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여전한 것과 여전하지 않은 것 (5)
“있어 봐.”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을 어슷하게 흘기고는 제 가족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간신히 대축연이 시작하기 전에 들어온 에티엔이 궁정백 부부에게 오늘의 사연들을 주워섬기고 있었다.
“아버지.”
“그래, 로이야.”
“오랜만에 아버지랑 한 곡 추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으응?”
궁정백의 시선이 제 아내와, 뒤이어 늘 제 딸의 상대가 되어 주곤 했던 청년에게로 가닿았다.
“허허, 이 아비랑 말이냐? 이걸 어쩐다……”
방황하는 그의 눈빛 아래로 즐거운 듯 올라간 광대가, 그가 제 말소리와는 달리 굉장히 기꺼워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여보, 그래도 되겠소?”
“무얼 물어요? 그럼 저는 우리 아들이랑 있으면 되지요.”
궁정백부인이 그리 말하며 바로 옆에 서 있던 제 아들의 팔짱을 꼈다. 에티엔의 눈동자가 누군가에게 난처함을 피력하려는 듯 먼 곳을 헤맸지만, 클로에는 이를 마음에 담을 겨를이 없었다. 영문도 모르고 첫 춤을 거절당한 데메트리안의 허망한 얼굴을 애써 무시하느라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보통 특별한 관계의 남녀들이 추곤 하는 첫 춤에 맞추어 서정적인 분위기의 중간 템포 왈츠가 흘러나왔다. 클로에는 어린 시절 처음 사교춤을 배웠을 때 아버지와 연습하던 추억에 잠겼다.
“로이, 네가 사교계에 데뷔하고서 이제 이 아비하고는 재미가 없는 줄 알았단다.”
“아버지도요, 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말로 무슨 바람이 분 게냐? 나야 우리 아가씨랑 오랜만에 춤을 추는 게 좋다만.”
클로에는 작게 웃었다. 큰일이 있기야 했지만, 사실 별일 아니기도 했다. 5년을 더 살아 본 저로서는 몇 년 뒤 저를 스칸다르로 보내고 자책하게 될 아버지를 미리 보듬는 거라 생각하고 있대도, 아버지의 눈에 비치는 스무 살의 클로에로서야 단순한 변덕이 아니겠는가.
‘그 변덕이 데미 때문이란 게 문제지만…….’
클로에는 아버지의 너스레를 적당히 받아 넘기며 눈동자를 굴려 데메트리안을 찾았다. 제가 궁정백과 춤을 추러 나가자 잠시간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데메트리안은, 이내 소공작에게 뭐라도 한마디 붙여 보려는 사교계의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네가 개막식 때 와 줘서 이 아비가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우리 로이가 이제 시집갈 때가 돼서 철이 다 들었나 보다 했지.”
“아버지도 참, 계속 그런 말씀이세요.”
클로에는 핀잔을 주는 듯 아버지를 올려다보았지만, 그 눈빛에는 예견된 미래에 대한 음울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궁정백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을 그 미래.
“벌써 저를 시집보낼 생각 하시는 거예요? 저 몰래 혼처 알아보시고 계신 거였어요?”
“그럴 리가 있겠니. 네 어미가 고티유 생활마저 답답해하리란 걸 몰랐던 게 내 평생의 한인데 말이다.”
바닷가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자라난 소녀는 리도테에서 수학하기 위해 올라온 제도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지만, 그 사랑이 제도를 떠날 수 없는 처지의 궁정백 가문의 후계자였던 탓에 햇살도 바닷물도 모자란 제도에서 향수병을 벗 삼은 궁정백부인이 되었다. 이를 평생 미안해하는 궁정백이었기에 자객 출신 유모를 들인다는 기상천외한 발상도 받아들였던 것이리라.
“네가 기꺼이 떠날 만큼 마음이 가는 이가 나타난다면야 이 아비나 네 어미가 기꺼이 축복해 줄 일 아니겠니? 라크루아에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럴수록 더 빛나는 사랑일 테고 말이다, 궁정백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클로에는 저에 대한 신뢰와 사랑만으로 빛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제가 기억하는 그때에 황제와의 만찬 자리에서 침통하게 굳었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도 아버지도 서로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는 일이었는데.’
끝내 데면데면해지고 말았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떠올리며 클로에는 쓰게 웃었다. 그걸 바라보는 궁정백은 꿈에도 모를 의미를 담고서.
그리 웃던 클로에의 눈초리에 다시금 데메트리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제 곁으로 몰려든 이들의 머리통 너머로 클로에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클로에의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데메트리안은, 웬일로 라크루아 영애와 첫 춤을 추지 않는지 상냥한 걱정을 건네며 다가온 사교계 지인들에게 둘러싸인 크레벨 소공작은…… 줄곧 클로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내가 섣불렀던 걸까.’
데메트리안은 제가 내밀었던 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게 굴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떨렸지만 티 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무언가는 달라 보였나 보다. 그렇다면야 저 기민한 여인이 속을 리가 없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고, 나중에는 들킬까 조마조마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그저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억누른대도 저답지 않은 모습이 튀어나오는 것이 클로에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으리라.
‘모든 것이 준비되기 전까지는……’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어렵게 얻은 기회니까.
춤곡이 끝나자마자, 데메트리안은 주변의 인사들에게 고개를 까닥여 양해를 구하고는 클로에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첫 춤을 거절한 것이 클로에는 자못 흡족했다. 그것이 굳이 득의양양해 할 일만은 아님을 알았지만, 어쨌든 그랬다.
‘뭔가 이긴 기분도 들고…… 데미가 뭔가 묘하게 헷갈리게 하니까 말야.’
데메트리안이 춤을 청하기 위해 내민 손을 맞잡고, 가운데의 플로어에 자리를 잡는다. 스무 살의 클로에에게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깊은 우정으로만 바라봐 주는 사교계 지인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이 역시 오랜만인 일이었다. 클로에는 재차 춤을 청하는 데메트리안의 손을 마지못해 맞잡으며, 제 손이 아까의 그의 손과 마찬가지로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어린 시절 사교춤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 연습해 왔으니, 데메트리안과 함께라면 클로에는 그 어떤 춤도 습관처럼 출 자신이 있었다. 그와 늘 추던 첫 춤 때보다 더 빠른 속도의 무곡이 흘러나왔지만 마찬가지였다.
다만, 저 낯짝만이 적응 안 될 뿐.
그의 시선은 클로에에게 붙박여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일자로 다물린 입꼬리는 어스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저를 바라보는 눈매는 그저 부드럽기만 했다.
이런 얼굴은, 단둘이 있을 때가 아니면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함께 참석한 사교계 연회에서 나와 라크루아 궁정백저로 함께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만 가능했던 표정.
그건 이렇게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서 비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한숨처럼 꺼낸 말 역시…….
“지금 내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너는 상상도 못할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이 전에 없이 빛났다.
순간 클로에는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에게서 비치는 낯선 기색. 지금까지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피하고만 했던 그것.
제가 내뱉은 말이 진심이라는 듯 그의 눈매가, 입매가 더 깊이 휘어지는 것을 클로에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제가 기억하는 것에서 유일하게 달라진 것. 그것도 제가 한때 너무나도 바라던 방향으로 달라진 것.
혹시 지금의 시간을 다시 사는 게, 뭔가 다른 삶을 엿보게 해 주시는 거라면.
아니,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는 거라면…….
* * *
“오늘 하루도 즐거이 보냈습니까.”
일이 바빠 저녁을 같이하지 못하는 날이면, 스칸다르의 젊은 왕은 늦은 밤에라도 귀애하는 제2왕비의 거처를 몸소 찾곤 했다.
“만찬을 외로이 하게 하여 미안합니다.”
“전하께서 바쁘신 건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아는걸요.”
그 말에 부군이 고개를 천천히 내리며 웃었다. 사르르, 달빛을 녹인 듯한 그의 머리칼이 어깨 너머로 흘러내렸다. 밤이 긴 스칸다르의 별궁에서 눈앞에 그 밝은 금빛의 머리칼이 드리워질 때면 클로에는 낮이 온 것만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제가 도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그런 때면 클로에는 늘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을 내뱉게 되는 것이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를 알고서.
“그대가 나의 나라에서 그 어떠한 고됨이라도 짊어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괴롭습니다.”
역시나……
그의 손끝이 귓가를 맴돈다. 언젠가 귓가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겨 주던 그 손길은, 이제는 익숙한 듯 거리낌 없이 눈가와 볼을 문질렀다.
그의 엄지가 슬며시 아랫입술을 스쳤다.
“예쁜 것들만 즐기세요. 다 그대의 것입니다.”
어느새 방 안에는 색색의 보석과 갖은 짜임의 비단들이 들어차 있었다.
아, 꿈이었나.
스무 살로 돌아온 지 어느새 열흘이 넘었다.
아침마다 햇빛을 받는 천장의 베람이 익숙해지고, 이제는 잠들면 혹시 셰비크의 별궁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지 걱정하는 마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스무 살에 머무르는 것이 익숙해져서는 스물다섯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희미해지고 있달까……
대축연은, 결국 즐겁게 끝났다.
언젠가 헤어지고 말, 결국 연락이 닿지 않아 서운했던 그들을 보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것도 잠시.
막상 언제나처럼 라크루아의 영애에게 호의적이고, 크레벨 소공작과의 관계를 오해하지 않아 주는 그들의 다정함에 마음이 녹은 것이었다.
리도테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도, 다과회를 다니며 알게 되었던 영애들도, 연회에서 몇 번 춤을 췄던 영식들도 다 그랬다.
「초대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만,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할 듯합니다.」
‘몇 통째 쓰는 불참 답신인지.’
다만 그 우정이 어찌 끝날지 알기에, 전처럼 그들과의 사교에 전력을 다할 마음이 들지 않을 뿐이었다.
‘그건 데미와도 마찬가지지…….’
그의 낯선 기색에 매번 마음이 한껏 설레다가도, 결국 그렇게 가라앉고 마는 것이었다.
제가 아는 대로 미래가 흘러간다면, 원하지 않아도 언젠가 다시 셰비크의 별궁 주인이 될 거였으니까. 갑자기 5년을 거슬렀듯이 갑작스레 다시 돌아갈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그러니 스무 살을 다시 살아가는 클로에가 해야 할 것은, 하루하루를 충실히 사는 것뿐이었다. 당장 내일 아침에 ‘돌아’가더라도 아쉬울 것이 없도록. 그리고 2년 뒤 다시 셰비크의 별궁 신세가 되더라도 고티유를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 후회하지 않도록.
셰비크에 있을 때에는 호화로움에 익숙해지느라 몰랐지만, 라크루아의 사람들과 부대끼고 고티유 사교계의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니 클로에는 제가 외로웠었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