후년엔 스칸다르에도 함께 가게 될 거고…….’
아직 미라벨은 모르는 일이지만.
에티엔과 클로에가 열 살쯤 될 때까지는 계절마다 영지와 고티유를 오가며 지냈었는데, 에티엔이 수도의 선생들에게 고등교육을 받게 되면서 겨울에나 한 번쯤 내려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미라벨도 제 아버지를 떠나 온 지가 벌써 10년이 다 된 셈이었다.
“이번 여름휴가는 영지에서 한번 보내 볼까?”
“됐어, 거기가 겨울에밖에 볼 게 더 있니?”
“너 남작님이랑 카밀 안 보고 싶어?”
“누아제트의 가족 상봉은 1년에 한 번이 딱이라는 게 우리 가문 신조야.”
미라벨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그게 진심이건 거짓이건, 미라벨이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며 내궁을 나와 중정을 걷고 있을 때, 바람이 한결 매섭게 불었다.
머리칼이 눈을 찔러 와 반사적으로 손을 움직이는 바람에 맨 위에 올려 두었던 책이 떨어지고 말았다.
“아유, 무슨 바람이.”
미라벨이 냉큼 제가 들고 있던 책을 한 팔로 옮겨 들고선,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괜찮아?”
“으응,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어디, 고개 들어 봐.”
미라벨이 살펴보는 앞에서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을 때, 클로에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저편에서 내궁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눈에 익은 실루엣이 있었다.
호위를 거느리고서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장신의 남자. 하나로 묶은 밝은 금빛 머리칼이, 기울어진 오후의 햇살을 받아 진하게 빛나며 흩날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 그러나 제가 본 적 없는 표정. 무언가를 고심하는지 그의 눈매며 다물린 입매며, 굳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까 데메트리안의 입에서 ‘왕자님’이란 호칭이 튀어나온 후로 만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 이였다.
클로에는 놀란 마음을 안고 그저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간격이 좁혀졌을 때, 서로 말을 건네도 어색하지 않은 정도가 되었을 때. 그제야 제 앞의 영애들을 인식한 그의 표정이 살포시 풀어졌다.
“궁정백 영애 아니십니까.”
눈가에 물기가 번진 채로 멍하니 서 있는 클로에에게 웃어 보인 그 남자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책을 제 손으로 두어 번 털어, 이를 건네주면서 눈을 접어 예쁘게 웃으며 말을 붙이는 것이었다.
“봄이 왔는데도 바람이 아직 매섭습니다.”
“예…….”
클로에는 제가 얼마나 얼이 빠져서 답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소리를 내었다.
“왕자님, 안녕하세요.”
해사한 눈웃음 사이로 그의 연갈색 눈동자를 금처럼 빛내는 남자.
장차 클로에의 부군이 될 스칸다르의 왕자 뷔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