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여전한 것과 여전하지 않은 것 (2)
“금지옥엽을 먼 곳으로 보내게 된 건 내 미안하게 생각하네.”
“제국을 위해서이니 제게나 제 여식에게나 영광인 것을요.”
금칠을 해 주는 황제의 말을 함께 들으며 웃고 있던 제 아버지의 얼굴에, 미약한 고통이 흐르고 있었던 것.
클로에는 제 아버지가 이를 영광이라 생각하며 기꺼이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을 알았다.
장본인인 클로에 앞에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 기색으로나 집안의 분위기로나 그가 사랑하는 딸을 스칸다르로 보내게 된 사실에 괴로워했다는 것이 자명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머나먼 북방의, 제국 연방에서 곧 독립할 폐쇄적인 소국.
라크루아와 같은 고위 귀족의 혼사에는 황실의 승인이 있어야 했고, 이는 반대로 황제가 추진하는 혼사를 고위 귀족들이 감히 거부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들은 잃을 게 많았으니까.
여느 화목한 귀족 가문과 다르지 않았던 라크루아의 부녀 관계에는 그때쯤부터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여름휴가로 부모님이 오셨을 때에도 그 어색함은 가시지 못했다.
‘백작 부부께서 다녀가실 때마다 부인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지니, 제가 그분들을 볼 낯이 없군요.’
그래서인지 제 부모님과 부군은 클로에가 스칸다르의 귀비가 된 지 3년이 지나도록 가까워지지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황제에게 딱히 억하심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종 결정권자야 황제였지만 클로에가 선정된 것에는 원로원의 의견이 섞여 있었고, 고티유를 떠난 건 슬펐지만 스칸다르 별궁 생활이 불행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클로에 스스로도 제가 선택된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라 생각했었고.
다만……
클로에는 제가 자리한 장의자의 통로 쪽에 서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내후년이 되어 다시 그때를 맞는다면 담담히 받아들이리라. 제가 행복하다고 백 번을 말해도 못 믿을 아버지의 죄책감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면.
“제국의 대지에 광영 깃들라.”
“제국의 대지에 광영을.”
클로에가 그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대축일 예식을 시작하는 황제의 선창이 울려 퍼졌다.
먼 지방에 사는 귀족들은 힘들어도 제도 권역에 사는 귀족들은 말귀 알아들을 나이만 되면 모두 출동하는 행사였기에, 남녀노소 수백 명에 달하는 인원이 황제를 따라 후창하는 예배당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어느새 제단 양옆으로 들어찬 성가대의 찬가로, 제국력 913년의 대축일 예식이 시작되었다.
“지난해에 내리신 풍요와, 그로 인해 이 대륙의 춥고 어두운 날들을 어려움 없이 지나 다시 봄을 맞이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리나이다.”
예식은 클로에가 기억하는 대로 진행되었다.
단 하나, 황제가 낭독하는 기도문만이 조금 달랐을 뿐.
‘잔학한 폭도들의 무지를 연민하는 바, 그들의 불의에 희생당한 이들을 약속된 풍요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원래는 바로 전날 일어났을 스칸다르 분리 독립파의 테러를 무지렁이 불신자들의 반항으로 규정하며 주신의 자비를 구하는 내용으로 점철된 기도문이었던 것이다.
대축일 주간이 특별한 사고 없이 끝나 가는 지금에는, 태평성대의 영광을 주신께 돌리고 황실과 제국의 번영 및 올해의 풍요 같은 것들을 다양한 유의어들과 미사여구로 비는 기도문이 예배당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가 뭘 해내긴 했구나.’
이런 사소한 차이에서 클로에의 마음에는 어리둥절하나마 기쁜 감정이 살포시 샘솟았다. 제가 기억하는 미래를, 조금이나마 나은 방향으로 바꾸었으니까. 제가 이에 기여한 것을 저 말고는, 아니 그날 함께했던 몇을 빼고는 아무도 몰랐지만.
황제의 기도에 이어 대신관의 축도, 그리고 성가대의 합창이 모두 끝나고서 제단 앞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이를 기다리는 귀족들도 기대감을 담아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제 축복의 시간이네.”
“매해 보는 거지만 가슴이 떨리는군.”
“아가, 잘 봐 두렴. 우리가 주신의 가호를 받는 제국민이라는 증거를 이제 볼 수 있단다.”
대축일 예식의 백미인 ‘축복의 시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예배당 전면의 사도상이 쥐고 있는 사도의 홀, 대신전 보물고에 소장 중인 캄포의 성배, 황실에서 보관하고 있는 황제의 보관寶冠. 아르투젠의 국보인 세 성물들이 대신관의 신성력으로 공명하면, 하늘에서 광휘가 쏟아져 제도 전체를 휘감는다.
주신의 축복이 모두의 눈앞에 빛으로서 현현하는 성스럽고 신비로운 시간.
에르드의 이름으로 대륙을 제패한 제국의 정통성을 과시하는 행사였다. 동시에 에르드교의 교리가 대지에 그 근본을 두고 있는 만큼 올 한 해 제국의 풍요를 약속하는 신의 메시지를 받는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 순간을 위해 엉덩이 무거운 귀족들이 이 예배당에 바글바글 모여들었다. 평생에 한 번이라도 보겠다고 먼 지방에서 올라오는 자들도 있을 정도로.
아르투젠이 천 년이 다 되도록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는 데에는 매해 깃드는 이 성스러운 축복이 큰 영향을 끼쳤다. 어쨌든 신의 메시지였고, 어쨌든 매해 풍요로웠으니까. 어떤 회의론자들은 1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응답하시니 참 부지런도 하시다고 빈정대기도 했지만.
예배당을 가득 메운 오르간 소리가 홀에 자리한 이들의 귀와 가슴을 웅장하게 울리기 시작하면, 축복의 시간의 주인공들이 나타난다.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이 비단 필로우에 보관을 받쳐 들고 앞으로 나올 때에 제단 뒤편에서는 신관 하나가 은쟁반에 성배를 받쳐 들고 나왔다.
그리고 클로에는 그 성배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저게 일 년 안에 도둑맞는다는 거지.’
아르투젠의 국보인 세 개의 성물 중 하나인 캄포의 성배. 아르투젠이 잃어버리고 스칸다르가 찾으면서, 클로에의 운명이 제가 아는 대로 흘러가기 시작할 바로 그 성배였다. 이때의 제가 생각도 못했던 방향으로.
‘황실에 성배를 되찾아 준 라크루아의 충심을 내 절대 잊지 않겠네.’
그때 클로에가 스칸다르로 가게 된 데에는 클로에의 의사도, 아버지 궁정백의 의사도 반영되지 않았지만 황제는 그렇게 꾸며 말했다.
성배는 제국 아르투젠의 정당성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었다. 아르투젠이 칭제하고 주신의 이름으로 정복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에는 캄포와의 결합이 결정적이었으니까.
캄포는 에르드의 축복을 받은 땅이었다. 실제로 성국이 캄포령 내에 위치해 있을 만큼. 두 나라의 통합을 다지기 위해 정복 군주 프란츠와 그의 황후이자 캄포의 마지막 왕이었던 앙헬라타가 치른 대가는 수많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축복의 상징인 캄포의 성배를 지참금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이로써 두 왕가의 결합은 에르드의 이름 아래 치러진 것이 되었고, 이를 흡족히 여긴 에르드가 제국에 수천 년의 광영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서 두 왕의 혼인식에서 칭제할 때에 프란츠가 쓴 보관에 축복의 광휘가 깃들었고, 이것이 대축일 예식의 기원이었다.
‘성배는 통합을, 보관은 황권을, 홀은 이 모두에 대한 주신의 관장을 상징하지. 이 국보들 중 어느 하나라도 잃게 되면 제국은 그 구심점을 잃을 거네.’
그래서 귀족들을 위한 교양 아카데미 리도테의 필수 과목 ‘제국의 역사’에서는 성물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아마 하나라도 잃으면 황실은 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되찾아야 할 거야.’
실제로 클로에가 아는 어떤 미래에서 아르투젠은 ‘그 어떤 대가’로 독립의 승인과 명문가 출신의 공비를 내주었다. 캄포의 성배가 제국의 정당성의 핵심인 만큼, 그 정도면 싸게 먹혔다고 말하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다만 세 성물 중 가장 중요하다는 수식이 무색하게도, 내년의 대축일 예식 때까지 대신전에 보관되었던 성배가 도난당한 것을 아무도 모를 예정이었다.
‘그때 아주 난장판이었지.’
축복의 시간에 대신관이 신성력을 아무리 불어넣어도 성물들이 공명하지도, 사도의 홀에 빛무리가 맺히지도 않은 것이다. 놀란 신관들이 신성력으로 신전 바깥의 제국민들에게는 그럴싸한 것을 간신히 보여 주기는 했지만, 그날 대신전 안에 있었던 귀족들은 모두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은밀하나마 확실하게 제국이 뒤집어졌고, 이듬해 스칸다르 왕실에서 성배로 추정되는 것을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다. 당연히 스칸다르에 의심의 화살이 날아갔지만, 아무개 영주가 도적들을 소탕하면서 발견한 것을 어디 경매장에 넘겼고, 그걸 다른 아무개가 낙찰받은 뒤 또 다른 누구에게 진상하고…… 그 구구절절한 이력은 충분한 알리바이가 되어 주었다.
1황자 프레더릭이 사절로 가서 성배의 진위 여부를 확인한 뒤 협상을 타결함으로써 그 공을 인정받아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후계 구도가 확정된 제국은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클로에는 제 가족과, 제 고향과, 그리운 이 모두를 떠나게 되었다.
“어머니, 언제 봐도 너무 황홀해요.”
옆에서 들려오는 아쉴의 속삭임에 클로에는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이라.
셰비크 별궁의 주인으로 지내던 스물다섯의 날들과 지금 다시 겪는 스물의 날들 중 어느 쪽이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고조된 찬양 소리 가운데 대신관의 신성력이 성물들을 공명시켜서, 사도 아망이 쥔 홀 끝에 빛이 어른어른 피어나고 있었다. 그 빛이 홀을 가득 메우고서 천장의 공동으로 빠져나가면, 하늘로부터 주신의 광채가 쏟아져 고티유 전역을 비출 것이다.
프란츠 광장에서 프란츠와 앙헬레타의 결혼식을 소재로 한 연극을 보고 있던 평민들도, 라크루아의 타운하우스에서 여느 때처럼 일하고 있는 사용인들도, 제 가게에서 부서진 벽을 고치기 위해 업자와 상의하고 있던 마르코도, 교외에서 밭을 갈고 있던 촌부도 이를 보며 생각하겠지.
‘올해에도 제국을 풍요롭게 하소서.’
이를 상상하던 클로에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시간을 지키기 위해 나는 또 떠나야 하겠구나.’
“제국의 대지에 광영 깃들라.”
“제국의 대지에 광영을.”
10분여 동안 지속된 축복의 시간이 끝나면서 대축일 예식이 종료되었다. 이제 황제가 대신전 지하의 포털을 타고 성국으로 넘어가서 사흘 동안 대축일의 마지막 의식들을 치르게 될 것이다. 지방에서 대축일만을 위해 올라온 귀족들이 많으니 오늘부터 황제의 귀환에 맞춰 열릴 대축연 날까지 황궁에선 크고 작은 연회가 이어질 거였고.
‘대축연 때 입으려고 맞춘 드레스는 이거보다 더 과감한 유행 스타일로 맞췄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지하로 내려가는 황제 부부와 제단을 정리하는 사제들을 구경하던 클로에는, 제 시선에 걸린 광경에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저 신관…… 어디서 봤더라?’
성배를 은쟁반에 다시 담아 돌아가려는 신관의 얼굴이 낯익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