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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23화 (23/189)

23화. 여전한 것과 여전하지 않은 것 (8)

돋보기안경을 들이대고 한참을 이리저리 살피던 주인장이 이내 경쾌한 목소리를 내었다.

“썩 높은 등급은 아니지만 다이아몬드는 맞군요. 디자인은 귀족 나리들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것도 사시는가?”

“왜 안 사겠습니까. 평민들도 돈 좀 있다 치면 보석에 관심을 갖지요. 하물며 사도들의 맏이인 아망의 상징석인데요.”

“흠…….”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여기서 파는 게 나을지, 오래 알아 온 보석상에 파는 게 나을지. 어쩌면 라크루아의 후광으로 값을 더 쳐 줄 수도 있는 일이긴 한데.

‘재미로 해 본 건데 소문낼 필요는 없지.’

제 가문만 상대하는 것도 아닌 그들이 무슨 비밀이라고 엄수해 줄 것도 아니었으니까.

“팔면 얼마쯤 하겠는가?”

“50입죠.”

“50골드?”

저들이 생각하는 ‘보석’의 가격을 떠올리며 화들짝 놀라는 영애들의 낯에, 주인장은 웃기는 소릴 다 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실버요, 실버.”

“아…….”

멋쩍어진 클로에는 미라벨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10실버였지?”

“다른 것들이랑 한 번에 계산해서……”

그날 산 것들을 헤아려 보는 듯이 미라벨의 눈동자가 허공을 방황했다.

“응, 맞는 것 같아.”

마르코네서야 아무리 알의 크기가 커도 그냥 희끄무레한 보석이어서 헐값에 사들였었나 보다.

용병들이 품고 다녔을 보석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 텐데, 그걸 전당 잡힐 정도라면 푼돈이라도 필요한 상황이었던 거겠지. 제 가게를 찾는 고객층이 관심 가질 것들도 아니라 마르코도 대충 원금 회수나 하자며 싼값에 팔았겠고.

“그럼 그렇게 해 주시게.”

주인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금고로 들어갔다.

‘저리 좋아하는 걸 보니 왠지 손해 본 느낌은 나는데……’

하지만 저로서도 몇십 실버는 이득을 본 셈이니 더 흥정할 것도 없었다. 귀족 영애가 상인들에게 뭘 팔며 흥정한다니, 안 될 일이기도 했다.

그리 마음을 다잡는 사이 클로에의 눈앞에 은화 50개가 담긴 주머니가 놓였다.

“와아아아아, 로이, 돈 벌었네?”

“그러게…….”

제가 기억하는 미래까지 통틀어 처음으로 번 돈이었다. 무엇을 살 때 값을 알고 치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 제가 입고 있는 드레스 한 벌 값도 못 되는 돈이겠지만, 처음으로 제힘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이…… 지금 벅차오르는 것은,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리도테의 졸업 시험에서 차석을 따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뭔가 조금 다르달까.

‘비록 책 서너 권 사면 끝날 돈이겠지만……’

그건 어쩌면, 축제 장터에서 불한당들을 막아냈을 때에 손끝이 찌릿찌릿했던 그 감정과도 닿아 있는 것 같았다. 클로에의 입술이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신기하다.”

“전 아가씨가 다이아몬드를 알아본 게 더 신기합니다요.”

클로에는 벅찬 마음을 다스리며 웃고, 미라벨은 제 새끼가 뭘 해낸 게 재밌어서 웃고, 주인장은 싼값에 괜찮은 다이아몬드를 매입해서 웃었다.

* * *

제 친우를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 황궁 정문에 다다라 마차에서 내리려던 클로에는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들어 제 마중을 놓치지 않으려고 작정을 한 것 같은 데메트리안이 또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저를 만나러 온 것도 아닌데.

“데미? 어쩐 일이야?”

“지나가다가 너희 마차가 보이길래.”

원로원의 행정처가 황궁의 외궁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이 그의 일터이기는 했다. 한데 어째 요즘의 실적이 있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게 되는 것이었다.

그의 곁에 연보랏빛 머리를 틀어 올린 동료 보좌관 퓌잘리 누스가 있는 걸 보니 일부러 기다린 건 아닌 것 같았지만.

‘파이겐 경도 아니고, 동료를 함부로 데리고 다닐 순 없겠지.’

클로에의 의심이 깊어지려는 것을 감지한 데메트리안이 재빨리 말했다.

“너야말로 무슨 일이야?”

“나야……”

클로에의 시선이 퓌잘리 누스를 스쳤다.

“캔달우드 공녀 전하 알현하러 왔어.”

“황자궁으로 가는 거지? 나도 2황자 전하를 뵈러 가려던 참인데.”

그렇게 말하며 퓌잘리 누스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클로에를 향해 묵례를 해 보이며 말했다.

“그럼 저는 먼저 집무실에 돌아가 있죠.”

퓌잘리를 향해 고개를 까닥인 데메트리안이 제 쪽으로 접은 팔을 내미는 양에, 클로에는 뭔가에 홀린 듯 그 팔을 잡았다.

그녀를 에스코트해 중정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향하며, 데메트리안은 제 동료에게 치러야 할 대가를 떠올렸다.

며칠 전 데메트리안이 라크루아의 전령을 마주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날도 비번인 2황자를 만나러 갔다가 내궁을 나서는 길에, 출입 허가를 받으려고 서 있는 그를 발견한 것이었다.

“클로에의 편지라고?”

“네, 캔달우드 공녀님께 보내는 서신입죠.”

“……내가 대신 전해도 괜찮겠나?”

“아, 네! 그러믄요, 그래 주시면 감사합니다요.”

라크루아의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은 크레벨 소공작께서, 그 어려운 내궁 출입을 대신해 주신다니. 전령의 마음속에서 아가씨의 친구분에 대한 존경심이 한가득 샘솟았다. 궁전 내부를 구경하는 것은 눈호강이었지만 출입 허가를 받고, 들어가서 예법을 차린답시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웠던 것이다.

“뭘 그렇게 빤히 보고 있어? 나가 봐, 전령.”

“답신을 줘야 할 거 아냐.”

“답신은 전령한테만 주는 건데.”

“방금 나더러 전령이라며?”

클로에의 친우인 동시에 데메트리안과도 어린 시절부터 봐 온 캔달우드의 공녀 메리앤은, 저보다 다섯 살 많은 그에게 늘 심술 맞게 구는 경향이 있었다. 입술을 삐죽대던 그녀는 시녀에게 필기구를 가져오라 하고는, 데메트리안이 보지 못하게 가리면서 뭐라 순식간에 적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걸 말려서 접는 사이에 대충 내용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 두 시.」

문제는 단 세 단어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었지만…….

이를 돌려주며 무슨 일인지 전령을 떠보았으나 그는 역시 아는 것이 없었고, 그렇게 데메트리안은 저의 동료와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이었다.

“당분간 청사에 가는 시간을 점심식사 후로 늦추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퇴근이 늦어지는데요.”

“다녀와서 할 일을 미리 해 두면 되죠.”

“오후 업무는 청사 다녀와서 생기는 것이지 않나요?”

으윽…… 늘 그렇듯 칼 같은 그녀의 대꾸에 데메트리안은 미간을 모았다.

언제나 여유만만한 제 동료의 낯에 뭔가 초조함이 깃드는 것을 놓치지 않은 퓌잘리 누스는 안경을 슬쩍 추켜올리더니 선심 쓰듯 말했다.

“선 자리 하나 주선해 주세요. 자작가 이상, 키 크고 얼굴 반반하고 제 아내가 나랏일 해도 쪼잔하게 굴지 않을 영식으로.”

제국 아카데미를 졸업해서 관료가 된 하위 귀족 영애들에게는 혼삿길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제 가문의 인맥으로는 고만고만한 혼처나 들어올 것이 빤하니, 눈에 차는 영식들이 다수 포진해 있을 확률이 높은 넓은 물에 진출한 것이랄까.

하지만 아카데미 로맨스고 집무실 로맨스고 궁정 로맨스고, 모두 남의 일이란 것을 일찍이 깨달은 퓌잘리 누스였다.

그녀의 늦은 퇴근은 사흘에 그치긴 했지만…… 당분간 사교 클럽에 매주 가 봐야 하게 생겼다.

‘그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클로에가 부담스러워했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차에, 뒤따라오던 미라벨의 쾌활한 목소리가 울렸다.

“데미 공자님, 그때 그 일당들은 어떻게 됐어요? 직접 심문하셨다면서요?”

“아, 분리 독립파 말이죠.”

그러고 보니 결과를 공유하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미라벨의 말을 듣고서 흘끗 쳐다보니 클로에도 궁금해 하는 낯을 띠고 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도대체 이 아가씨가 그날 그 시간에 왜 그런 곳에 와 있었는지 납득이 안 갔다. 상점가에 볼일이 있어서라고는 했지만…… 뭐, 이젠 아무 상관없나.

“그들의 배후가 따로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영 입을 열지 않더군요. 테러를 일으킬 작정도 아니었다 잡아떼고. 아마 조만간 그 왕자……를 불러 황제 폐하께서 문초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왕자. 클로에의 눈빛이 일순 떨렸다.

말을 꺼내면서도 되레 찔렸던 데메트리안이 눈치를 살폈으나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순간적인 미동이었다.

클로에는 제가 리도테에 들어가면서 귀족가 자제들만의 사회를 처음으로 겪게 되었을 때, 이미 유명 인사였던 그 왕자님을 떠올렸다. 그의 나이 열 살에 고티유에 볼모로 와, 당시 거의 10년을 돌아갈 곳이 있음에도 갈 수 없는 이방인으로 살고 있던 그 왕자님.

훗날 저의 부군이 될 스칸다르의 적장자, 뷔욘 스칸다르의 이야기였다.

그는 부왕이 위독해져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야 될 때가 되어서야 고티유를 떠나는데, 그게 몇 달 뒤에나 일어날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아직 고티유에 체류 중인 거였다.

거의 세 해를 부부로 지낸 그가 아직 같은 도시에 있는 것을 상기하자니 괜스레 마음이 수런거렸다. 엄숙하고 차가운 셰비크의 왕궁에서 클로에에게 위안이 있었다면, 부군의 지분이 단연코 가장 높았으니까.

‘테러 미수 사건으로 이제 황궁에 자주 드나드시겠구나.’

클로에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러느라 제 팔을 잡았던 손이 느슨해진 것에, 데메트리안은 시선을 기울여 그 옆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이 아가씨는 또 무슨 생각에 빠져서.’

요즘처럼 이렇게 클로에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여느 연회를 마치고 단둘이 마차를 타고 집에 돌아갈 때의 그 안락한 공기, 그런 것들을 오래간 그려왔던 데메트리안은 클로에가 저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불쾌하다고?’

그러고 보면 클로에가 대축연에서 제 춤을 거절했을 때에도 이런 감정을 느꼈던 것도 같고.

그런 제 모습에 다시금 위화감을 느낀 데메트리안은 간신히 빈손을 입가를 가져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간신히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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