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여전한 것과 여전하지 않은 것 (3)
클로에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제단에 있던 성배를 신전의 보물고로 가져가려고 챙기는 신관의 모습이었다. 그가 등장할 때엔 성배에 집중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그의 얼굴이 낯익었던 것이다.
‘내게 낯익은 신관이 있을 리가 없는데.’
클로에로 말할 것 같으면 그다지 신실한 편이 아니어서 신전을 자주 찾지 않았던 것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거리가 있었기에 자세히 뜯어보진 못했지만 정말 낯익었다. 입매라든가, 콧대라든가, 한 쪽에만 있는 보조개라든가…… 하지만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기억력이 누구보다 비상한 것이 자랑인 클로에인데도.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는 분위기니, 조금 앞쪽으로 가서 자세히 보면……’
클로에가 까치발을 하고서 고개를 이렇게 저렇게 빼 보던 때였다. 갑작스레 한 귀부인의 밝은 낯이 시야에 끼어들었다.
“클로에! 오랜만이구나.”
“어머 부인, 오랜만에 뵈어요.”
클로에가 바로 일어나 치마를 슬쩍 잡고 약식으로 인사했다. 바로 앞줄에 앉아 있던 크레벨 공작부인이었다.
귀족들 중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도착한 크레벨 공작가가 입장하고 얼마 안 있어 황실 일원이 당도했기에, 이제야 나누는 인사였다.
“네가 요즘엔 저택으로 놀러오지 않으니 통 보기가 어렵잖니. 데미랑 밖에서만 만나지 말고 공작저로도 놀러 오렴.”
“데미랑 가면 무슨 재미겠어요? 정원 구경을 하면서도 원예업자들 유통 구조에 대해 떠들 걸요. 이제 봄도 왔으니 부디 정원에서 다과회를 열어 주세요.”
데미는 빼고 뵈러 갈게요, 농담 삼아 덧붙이는 말에 크레벨 공작부인의 하늘색 눈동자가 따뜻하게 빛났다.
‘그때도 딱 이렇게 말하니 부인께서 재밌어 하셨었지.’
클로에도 그에 화답하듯 마주 웃어 보였다.
어려서부터 서로의 집을 제집 드나들듯 해 온 덕에 클로에는 크레벨 공작부인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아들만 둔 크레벨 공작부인 역시 클로에를 아꼈고.
제 엄마 앞에선 늘 어린애이듯, 소꿉친구 엄마 앞에서도 그러한 법이었다. 오늘 마주친 다른 부인들에게는 깍듯이 예를 다했으면서도 개중 가장 신분이 높은 크레벨 공작부인에게 편하게 말을 붙이고 있는 제 모습에, 클로에는 다시 한번 ‘돌아왔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안 그래도 이제 슬슬 봄꽃들이 피고 있어서 누구 보여 줄 정도가 되어 가고 있단다. 정원사들을 닦달해야겠네, 우리 클로에랑 티타임 가지려면. 아, 이번에 오리포네산 찻잎 귀한 걸 선물로 받았는데.”
공작부인이 다정스레 클로에의 손을 감싸오며 말을 이었다.
크레벨 공작부인은 귀부인이라면 응당 관심을 가져야 할 다양한 취미에 조예가 깊었다. 덕분에 정원을 가꾸는 일이건 차나 꽃을 즐기는 일이건 자수를 놓는 일이건, 클로에의 취향은 모두 공작저에서 길러진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크레벨 공작부인도 그래서 클로에를 아꼈다. 클로에를 앞에 두고 최근 관심사들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면, 그녀의 말은 늘 이렇게 끝나곤 했다.
“아휴, 우리 집 영식들께서는 다들 무뚝뚝해서 말이지.”
나중에 제 부인들한테도 저렇게 뻣뻣하게 굴면 어쩌나 몰라. 크레벨 공자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온화한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어미의 눈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글쎄요. 5년 지나도 아무도 혼인한단 소린 없더라고요.’
정혼자 있으신 큰 아드님도 마찬가지랍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 클로에의 시선이 데메트리안의 낯을 슬쩍 살폈다.
제 어머니가 아들 키우는 재미 운운하며 저들을 핀잔줄 때면, 공작가 후계자로서의 책무만 알고 자라 온 데메트리안의 얼굴에는 제 소관이 아닌 일로 힐난받는 게 못마땅한 기색이 깃들곤 하던 것인데……
‘웃어……?’
공작부인 옆에서 그러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슬며시 따뜻한 기색을 띄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통 이럴 때면 안 그래도 무표정한 낯을 최선을 다해 더 무표정하게 만들곤 했는데, 지금의 그 낯에선 어떠한 감정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너무 미미해서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클로에가 갸웃거리며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찰나.
“아이고, 우리 사위님 아니신가?”
갑작스레 날아온 목소리에 데메트리안의 낯은 여느 때와 같은 무미건조한 것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스러움이 한껏 내려앉아 있던 예배당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사교계 연회장으로 만드는 넉살 좋은 목소리.
어느새 예복을 갈아입은 황제, 아니 그의 쌍둥이 형인 캄포 대공이었다.
“제국의 보좌를 뵙습니다.”
“대공 각하, 오랜만이에요.”
“데메트리안, 볼 때마다 멋있어지는구나.”
“과찬이십니다.”
이란성이긴 했지만 자라는 동안 우애가 돈독했던 덕분인지, 황제와 캄포 대공은 상당히 비슷한 외양을 보이고 있었다.
“제국의 보좌를 뵙습니다.”
“그래, 라크루아 영애도 오랜만이야. 사교계에서 인기가 좋다고 캄포 촌구석에까지 소문이 다 났어.”
“황송합니다, 각하.”
클로에가 제 사윗감과 그리 친밀한데도 캄포 대공은 조금의 못마땅한 기색도 없이 늘 입가에 사람 좋은 미소를 걸었다. 클로에는 언젠가 가까이서 봤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며, 두 분이 참 닮았으면서도 다른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폐하께서 사석에서도 위엄을 잊지 않는 전형적인 군주라면, 대공 각하는 소탈한 인상으로 상대를 방심하게 만드는 모사가랄까.’
캄포 대공 윌리엄은 엄밀히 말해 선황의 적장자였다. 몇 분이나마 에드워드 3세보다 먼저 태어났으니까.
하지만 성정이 온순하고 권력에 큰 뜻이 없었던 그는 소년 시절에 황태자 자리를 고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저보다 욕심 많은 동생이 권력의 정점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들을 가르친 스승들의 눈에도 에드워드가 모자람이 없었고, 일견 윌리엄의 생각도 일리가 있었기에 아무런 갈등도 없이 그의 뜻대로 되었다.
쐐기를 박기 위해 그는 아예 성인식도 전에 캄포로 내려가 버렸다. 캄포와의 통합으로 성배를 가져온 것이 제국의 정당성에 있어 핵심인 만큼 대대로 황제가 가장 믿음직한 형제에게 내리는 작위가 캄포 대공위였던 것이다. 근 몇 대 동안 황손이 귀하여 오래간 주인 없이 방치되었던 캄포를 한시라도 빨리 돌보겠다는 명목이었는데, 이로써 적장자에게 후계가 돌아가지 않아 아쉬워하던 일부 보수주의자들의 불평마저 종식해 버렸다.
이런 파격에 힘입어 안 그래도 우애 좋았던 쌍둥이 형제의 우애가 어찌나 애틋해졌는지, 곧 등극한 젊은 황제는 캄포 대공가와 크레벨 공작가라는 두 명문가 간의 혼약을 당사자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홀랑 승인해줘 버렸다.
결국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크레벨의 공녀가 사교계에서 입을 모아 칭송하는 황후감이기라도 했으면 그 욕심꾸러기가 배 아파서 어쩌려고 그랬는지 말이다.
“데메트리안, 언제 한번 캄포에 놀러 오지 그러느냐? 루시엔도 이제 많이 자랐는데.”
“대공녀는 이번 대축일도 놓치셨군요?”
“예, 저를 닮아 좀 허약한 구석이 있죠. 미래의 사돈댁에 벌써 걱정거리를 안겨드리는 건 아닐까 싶은데……”
익살스레 목소리를 낮추는 모습에 공작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었다. 그러는 양이 남편의 친우와 친우의 아내, 딱 그만큼 친밀해 보였다.
‘말은 그래도 언제나처럼 그냥 안 온 거겠지.’
데메트리안의 정혼자인 루시엔 캄포는 사교계에서도 비밀에 싸인 영애님이었다. 슬하에 황녀가 없는 황제의 여조카라 황녀에 준하는 신분인데도 좀체 고티유로 발걸음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고티유의 친절한 지인들이 데메크리안과 클로에의 친교를 좋은 마음으로만 봐 주었을 터였다.
오히려 외가에는 꼬박꼬박 방문하는지, 캄포의 공녀가 궁금하다면 오리포네 사교계로 가라는 말도 있었다. 오리포네의 왕녀였던 캄포 대공비가 해마다 제 부모를 만나러 가 한참을 지내다 오곤 했던 것이다.
‘친가에서도, 외가에서도 공주님이시고.’
그저 별궁에 기거할 뿐 실권도 세력도 없었던 제 왕실 생활을 떠올리며, 클로에는 슬쩍 데메트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상하게도 어려서부터 ‘우리 사위’ 하며 친근하게 굴어오는 캄포 대공을 어려워했다. 그를 마주치는 낯에는 늘 긴장한 기색이 어려 있어서 클로에는 그것을 놀리곤 했는데……
무엇을 생각하는지, 화기애애한 제 어머니와 예비 장인어른을 보는 그의 눈빛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 * *
‘황궁에 출근했다가’를 가장한 데메트리안의 기행은 며칠 뒤 대축연 날에도 이어졌다.
민간에서의 대축일 주간은 끝났지만, 성국에서 귀환한 황제가 참석하는 대축연이 귀족 사회에서는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이런 때가 아니면 도통 제도에 올라오지 않는 지방의 대귀족들도 참석하니 그들과 교류하려는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덩달아 대부분의 가문이 발 도장을 찍었다.
라크루아의 마차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느지막이 황궁에 다다랐다. 마차가 한 대뿐인 것만이 평소와 달랐을 뿐.
누아제트 모녀는 황궁 연회에 관심이 없었고 아쉴은 어려서 불참, 에티엔은 경시청에서의 격무로 인해 좀 늦게 도착할 거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을 위해 대축일부터 오늘까지 사흘째 황궁 연회장과 정원 일부를 개방해 둔 탓에, 황궁 근위대에 별의별 사건들이 다 접수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미쳐 날뛰는 대축일 주간에 경시청만 바빴다.
그런 연유로 부모님과 저 혼자서만 탄 라크루아의 마차가 황궁 앞에 다다랐을 때, 클로에는 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데메트리안을 발견하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얘도 대축일 주간이라 미쳤나…….’
그가 매번 저를 에스코트하러 늘 마차 앞에까지 마중 나왔대도 그건 개인적으로 방문했을 때의 일이지, 공식적인 행사에서까지 이러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아무리 사교계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하지 않는대도, 어쨌든 데미가 캄포와 맹세로 엮여 있는데…….’
클로에는 황궁 정문에서부터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을 가득 메운 사교계의 일원들을 슬쩍 살폈다.
“요즘 자주 보는구나, 데메트리안.”
“평소에도 자주 뵈었어야 했는데요. 언제 행정청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실무에 임하다 보니 백작님께 배우고픈 점도 많이 생겼고요.”
“원로원에 들어가더니 듣기 좋은 말을 하게 된 게냐? 허허허.”
살갑게 붙여 오는 말에 궁정백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공작께서는 함께 안 오시고?”
“어머니를 모시러 잠시 귀택하셨어요.”
‘너는 왜 안 따라가고?’
그리 따져 묻고 싶은 말이 클로에의 목 끝까지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