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여전한 것과 여전하지 않은 것 (7)
“흠…….”
무엇을 가늠하는지, 머리핀에 마력을 불어넣은 라구의 가느다란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입을 얼마간 이리저리 빼죽대던 그가 말을 이었다.
“새겨 넣은 마력이 되게 미미하네요. 하긴, 머리핀인데 밀도가 높으면 머리 아파요.”
“위험한 건 아닌가?”
“뭐…… 새겨진 마법식도 위험할 소지가 있는 마법은 아닌 것 같아요. 위험한 거라도 마력이 이거밖에 없어서야 별 영향도 못 끼칠 테니 걱정 마세요. 이런 하급 마정석에 마력이 많이 담겨 있으면 머리에 대자마자 아! 아프다! 싶거든요. 이건 누가 봐도 하등품 보석으로 만든 거잖아요.”
그래서 위험하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멋대로 떠들던 라구가 벙한 의뢰인들의 시선을 그제야 인식하고는 웃어 보였다.
“아, 그냥 머리 위에 반짝이는 빛무리를 좀 얹어주는 정도니까, 주목받고 싶으실 때 쓰세요.”
사도들처럼요. 머리 위에 원을 그려 보이며 라구가 지껄였다.
‘다른 의미로 위험하단 소리네…….’
설명 보고 살걸. 반갑다고 덥석 사지 말 걸 그랬다.
알레지오에서 나온 클로에는 라구가 정화해 준 펜던트를 눈 위로 들어 햇살에 비추었다. 위쪽에 금으로 고리를 덧씌운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몬드. 그래, 오염된 부분을 걷어내고 나니 정말 다이아몬드였다.
“진짜 신기하다. 처음 볼 땐 뿌옜는데.”
“그러니까.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라구가 완벽히 처리하진 못했다고 했지만 육안으로 보기에는 그저 깨끗한 다이아몬드여서, 신전에 들를 필요 없이 우선 아티장 지구로 향하기로 했다.
‘어차피 보석 감정은 육안으로 하는 걸 테니까. 안 괜찮다면 나중에 신전 들르지, 뭐.’
크고 작은 공방들이 모여 있는 아티장 지구는 길이 비좁아 마차로 들어가기 불편했기에, 초입에서 내린 클로에와 미라벨은 발품을 팔아 적당한 보석상을 찾아보기로 했다.
“마르코한테 가서 물어볼까?”
미라벨이 대뜸, 이 지구에서 제게 제일 친숙한 인물의 이름을 주워섬겼다.
“거기서 산 걸 팔 만한 가게를 추천받겠다고?”
“우리가 뭘 팔 건지 마르코가 알겠어?”
“그래도……. 그리고 아무래도 내가 뭘 파는 건 좀.”
“아아, 하긴. 알아 모시겠습니다요, 아가씨.”
미라벨이 익살스레 대꾸했다. 아무리 장난이어도, 귀족 아가씨가 보석을 팔겠다고 돌아다니는 것이 우스갯소리로라도 흘러나갈까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그것도 라크루아의 영애가 말이다.
“하긴, 여기 공방들은 다들 제 일에 자부심 넘치는 사람들일 거니까.”
대대로 공방을 꾸리고 있는 장인들의 가게들이 모여 있는 만큼, 못 믿을 곳은 딱히 없을 거라 생각한 미라벨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도 좀 알아보고 왔어야 했나…….’
한 15분쯤 돌아다녀도 감이 안 잡히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미라벨의 경우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저기 매장 크다. 저기 갈까?”
“보는 눈이 많을 것 같아.”
“음…… 그럼 저런 가게?”
“너무 작으면 왠지 좀……. 그리고 좀 음침해 보이지 않아?”
“그럼 저기?”
“저긴 연 지 별로 안 돼 보여. 왠지 신뢰가 안 가는데…….”
“…….”
미라벨이 툴툴대기 시작했지만, 자꾸 반려하는 클로에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클로에에게 상거래란 사교계 입소문으로 찾아가거나 제집으로 오는 자들을 맞이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냥 마르코네에 물어볼 걸 그랬나.’
그때 클로에의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단정한 듯이 다듬은 검정 더벅머리 하며, 적당히 큰 키에 호리호리한 듯한 뒷모습이 마치 데메트리안인 듯 아닌 듯……
‘제복남!’
지난주 축제 장터에서 제가 망신을 준 사내였다.
“라비, 저기 저 사내 말야. 저번 주에 내가 말했던 그……”
제복 입고 영애들 속였던 놈 말야. 클로에의 재빠른 설명에 미라벨이 눈을 빛냈다. 오호, 그 재간둥이 되시겠다?
누아제트 남작부인과 경호조에게 혼나 가라앉아 있던 미라벨의 마음을 풀어 주겠답시고 사실 그날 다른 일도 있었다고 털어놓던 클로에의 이야기에, 좋은 구경 놓쳤다며 아쉬워한 미라벨이었다. 광대탈을 놓고 한 연기도 기가 막혔는데, 또 어떤 깜찍한 짓을 벌였다니 말이었다.
그날 미라벨은 여러모로 다짐했다. 선배들이 뒤를 봐 준대도 절대 로이 옆에서 떨어지지 말자.
미라벨은 눈을 빛내며 그 남자의 뒤통수를 보았다.
클로에는, 과연 어떻게 생긴 놈인가 싶은 마음에 눈으로 그를 좇았다. 반가면으로 가려 두었던 그 안쪽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이 근방의 지리에 익숙한 듯, 놈은 주변 한 번 두리번거리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클로에와 미라벨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속도를 높여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았다.
그런데 마침, 놈이 보석상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조금 오래돼 보이긴 했지만 클로에가 음침해 보인다던 곳보다는 넓었고, 근방 사정을 잘 아는 듯한 제복남이 거침없이 들어가니 ‘현지인’ 인증 가게로 느껴졌다. 클로에와 미라벨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는 그를 따라 보석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받아 줘요, 네?”
“욘석아, 장물은 안 받는다니깐.”
“훔친 거 아니라고요. 진짜 선물 받았다니까요?”
주인장 혼자서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게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내부의 규모가 조금 더 컸다.
가게와 함께 늙어 온 듯한 반백의 주인장과 친근한 사이인 듯, 놈은 그 아련한 척을 하며 한 입만 달라던 때와 딴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목소리만 들었다면 같은 사람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가게를 둘러보자니 구색이 나쁘지 않았다. 사교계 최신 유행을 좇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그럴싸한 귀금속들을 파는 한편, 금이나 보석류를 매입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 근처에서 잠시 구경하고 계시오들.”
저들을 흘끔 보고는 여상하게 대꾸하는 것이, 귀족들의 방문에도 익숙한 듯하고. 잘 얻어걸렸네.
“근데 네가 어떻게 이런 게 생겨? 보자……”
상인이 외알 돋보기를 끼고 놈이 내민 귀걸이를 살폈다.
“에…디스…… 처음 들어보는데?”
“그러니까요. 어디 지방 귀족일 테니 앞으로 볼 일도 없어요.”
사 줄 거죠? 보채는 말소리에 언뜻 쳐다보니, 놈은 주인장에게 제가 축제 때 뜯어낸 영애들의 장신구들을 팔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장이 살피고 있는 건 한 짝만 있는 귀걸이였는데, 매대 위에는 놈이 올려 둔 듯한 실팔찌, 브로치, 새끼손가락에 끼는 반지 같은 자잘한 장신구들이 늘어놓여 있었다.
‘그때 도망친 줄 알았는데, 알차게도 뜯었네. 아니면 그 전에 이미……’
그날의 의기양양했던 마음이 다시금 피어난 클로에는, 미라벨에게 눈짓하며 놈에게 다가갔다.
그날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기회가 온 건가, 미라벨은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혹시, 아카데미 생도 아니신가요……? 지난주 축제 때, 반가면을 쓰시고……”
놈이 재빨리 뒤돌아보았다. 놀라서 흠칫 굳어진 입매가 놈이 제복남과 동일인임을 새삼 증명해 주고 있었다. 다만, 어딘가 귀족적인 태를 풍기던 그 하관과 달리, 눈이 조금…… 비율이랄까 전반적인 조화 같은 것에 맞지 않았달까…….
그런 줄을 알고 반가면을 썼던 거였나.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자였다.
‘데미, 미안. 아무리 뒷모습만이라지만 이런 자하고 헷갈렸다니.’
클로에가 데메트리안에게 마음속으로 사과의 말을 보내는 사이, 놈 역시 클로에의 얼굴이며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모르겠는데요…….”
“왜요, 전 똑똑히 기억하는데.”
“그럴 리가요. 전 아가씨처럼 높으신 분과는 말을 섞은……”
거기까지 말한 놈이,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히에엑, 숨을 들이켰다.
“호, 호, 혹시 그 아카데미,”
“날 알아보겠어?”
“말레카산 캐시미어잖아요……. 게다가 그런 패턴의 울실크는 안드레아 의상실에만 판다구요.”
놈이 목 졸린 듯이 내뱉었다. 우물쭈물대다가 제 입에 담긴 말만 뱉는 걸 보니, 같잖은 연기를 할 때와 달리 애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안드레아 의상실?’
제 모녀의 단골 의상실 이름이 맞았다.
“축제 장터 같은 데에 안드레아 옷을 입고 오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요.”
생각해 보니 그날 입고 갔던 로브가 말레카산 캐시미어였던 것 같다. 지금 입은 드레스도 그날 입은 드레스도 모두 안드레아에서 맞춘 옷.
안드레아는 앙헬라타 대로에서 가장 오래된 부티크로, 오래 거래해 온 가문들과만 거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명문가의 주문만 받는다는 소리. 라크루아는 다른 명문가들에 비해서 재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고티유에 발붙이고서 라크루아를 홀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어쩐지 하위 귀족 영애들만 걸렸다더니……. 이런 눈썰미가 있었나?’
클로에가 눈을 빛내며 은근하게 물었다.
“실크 손수건은 벌써 파셨나?”
“아, 아니, 그게,” 숨넘어갈 듯이 말을 더듬던 놈은 주인장을 보며 재빨리 외쳤다. “아저씨, 다음에 올게요!”
그러고서 순식간에 가게 밖으로 뛰쳐나가는 게 아닌가. 그 줄행랑에, 가게 안으로 초봄의 쌀쌀한 바람이 숭덩 들어왔다.
생각보다 뻔뻔함이 부족한 녀석이었네. 클로에는 미라벨 쪽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미라벨로서는 클로에의 연기가 발동하려다 만 것 같아서 입맛만 다셨다.
‘뭘 어쨌는지 디 경이 가끔 실실 웃던데.’
“쯔쯔쯔쯔, 녀석 저거, 또……”
그러는 꼴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던 주인장이 아가씨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영애님들께서는 무엇을 팔려고 오셨는지……?”
“우리가 뭐 팔러 온 줄 어찌 아셨담?”
“우리 가게에서 파는 것들이 영애님들 눈에 찰 리가 있나요.”
“으음, 귀족 영애들이 좀 실험적인 걸 좋아하긴 하지.”
저도 남이 보기엔 귀족 영애면서 미라벨은 그렇게 말했다. 주인장은 그리 대꾸하는 것이 맘에 든 것처럼 너털웃음을 지었다.
‘넉살 참 알아줘야 해.’
어려서부터 유모의 딸로서 경호조의 요원들과 어울려 온 미라벨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아저씨들과 스스럼이 없었다. 이런 걸 보면, 셰비크 왕궁에서 제 시녀로서 모든 성질을 죽이고 살았던 미라벨에게 다시금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어쩌다 구한 다이아몬드가 있는데, 진품이 맞는지 알아보고 싶네.”
“어디, 보자…….”
아까 놈과 감정을 해 주네 마네 티격대던 것과는 딴판으로, 주인장은 곧바로 돋보기 외알 안경을 끼고 클로에가 내민 펜던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클로에와 미라벨이 숨을 죽이고 그의 사소한 낌새 하나하나에 주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