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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9화 (19/189)

19화. 여전한 것과 여전하지 않은 것 (4)

그 누구를 만나건 낯을 꾸며내는 법이 없어서 이따금 거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가, 그치곤 굉장한 호의를 띤 얼굴로 클로에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데메트리안이 어려서부터 왕래가 많았던 궁정백에게마저 딱딱하게 굴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까지 살갑게 군 적은 단연코 없었는데.

그 모습을 보는 클로에는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요즘 들어 정말……’

데메트리안을 만나는 게 꺼려지는 건 아니었다. 제 오랜 그리움이 요 며칠의 조우로 해갈될 것이던가.

다만, 어찌할 바를 모르겠을 뿐이었다.

‘자꾸 곤란한 마음만 들게 말야.’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클로에는 제가 기억하는 그대로인 모든 것들을 기쁜 마음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데메트리안만은…… 단순히 기억에 없는 행보를 보여서만이 아니라, 제가 대한 적이 없는 태도를 보이니 좀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제 가족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친근히 굴 때라든가, 마차에서 내리려는 제게 긴장한 기색으로 손을 내밀 때. 그런 때면 클로에는, 태연하게 줄곧 스무 살이었던 척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의 손에 도움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반가워도, 낯선 다정함에 설레도, 배려에 고마움을 느껴도 어차피……

이번에도 바로 놓이지 않은 손을 바라보며, 클로에는 이 손이 황실 연회에 참석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저를 에스코트해 주던 오라비 에티엔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면 그 어떤 번민도 없을 텐데.

“공작님 오시려면 한참 남았을 텐데, 또 혼자 기다려야겠네.”

일부러 쌀쌀맞게 말하며 손을 내빼려니, 데메트리안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괜찮아. 너랑 함께 입장할 거니까.”

“뭐라고?”

말 그대로라는 듯, 데메트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전히 손은 놓지 않은 채로.

‘얘가 진짜……’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이 고티유 사교계에 유명한 단짝이라 해도, 연회에 함께 입장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정혼자가 있는 크레벨 소공작은 제 어머니가 아닌 그 어떤 여성과도 함께 입장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제가 더 잘 알 거였다.

클로에가 저의 첫 다과회에 와 달라 떼를 쓰고 데뷔탕트를 겸하는 리도테의 졸업 연회에 파트너가 되어 달라 했을 때, 그 망할 이성적인 소꿉친구가 어떻게 거절을 했던가.

‘미안, 파트너로 함께 참석하는 건 사람들 보기에 좀.’

결국 다과회에는 어머니 심부름 온 척을 하며 얼굴을 비추었고, 졸업 연회에는 따로 입장하여 첫 춤을 춰 주었지만. 결국 어떤 식으로라도 부탁을 들어줄 거면서 일단 마음을 상하게 하고 보는 재주가 있었다.

‘그게 데미 나름대로의 배려였으면서, 이제는 왜…….’

클로에가 정말로 스무 살이었다면 웬일인가 싶어 기껍기도 했겠지만, 그 속만은 스물다섯인 지금에 와선 그의 행동이며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장난이라도 정도가 있지.’

클로에의 얼굴에 미세한 분노가 어리는 걸 본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아차 싶어진 그가 농담이라 급히 덧붙이려던 찰나, 클로에는 이 악물고 그의 귓전에 나지막하게 말했다.

“캄포의 미래 사위께서는 조신히 집안사람들과만 계시지요.”

결국 그를 남겨두고서 먼저 부모님과 입장한 클로에는 뭔가 놀림 받은 것 같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아 약이 올랐다.

‘어차피 결국 멀어질 사이에 왜 이러는 거야, 정말.’

처음 몇 번의 만남을 애틋하게 만들던 그리움도, 만날 때마다 당황스러움으로 이어지니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떨떠름하게 굳던 그 낯은 또 뭐고.’

인사 오는 이들과 환담을 나누는 부모님의 옆에서 적당히 인사치레를 하면서도, 각자의 부모님과 다니는 친한 영애들과 멀리서 눈인사를 나누면서도, 클로에는 연회장 밖에서 있었던 황당한 일을 자꾸만 곱씹게 되었다.

신경질적으로 데메트리안이 있는 쪽을 쳐다보자니, 제 부모님을 모시고서 캄포 대공과 어울리고 있는 그가 시야에 들어왔다.

‘진짜 사람이 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야.’

5년을 거스른 저도 적당히 비슷하게 맞춰서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그럴 때마다 설마 싶은 마음이 들어 그를 재차 살피곤 했지만, 또 한편으로 크레벨 소공작의 임무를 수행 중인 그 모습은 제 기억 속의 반듯하기 그지없는 스물셋의 데메트리안 그대로였다.

‘공작 각하랑 캄포 대공 사이에서 어색하게 굳어 있는 걸 보면 또 그대로인 것도 같고.’

제게만 달라진 양 구는 것인지, 혹여나 진짜 스무 살이던 시절 제가 놓쳤던 미묘한 기색이 있었던 건 아닐지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글쎄, 딱히 짚이는 것은 없었다. 로이와 데미의 사이는 언제나, 변함이 없었으니까.

클로에의 한숨이 깊어질 때쯤이었다.

“제국의 태양, 에드워드 3세 황제 폐하와 마거리트 황후 폐하 드십니다! 그리고 프레더릭 1황자 전하, 대니얼 2황자 전하, 제러미 3황자 전하 드십니다!”

황실 가족들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외침과 함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축일 예식 이후 성국으로 가 사흘간 일정을 마치고 온 황제는 대축일 때보다 훨씬 화려한 차림새였다.

“황제 폐하 만세!”

“아르투젠 황실 만세!”

연회장을 가득 메운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행진해 들어오는 황실 가족들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그 중간에서 캄포 대공이 합류하여, 황제와 손을 맞잡고 연회장 끝의 단상 위로 올라갔다.

황제는 시종에게서 건네받은 와인 잔을 캄포 대공과 나눠 가진 뒤 청중들을 향해 들어 올리며 외쳤다.

“올해도 주신께선 풍요를 약속하셨네.”

“대지의 광영을!”

“약속의 캄포에 영광을!”

“아르투젠의 번영을!”

“축복받은 시간을 즐기게나, 모두들.”

황제의 건배사에 맞춰, 황실 양조장의 스파클링 와인 수백 잔이 허공에서 찰랑였다.

대축일 예식 이후 성소에서 금식기도하며 그해의 축복과 계시를 받는 것까지가, 에르드의 축복을 받은 황실의 의무였다.

그 계시가 어찌 내려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클로에가 기억하는 한은 늘 풍요를 약속받았었다. 제국이 워낙에 넓기에 어느 곳은 가물어도 다른 곳이 풍요로웠으니 그 계시는 늘 맞는 편이었다.

‘그런 걸 풍요라고 생각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핫, 그리 생각하던 클로에는 화들짝 놀랐다.

‘이렇게 불경하게 생각하면 안 되지.’

아무리 성물 때문에 갑작스레 운명이 뒤바뀌었었다지만.

클로에는 생각을 털어내듯이 제 잔에 든 것을 마셔서 비웠다. 지난주 숙취를 안겼던 그 로제 스파클링 와인에 비하면 드라이한 편이어서 덜 홀짝거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는 사이 대축연의 첫 춤이 시작되었다. 황제 부부가 홀의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하자, 그 옆으로 세 황자들도 각자의 파트너와 들어와 춤을 추었다.

황실 인원들의 춤을 숨죽인 듯 바라보던 귀족들은, 어느새 정치 지각 변동의 핵심에 있는 황자들을 두고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올해엔 1황자 전하가 책봉을 받으실까?”

“벌써 성인이 되신 지 일곱 해가 다 돼 가는데.”

“폐하께서 아무래도 더 신중히 하시려는 것 아니겠어?”

“황태자 책봉이 이렇게까지 늦었던 때가 있었나?”

이미 성년을 맞고도 한참이 지났던 1황자는 클로에가 아르투젠을 떠날 때까지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했었다. 클로에의 정략혼이 치러진 후에야 성배를 둘러싼 협상이 완료되어 그 공으로 황태자 책봉을 받았으니까. 그러니 올해도 언감생심.

일반적으로 황태자가 성인식과 함께 책봉되는 전통을 생각하면 상당히 늦은 일이었다.

프레더릭을 알게 되고서부터 단 한순간도 그가 마음속에서 황태자가 아닌 적은 없었는데,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 되도록 진짜 황태자가 되지 못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프레더릭조차.

그래서였을까, 다음 대 황후가 되기 위해 아르투젠의 궁정에서 지내는 중인 말레카의 왕녀와 춤을 추는 프레더릭의 미소가 썩 개운해 보이지 않았다.

“그게 사실일까? 2황자 전하를 염두에 두시는 거라고.”

“본인도 차남이셨으니까?”

“설마…… 애초에 2황자 전하는 황위에 욕심도 없으실걸.”

“그래, 그럴 거면 뭐하러 제3기사단에 들어가셨겠어? 그것도 부단장으로.”

그의 책봉이 자꾸만 미뤄지다 보니 귀족들의 헛된 망상은 연년생의 손아랫동생 대니얼에게로 뻗어 나갔다. 진즉에 후계 구도에서 밀려났어야 하는 것인데, 황태자 책봉이 늦어질수록 대니얼을 지지하는 귀족들만 애꿎게 늘어나는 것이었다. 정작 그는 그런 기대가 부담스러워 한직에 머무르는 중인데.

“말레카의 왕녀가 고티유에 온 지 벌써 몇 년이 되지 않았나.”

“그러게. 1황자 전하하고 혼인하실 줄 알고 오셨는데 2황자 전하와 혼인하시면 어째?”

“공이라도 확실히 세우시면 확실히 책봉받으실 텐데 제국에 분란이 없으니.”

“분란을 만들 수도 없고 말야. 지금 하시는 내무부 일이야 잘해야 본전인데.”

“예끼, 이 사람, 말이라고.”

황실의 사정에 대해 떠들어대는 귀족들의 이런저런 말소리를 들으며, 클로에는 저만 아는 미래를 떠올렸다. 보통 황실의 관례에 따르면 이미 제 비로 맞아들였어야 할 말레카의 왕녀와 어색한 듯 춤을 추고 있는 저 황자님의 미래를.

성배를 둘러싼 스칸다르와의 협상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고 그 공을 인정받아 그제야 황태자로 책봉될, 1황자 프레더릭의 미래를.

“첫 춤은 청해도 되지?”

클로에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황자들을 관찰하는 사이, 어느새 데메트리안이 제 앞에 와 있었다.

“집안사람하고는 출 수가 없어서.”

그가 고개를 까닥이는 쪽에는 크레벨 공작 부부가 손을 맞잡고 있었다. 황제 부부의 춤이 끝나면 홀로 나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하고 있는 검푸른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청초한 미인의 모습. 데메트리안의 아우 루이폴트는 제 형과 달리 학식 쪽으로만 머리가 발달한 신동인 덕에, 황실 연회에 참석한 귀족이면 으레 져야 할 춤의 의무를 지기가 볼썽사나워 한 걸음 물러나 있는 모양새였다. 그렇다고 데메트리안이 루이폴트와 춤을 출 건 아니었지만.

그런 이유로, 클로에가 사교계에 데뷔한 이래로 데메트리안의 첫 춤을 독점해 온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원래도 오늘 데미하고 첫 춤을 췄었지.’

면박을 준 게 조금 전인데 잊기라도 한 양 답지 않은 능청을 떨고 있는 그의 잘난 얼굴을 보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왠지 내민 그 손이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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