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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3화 (13/189)

13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12)

어려서부터 수도 없이 마주해 온 눈빛이었다. 클로에가 무언가 막무가내로 굴면 데메트리안은 늘 그런 눈빛을 보이곤 했다. 마음속의 그 안쪽까지 살피려는 것처럼.

어느 어린 날에 더 같이 놀고 싶어서 열이 오르는데도 아프지 않다고 떼를 썼을 때, 저 이외의 영애에게 애칭을 허락하지 말라고 강요했을 때, 지금 제 방에 있는 그의 정치학 교재를 빌리며 한 달 안에 읽어내겠다고 자신했을 때,

그리고 스칸다르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수년 만에 마주한 눈빛이었지만, 그래서 잊고 있었지만, 이를 마주한 순간 클로에는 한달음에 이 시절의 감정이 물밀듯 저를 덮쳐 오는 것을 느꼈다. 아침에 아네모네 꽃다발을 받았을 때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어느 정도는 특별했던 시절.

이미 지나간, 그런 줄로 알았던 그 시절.

‘그치만 또 지나갈 시절이겠지.’

클로에의 눈빛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아, 저택 조금 못 미쳐서 내려야 해요.”

몰래 나온 거라서요. 무거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창밖만 흘끔대던 미라벨이 끼어들듯 내뱉었다. 멀리 궁정백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역시 민망해하던 파이겐이 냉큼 마부석 쪽 쪽창을 열어 그 말을 전했다.

마차가 저택 담장 뒤편 적당한 곳에 멈춰 서자, 데메트리안이 먼저 훌쩍 내려 동승한 손님들을 위해 손을 내밀었다. 바깥쪽에 앉아 있던 미라벨이 건성으로 그 도움을 받아 훌쩍 내리고도, 클로에는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바로 맞잡지 못하고 낯설게 쳐다보았다.

낮에는 거절할 수 있었던 그와의 접촉.

크레벨 공작저로든 제국 아카데미로든 황궁으로든, 그를 만나러 갔을 때 마차 문이 열리면 그가 기다리고 있었던 순간들이 겹쳐졌다. 더구나 여느 사교계 연회에 갔다가 그가 바래다줄 때면, 꼭 이런 달빛 아래서 손을 내밀곤 했었으니까.

‘이 손을 다시 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클로에는 제게 내밀어진 데메트리안의 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손에는 아까 아지트에서 파이겐이 간단히 처치한 대로 붕대가 감겨 있었다. 절박하게 쇄도하던 그의 검격이 떠올랐다.

이 낯설음은 무얼까. 요즘 들어 뭔가 달라진 그의 행동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

‘설마……’

클로에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양에, 의아한 듯 데메트리안의 손이 잘게 까닥였다. 제 망설임이 길어진 것을 인지한 클로에는 털어내듯이 눈을 깊이 한번 끔벅였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한 발씩 내린다.

수도 없이 반복해 온 이 행동이 어딘가 쑥스럽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눈빛 너머에서 비치는 무엇 때문이 아닐 것이다. 혹은 붕대에 묶이지 않은 그의 살결에 잘게 배어난 습기 때문도…… 그저 오랜만이어서, 그래서일 것이다.

‘절대 설레서가 아니야. 데미를 보고 싶었던 건 맞지만…….’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그의 눈을 바라보며 클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맞잡고야 만 그 손은 왠지 모르게 뜨거웠다.

그러고도 한참동안 손은 처음 놓였던 그대로, 눈높이 즈음에서 데메트리안에게 쥐여 내려오지 못했다.

“……?”

클로에의 눈빛에 의아함이 깃들어갈 때에야 그 손을 놓은 데메트리안의 손이 클로에의 목께로 향했다.

“라크루아의 비싼 상품에 이게 뭐야.”

그제야 클로에는 제가 폭탄 자루를 진 사내에게 표창을 날렸을 때, 덩달아 놀란 마도구상의 칼날이 살갗에 조금 파고들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뒤늦게 따끔함이 올라왔다.

“아, 뭐…… 어디서 고양이가 긁었다고 하면 돼.”

그의 손이 닿지 못하도록, 클로에는 재빨리 제 손으로 상처를 어림해 보았다. 그 손길을 눈에 담으며 데메트리안은 제 로브 안쪽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제 얼굴은 옷자락으로 대충 문질러 냈던 탓에 손수건은 여전히 깨끗했다.

“칠칠맞게.”

그가 쥐여 주는 손수건을 받아 들면서, 클로에는 제 농담에 ‘그럼 나는 그거냐?’라며 덩달아 자조하던 데메트리안의 대꾸가 떠올랐다.

“……예약된 상품 주제에.”

이렇게 다정하게 굴면 안 되지. 클로에의 머릿속에 그와 캄포 대공녀의 약혼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던 그 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후련함을 기다리는 마음이었을까.

그래, 혹여 이것이 기나긴 꿈이어도, 또는 다시 같은 시간을 살아가게 된대도, 클로에는 결국 셰비크의 별궁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두근거림은 정말로 오랜만이어서일 것이다. 설렘 따위가 아니라.

그리 되새긴 클로에가 초록빛 눈동자를 진하게 빛내며 미소지었다.

영문도 모르고 데메트리안도 따라 웃었다. 어딘가 아픈 듯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 * *

“아가씨, 별일 없으셨죠?”

이튿날, 어김없이 천장의 베람이 햇살을 받는 걸 보며 깨어난 클로에의 눈앞에 또 다른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라크루아 자제들의 유모이자 미라벨의 어머니인 누아제트 남작부인이었다. 얼마간 휴가로 저택을 떠나 있었던 그녀는 어젯밤 늦게야 고티유에 다다랐다고 했다.

“으응, 유모. 보고 싶었어.”

폼폼 대신 세숫물을 받아 온 남작부인이 침대 머리맡에 다가와 앉자, 클로에는 반가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그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늘도 다시 스무 살인 것이 여전히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그리웠던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것만은 충분히 기꺼웠다.

“아침부터 유모 품이라니, 이게 꿈인지 생신지…….”

“아쉴 도련님은 이젠 데면데면하신데, 이리 반겨 주시는 건 아가씨밖에 없네요.”

남작부인이 별일이라는 듯 웃으며 클로에를 마주 안아 주었다.

“걔는 걔고……. 남작은 좀 괜찮아?”

“그이야 늘 똑같죠.”

누아제트 남작은 대대로 황실의 겨울 별장이 있는 라크루아의 영지를 대리로 다스려 온 누아제트 가문의 가주였다. 제 처와 딸이 황도에 올라와 있는데도, 원체 허약하셔서 산 좋고 물 좋은 궁정백령을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말이 유모지 이제 돌볼 젖먹이도 없는 남작부인이 대축일 주간과 같은 명절 즈음이면 궁정백령으로 내려가 지내다 오곤 했던 것이다.

“남작이 유모를 만난 것도, 라비가 유모를 빼닮은 것도 다 내 복이야.”

클로에는 어리광을 가장해 그간 담아 두었던 속마음을 던졌다. 누아제트 남작부인에게야 3주 만이겠지만, 제 마음으로야 3년 만에 만나는 그녀였으니까.

“이런 달콤한 말을 들을 거라면 더 자주 내려갔다 와야겠어요.”

누아제트 남작부인이 깊은 미소를 지으며 클로에의 말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곱을 떼어 주고 잠결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다가, 클로에의 목 근처에서 그 시선이 멈췄다.

‘아차.’

온화하던 눈가가 굳어지는 양에 어제 있었던 일들이 우후죽순으로 떠올랐다.

“이, 이거, 어제 밖에서 고양이를 만났지 뭐야.”

제 발 저린 클로에가 재빨리 설명했다. 남작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육포 쪼가리를 주려고 했는데 말야. 요즘 고양이들 대범하지? 하하하…….”

시선도 방황하고 목소리도 떨렸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남작부인의 시선이 상흔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처음 배어나왔던 피는 데메트리안의 손수건으로 잘 지혈해 두었는데, 자는 사이에 긁기라도 한 모양인지 다시 배어 나온 피가 굳어 있었다.

“라비가 제 몫을 못했나 보네요.”

“아니, 고양이가 갑자기……”

“아가씨.”

누아제트 남작부인의 밀빛 눈동자가 진하게 빛났다.

‘그래, 누구를 속이겠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유모라면 이미 이 상처가 칼날에 찔려서란 것도, 그 위치와 각도로 봐서 인질로 잡혔기 때문이라는 것도 다 눈치챘을 거였다.

“일이 좀 있었어. 데미를 돕다가……”

이번에는 데메트리안을 밀어 보았다. 양념 조금 쳐서.

라크루아에서 소궁정백인 에티엔만큼 신용도 높은 이름을 대라면 바로 크레벨 소공작이었으니까. 클로에는 저보다 믿음직한 그의 이름을 팔면 제 유모가 조금 누그러질 것을 알았다.

“잠깐 잡히긴 했는데…… 그런데 정말 바로 풀려났어. 진짜로. 내가 실력 발휘했거든.”

라비는 다른 쪽을 쫓아갔었어. 급히 덧붙여 미라벨을 두둔하면서도 클로에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어쨌든 미라벨이 자리를 비운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유모는 라비의 일에 있어서는 엄격했지, 참.’

클로에가 제 유모의 낯에서 누그러지는 기미가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의 낯을 살폈다. 그런 제 아가씨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남작부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가씨, 우리 라비를 감싸주시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하지만 그건 라비의 임무고, 실수가 있었다면 평가를 받아야 해요. 경호조에서 라비와 나가실 때 다른 이를 붙이지 않는 건 이제 라비가 한 사람 몫을 해서고,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면 그건 모두 경호조의 책임이니까요.”

“으응, 맞아…….”

이럴 때마다 클로에는, 저의 가장 가까운 친구와 어떻게든 주종 관계로 묶여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찌뿌둥했다.

‘라비가 징계를 받게 될 텐데…… 미안해서 어째.’

경호조에 알리지 않고 마실을 다녀온 것을 들킬 때마다 한소리 들었었는데, 하물며 호위 대상인 제가 위험에 처했었으니 말이다. 이럴 때에 미라벨이 클로에를 원망한 적은 없지만 마음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녀들은 친자매나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가씨의 신변에 어떤 일이 있었다면 되도록 저희가 다 알아야 해요. 비밀이라면 비밀이라고 말해 주시면 되고요. 부득이한 상황이면 백작님 부부께도 조언을 구하겠지만, 아가씨 판단을 우선으로 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제 다 끝난 일이야. 그 일당들은 지금 경시청 돌바닥에 있다구…….”

뻔히 아는 소리는 이제 됐다는 듯 툴툴대는 클로에의 말에, 누아제트 남작부인은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 아시죠?”

애정이 담겼고 납득이 가는 말이라도 잔소리는 잔소리인지라, 클로에는 한숨을 쉬며 벌러덩 누워버렸다.

‘어제 괜히 안 하던 일을 한다고 까불어서는, 라비한테만 미안해졌네.’

그렇다고 어제 제가 분리 독립파를 체포하는 데에 기여한 것까지 후회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제 제복남을 격퇴할 때부터 느꼈던 작은 고양감이 목구멍 근처에서 간질간질했다.

생각해 보면 귀비 전하로 지내는 동안 들을 일이 없었던 애정 어린 잔소리다. 궁인들의 잔소리엔 애정이 없었고, 부군이 애정을 담아 말하던 것은 잔소리가 아니라 통보였으니까.

‘스물다섯 살의 성숙함으로 유모를 만난 반가움만 생각해야지.’

그리 다짐하며 유모를 바라보던 클로에는 순간, 남작부인이 등지고 있는 햇빛 사이로 뭔가 불길한 걸 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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