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여전한 것과 여전하지 않은 것 (1)
대축일 주간의 마지막 날인 주일, 즉 대축일.
초대 황제 프란츠가 캄포의 마지막 왕인 앙헬라타와 결혼함으로써 두 왕국을 통합하고 칭제한 건국 기념일이기도 했다. 두 왕가의 결합은 주신 에르드의 축복을 받았고, 칭제 후 시작된 아르투젠의 정복 전쟁은 연전연승이었다.
십여 년의 전쟁 끝에 대륙 대부분의 국가가 아르투젠에 흡수되거나 제후국을 자처하게 되었을 때, 정복 군주 프란츠는 이 모든 영광을 에르드에게 돌렸다. 성국은 이에 화답하여 강력한 지지를 보냈고, 이로써 제국 아르투젠은 강력한 종교를 바탕으로 ‘제국 연방’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제국 연방은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어우러질 수 있었다. 물론 스칸다르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저런 연유로 대축일은 아르투젠에서 가장 크고 성대하게 기념하는 국경일이었다.
제도의 시민들은 오늘도 초대 황제의 이름을 딴 프란츠 광장으로 모여들어 초대 황제 부부의 결합과 신의 은총을 노래했고, 귀족들은 모두 제도 내의 대신전에 모여들어 대축일 예식에 참석했다.
라크루아의 식솔들 역시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점심을 먹고 대신전으로 향했다.
대신전 앞은 제 주인들을 싣고 온 마차들과, 이미 그들을 내려 보내고 떠나는 마차들, 그리고 거기서 내린 사람들로 한껏 북적이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 마부들의 말 모는 소리, 겨우내 만나지 못한 지인들과 안부를 나누며 떠드는 말소리들이 그 북적임을 한층 돋웠다.
제국에서뿐 아니라 성국에서도 큰 행사인지라 파견 나온 사제들의 무리도 군데군데 보였다.
“아, 저기 아미스 백작가구먼. 로이, 네가 저 댁 영식과 데뷔탕트 때 춤을 추지 않았니?”
“아버지도요, 참. 별걸 다 기억하셔.”
“허허, 리도테의 졸업 연회에서 내 딸이 데뷔탕트를 치르기를 어찌나 고대했었다고. 내가 네 어미를 거기서 만났던걸.”
“그거 예순 번만 더 말하면 백 번일 거예요, 여보.”
“그렇소? 허허허.”
의전 서열이 높은 라크루아는 늦게 도착하는 것이 예의였기에, 어느 행사엘 가건 마차 안에서부터 제도 사교계의 군상들을 훑어볼 수 있었다. 그 덕에 클로에는 오래간 보지 못했던 지인들의 이 시절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와, 멜라니 오랜만이다. 저기는 세레니아네. 편지하겠다고 울더니 결국에는…….’
그렇게 점차 가까워지는 신전 입구의 인파를 살피다 보니 클로에는 왠지 모를 초조함에 손끝이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결국에는 아무도…….’
스칸다르로 떠나기 전까지 제 세상의 전부였던 제도 고티유의 사교계. 리도테 아카데미 시절부터 절친했던 영애들도 있었고, 사교계에서 친분을 다진 영식들도 많았다.
고티유의 총괄인 궁정백가의 영애는 사교계의 누구에게나 환대받았고, 누구나 클로에의 언행을 좋은 쪽으로 바라봐 주었다. 맹세로 엮인 정혼자가 있는 데메트리안과 제가 아무리 특별하게 굴지라도…….
연회장의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밤의 분위기를 북돋던 풍미 좋은 와인들, 친밀함과 호감을 가득 띄운 예의 바른 얼굴들, 장식 넘치는 영애들의 드레스 자락과 하녀와 하인들이 힘주어 단장했을 머리칼들…… 그리고 그들이 겹겹이어도 어디서든 알아볼 수 있었던 삐쭉 올라온 데메트리안의 얼굴.
제가 두고 간 것들이 다 여기에 있었다.
그리 생각하니 오랜만에 마주하는 정경에 설레면서도,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어차피 몇 년 뒤면 소식도 모를 사람들인 거지.’
꾸욱, 클로에의 손이 레이스가 겹겹으로 싸인 반대편 소맷자락을 그러쥐었다. 지금의 그녀의 눈에는 촌스러워 보이는, 이 시절 유행하는 양식의 소맷자락이었다.
5년 전을 다시 살아가게 된 지 나흘. 마침내 본격적으로 맞이한 제 어린 시절의 세계를 보며, 클로에의 낯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저는 2년 뒤면 이곳을 떠나게 되고, 그러고서 이곳의 누구와도 연락 한 번 힘들게 될 일이었다.
이때의 제가 스칸다르의 귀비가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막연히 고티유를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아예 제국 연방을 떠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으니까.
떠날 때만 해도 한두 해에 한 번쯤은 놀러올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글쎄, 이는 녹록지 못했고. 저야 수많은 사람과 헤어졌지만 그들은 저 하나와만 이별했으니 먼저 편지라도 줄까 기대했건만, 어디서도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데미마저도…….’
언젠가 곧 멀어질 거고, 그들도 저를 그리워하지 않을 세계. 그런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다 보니 어느새 마차가 대신전 정문 앞에 멈춰 섰다.
함께 마차를 탔던 아버지와 에티엔, 어머니가 먼저 내리는 것을 기다리던 클로에의 귓전에 예상치 못한 말소리가 내려앉았다.
“어머, 소공작님 아니니? 오랜만이네.”
“예, 부인. 찾아뵙지 못한 지 오래되었죠.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원로원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소식 들었다.”
클로에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열려 있는 마차 문 너머를 바라보니, 제 부모님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데메트리안이 거기에 있었다.
제 울적한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데미가 왜 벌써?’
라크루아의 의전 서열은 크레벨과 지방 대귀족, 그러니까 5공작 다음. 그러니 크레벨은 늘 라크루아보다 나중에 도착하는 것이었는데.
젊은 귀족들이야 일찍 와서 제 또래들과 친목을 다지기도 한다지만, 기다리는 것보다 기다려지는 편이 더 어울리는 게 소공작 아니던가.
“로이, 어서 와.”
그 데메트리안이, 마치 기다린 것처럼 라크루아의 마차 앞에 와 있는 것이었다. 여느 때처럼, 그리고 며칠 전의 그날 밤처럼 마차에서 내리는 저를 위해 손을 내밀고서.
‘데미 역시 2년 뒤면……’
언제나처럼 제게 내밀고 있는 커다란 손. 그 너머의 얼굴은 제가 기억하는 그 언제나처럼 묵묵한 낯이었고, 어딘가에 조금 다른 기색도 느껴졌지만…… 지금의 클로에로서는 언젠가 잃게 될 것만 생각하게 되어서는 뾰족한 말을 뱉게 되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급한 일이 있어서 아침에 입궁했다가 바로 왔어.”
조금 떨어져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파이겐이 벌레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본 사람은 라크루아 중엔 없었다.
“대축일에까지 입궁하다니, 원로원의 미래가 밝구먼.”
라크루아 궁정백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데메트리안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제게 인사해 오는 다른 귀족들을 향해 나아갔다.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못마땅함을 제대로 추스를 수 없었다.
이번에도 달랐다. 또 데메트리안만 달랐다.
의전 서열에 맞춰 한참 뒤에 올 데메트리안이 지금 와 있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혹시 분리 독립파를 체포해서일까? 원래는 그들을 쫓느라 바빴어야 했는데 손이 비어서? 하지만 원래 수사는 원로원의 몫이 아닌데…… 아, 심문을 했다더니 그것 때문에 입궁했다가 시간이 떴나?’
도대체 무슨 곡절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따져 물을 수 있는 바가 없어서, 클로에는 그의 낯을 한참 노려보다가 옛다 하는 심정으로 제 손을 척 내려놓았다.
“오느라 고생했어.”
그 손을 꼭 쥔 데메트리안은 빙긋 웃었다. 그의 입매가 그리 깊은 호선을 띤 적이 있었을까.
요 근래 그를 만날 때마다 샘솟는 황당함이 더 커졌다. 애초에 그가 이런 화사한 미소를 지을 위인도 아니거니와, 시내 타운하우스에서 마차 타고 온 저보다 교외의 저택에서 입궁했다가 온 그가 더 고생했을 것 아닌가.
‘뭐 이런 공치사를 다 하는 거람, 칭찬도 인색한 사람이.’
그런 마음을 담아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 낯을 바라보는데, 그는 시선을 피할 생각이란 애초에 없는 사람 같아 보였다.
따스하게도 웃는 데메트리안의 낯에, 클로에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다정하게 군대도 어차피……’
클로에가 마차에서 내려서고도 그 손은 며칠 전처럼 조금 더 오래 그 채로 있었다. 여느 때보다 꼭 쥐인, 여느 때보다 더 따뜻한 손. 서로의 장갑에 가려 느낄 순 없었지만, 어쩌면 오늘도 잔잔한 습기가 배어나 있겠지.
기실 그것이 유별나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크레벨 공작부인을 제외하고 그의 에스코트를 가장 많이 받았을 클로에로서는 거기에 어떠한 차이가 있음을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야의 제집 근처 한갓진 구석도 아니고, 아르투젠 귀족 사회의 이목이 다 몰려 있는 여기서.
‘게다가 캄포 대공가도 곧 올 자린데.’
클로에는 그를 조금 노려봐 주다가 뿌리친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괜히 모자를 고쳐 쓰는 척하며 손을 빼냈다.
“제국의 태양, 에드워드 3세 황제 폐하와 마거리트 황후 폐하 드십니다!”
고티유와 그 근교에 사는 귀족들은 물론이요, 제국 연방에 속한 모든 가문에서 한 명씩이라도 참석한 덕에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찬 대신전 예배당. 파견 나온 황궁 시종이 황제의 입장을 고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근처에 자리한 이들과 친교를 나누던 귀족들이 일시에 기립하였다.
파이프오르간 소리에 맞추어 예복으로 성장盛裝한 황제 부부가 귀족들의 묵례를 받으며 예배당 가운데 통로로 입장했다.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을 밟으며 권력자의 미소를 얼굴에 띤 채, 예배당을 가득 메운 귀족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는 40대 후반의 황제.
클로에 또한 제 가족들과 함께 세 번째 줄에 자리한 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황제 부부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눈동자를 슬며시 굴려 황제를 바라보자 공손히 앞으로 모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영애가 우리 아르투젠 구국의 영웅이지, 암.’
클로에는 황제의 미소를 보며 스칸다르에 공비로 가는 것이 결정되고서 그를 알현하러 갔을 때를 떠올렸다.
황자들과야 세대가 같으니 편하게 교류하며 자랐다지만, 신년 하례 때에나 인사를 나눈 게 전부인 황제와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적으로 마주한 때였다.
그 자리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온열 기능이 있는 마정석으로 장식된 은식기도, 황실의 주방이 혼신의 힘을 다한 격식 있는 만찬의 풍미도, 황실 만찬에 초대받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황실 양조장 레드와인의 풍미도, 황제에게 말끝마다 너털웃음을 접붙이는 버릇이 있다는 사실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