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11)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네.’
저를 비싼 상품이라 일컫는 말. 이즈음의 클로에가 자주 너스레떨며 하던 말이었던 것이다.
제국 연방의 평화를 정략혼으로 유지하는 아르투젠에서 클로에와 같은 고위 귀족 가문의 영애들은 좋은 장기 말이었다. 또래들이 관료가 되겠다며 제국 아카데미에 가고, 또는 리도테의 학술원이나 신성 아카데미로 진학하고, 가업을 잇겠다며 후계자 수업을 받을 때에 그녀들은 사교계에서의 입지와 교양을 쌓았다. 어느 공작부인, 어디의 왕세자비나 왕비가 될지, 그들의 미래는 혼기가 찼을 때의 대륙 정세에 따라 달라질 것이었다.
‘실제로 꽤 비싸게 팔렸지.’
클로에가 스칸다르로 간 덕에 아르투젠의 국고는 천문학적인 손해를 덜었으니까.
자조적인 웃음이 났다. 젊은 왕의 귀애를 받고 셰비크의 생활이 풍족했던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원래’대로라면 부군의 밤 인사를 기다렸을 밤에, 서민 지구에서 왈패 짓을 하고 있다. 제가 있던 제국력 918년의 별궁은 지금 비어 있을까. 그렇다면 제 부군은 안녕히 주무실까.
하룻밤을 못 품어 애닳을 사랑은 아니었지만, 살며 든 정도 나름 하루에 한 번쯤은 그리움을 자아내게 하는 거였다.
……아니면 제가 기억하는 지난 5년간의 세월은 이제 없는 일일까.
답 모를 생각과 함께 방황하던 시선의 끝에, 경비대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온 데메트리안이 서 있었다. 음울하게 굳은 낯으로.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모를 그는, 잔뜩 가라앉은 눈으로 클로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농담은 말야.”
농담? 순식간에 상황을 헤아린 클로에는 생각에 닿은 것을 입에 올렸다.
“나 비싼 상품이라는 거?”
데메트리안은 더 이상 답이 없었다. 그저 뭔가 불만스러운 듯 표정을 굳히고 있을 뿐.
낯설었다. 이즈음에 자주 하던 농이라 데메트리안에게도 익숙했었고, 그의 반응이 보통은 이렇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스스로를 두고……
“근데 왜 이런 데에 온 거야?”
클로에의 생각을 끊어내듯, 데메트리안의 물음이 실내를 울렸다. 입안에서 몇 번을 되뇌다 꺼낸 말인지 그 억양은 다소 연극적이기까지 했다.
“라비랑 밤마실 나왔지. 낮에 여기 잡화상에서 산 걸 환불하고 싶기도 했고.”
클로에 역시 이럴 줄 알고 생각해 놓은 대답을 재빠르게 뱉어냈다. 미라벨에게 시선을 던지면서. 적당히 장단 맞춰, 응?
“네, 그렇죠, 그렇죠. 단도를 새로 샀는데 수평이 안 맞더라고요. 근데 그걸 방금 써 버렸네? 하하하, 환불 못하겠다. 제가 투창술의 천재여서 그걸로도 해냈네? 하하하하.”
“대축일 주간이라 일찍 닫는 줄 몰랐거든. 그러다 갑자기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서 놀랐는데 파이겐 경이 거기 있어서 또 얼마나 놀랐게?”
아무 말이나 내뱉을 때엔 상대방이 뭔가 낌새를 잡지 못하도록 우다다 내뱉는 게 최고였다. 데메트리안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늘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이 아무말투성이를 눈치챈 것 같았지만…… 그저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곤란함을 눈치 채고 캐묻지 않아주기를.
“네가…… 굳이 이 밤에 나온다고?”
너무 많은 걸 바랐나!
“사교계 모임 아니면 바람 쐴 일 없다는 네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나!
클로에는 당황한 기색을 최대한 감췄다.
한편으로는 이즈음의 제가 데메트리안을 사교계 연회에 끌어내기 위해 그런 말도 했던 것이 떠올라 씁쓸하기도 했다.
“그러는 너는? 현장 수사도 보좌관이 할 일이야? 이것도 아까 말한 제보랑 연관된 거야?”
최선의 대답은 질문이라. 클로에는 질문 세례를 그에게로 돌렸다. 순순히 답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들킬 순 없었으니까. 미라벨에게 둘러댄 대로 말을 꺼냈다간, 저 이성적이신 공자님의 퍼런 눈이 한심함으로 빛나리라.
“그건…….”
뭐라 말을 만들어 내려던 데메트리안의 입모양이 그대로 굳었다.
클로에는 싸움이 벌어졌을 때 누군가가 걷어차 구석에 처박혔었던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평민들 복식대로 차려입고서, 얼굴에는 아까 폭발로 인해 들러붙은 분진이 덕지덕지 묻은 채.
제가 늘 추억하던, 고급 의상실의 드레스를 입고 응접실 소파 저편에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이 그 위로 겹쳐졌다.
‘아까 장터거리에서도 그렇고…… 원래도 이렇게 밖으로 나다니곤 했던 걸까.’
제 본분이 아니었던 궁금증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데메트리안은 클로에의 얼굴에서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는 사이 클로에에게로 손을 뻗고 있었다. 그녀의 관자놀이를 따라 흐른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고, 천천히 엄지가 눈 밑에 가닿았다. 문지르듯 호선을 그려 천천히 눈 밑을 쓸어내리는 움직임에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의아함을 담아 반짝인다.
그래, 가면을 쓰고 있어도, 밤의 뒷골목에서 어떤 모험을 벌이고 있어도 이 눈빛만은 제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너, 너도 얼굴 지저분하거든?”
그가 문지른 곳을 따라 얼굴이 홧홧해지는 양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옆으로 빼었다. 눈치 좋게 미라벨이 로브 안쪽을 뒤져 손수건을 가져와 클로에의 얼굴을 살곰살곰 닦아내기 시작했다.
“큽.”
파이겐의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리고, 민망한 것인지 데메트리안이 괜히 제 목을 쓸 무렵이었다.
“……으으…….”
골목에서 미라벨에게 잡혔던 자가 정신이 들었는지 목을 울리는 소리에 작은 고요가 깨졌다.
“손날치기는 결박술만 못하신가 봅니다.”
“저자가 기절한 지 가장 오래됐다구요! 게다가 로이 혼자 뛰어드니 마음도 급했고……”
무거운 분위기가 불편했던 것인지 두 호위가 반사적으로 떠들어댔다. 그 너머로 경비대의 호송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내일 퍼레이드 행렬에 테러를 일으키는 게 목표였던 것 같네. 내부에 범행에 사용하려던 마정석 폭탄들이 남아 있어. 제도 검문을 피하려고 표준 크기 이하의 것들을 사용했으니 위력은 크지 않을 걸세.”
경비대의 소대장에게 데메트리안이 간략히 상황을 설명했다.
정확한 추측에 클로에는 순간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이 이 방에서 맞닥뜨린 상황들만으로도 그 실마리가 충분하긴 했다.
파이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본인들 몸만 빼내도 도망갈 수 있을지 불확실한 판이었죠.”
“하나는 거의 놓치셨잖아요?”
“저 자가 맨몸이었다면 영애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미라벨이 삐죽대며 뭐라 대꾸하려다 클로에의 손만 꼭 잡았다. 굳게 다물린 파이겐의 입가와 턱선이 완고한 기색을 풍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자는 제 몸통만 한 짐을 지고 3층 높이에서 착지하고도 재빠르게 달아났던 것이다. 위험했음을 누구보다 미라벨이 잘 알았다.
“장터에서 판 꽂이 꽃들에 마정석을 장착해서 반입했더군. 내일 행렬을 주시해야 할 것 같네.”
“아마 연쇄 작용을 일으키면 폭발력이 커지겠네요.”
“대인 테러가 목적이 아닐 수도 있어.”
“그리 보고하겠습니다.”
소대장의 지시에 따라 경비대원 일부는 분리 독립파가 머물렀던 방으로, 일부는 호송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두 분 영애들께서는……”
“야시장에 놀러 나온 중에 친우를 마주쳤네.”
재빠르게 내뱉으며 클로에가 그 낯에 뻔뻔한 기품을 띄웠다. 미라벨이 닦아주었대도 얼굴이 여전히 깔끔치는 못했고, 로브 또한 나름대로 털었대도 어디에 구르다 온 것처럼 더러웠으며 그 밑으로는 서민 풍으로 차려 입었는데도 말이다. 치맛자락을 찢어먹은 미라벨은 애초에 문가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내가 모셔다 드릴 테니 걱정 말게. 한 시간쯤 이따가 경시청에서 보지.”
얼버무리기로는 소공작의 권력형 입막음이 한 수 위였다.
라크루아 궁정백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는 침묵만 감돌았다. 말발굽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클로에는 아까 제대로 답을 듣지 못한 바를 다시 물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데미가 왜 여기 와 있었을까?’
제복남이나 광대탈의 경우처럼 자신이 뭔가 다른 행동을 하지 않은 이상 모든 것들이 제 기억대로 흘러갔는데, 그렇다면 데메트리안이 원래도 여기를 급습했던 것일까?
하지만 클로에가 기억하는 미래에서 분리 독립파의 테러는 거행되고 말았다. 반면 내일은, 높은 확률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가겠지.
‘우리가 도와서……?’
근위대 출신의 뛰어난 기사와, 뭐든 남들 이상으로 잘하는 데메트리안 콤비다. 미라벨의 실력과 별개로 자기들이 없었다고 해서 그들의 급습이 실패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미라벨이 잡은 자가 혼자서라도 테러를 결행했었나?’
경우의 수를 이것저것 떠올려 보았지만, 당최 떠볼 질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혹시 내가 오기 전에 너희 패색이 짙었니? 아냐, 이것보단…… 내가 미래를 아는데 너희 원래 실패할 거였어……? 원래 너희 여기 있을 게 아니었잖아……?’
뭐가 됐든 데메트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한심하다는 듯이 빛날 것이 안 봐도 빤했다.
그런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느라,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이 제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마차 안의 적막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만났다 하면 주제를 가리지 않고 대화하기 바빴던 둘 사이가 이토록 조용했던 적이 있었을까. 다만 이를 어색해하는 것은 서로의 호위들뿐이었다.
문가에 마주보고 앉은 미라벨과 파이겐이 그 의미를 담아 눈빛을 주고받을 무렵.
“위험할 뻔했어.”
침묵을 깬 것은 데메트리안이었다. 생각에서 깨어난 클로에가 그를 쳐다보았을 때, 차창에 기댄 팔로 괸 그의 고개만큼이나 눈빛도 삐딱했다.
“아무리 누아제트 영애가 실력이 좋고 너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지만.”
“…….”
위험할 줄 모르고 갔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이렇게까지 위험해질 줄은 몰랐다. 마음속에서 곧장 만들어진 그 답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너랑 파이겐 경이 있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쳐?”
“애초에 거긴 왜 와서……”
“그냥 지나가던 참이었다니까?”
“정말?”
무엇을 가늠이라도 하려는 듯 데메트리안의 눈빛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