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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1화 (11/189)

11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10)

클로에는 데메트리안 뒤에 바싹 붙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밖으로 도망친 자는 미라벨이 잡았어.”

끝까지 지켜보진 않았지만 미라벨이 실수했을 리가 없다. 그 애가 누구 딸인데.

데메트리안에게서는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클로에는 그가 자신의 귀엣말을 제대로 들었으리라 믿었다.

아지트라는 느낌에 걸맞지 않게 방은 꽤 넓은 편이었다. 오른편에 거실이, 맞은편에 큰 침실이, 오른편에 작은 방과 화장실로 보이는 닫힌 문……

먼저 빠져나간 치를 따르려는 듯 거실의 사내들은 부서진 벽 쪽을 계속 흘끔거리고 있었다.

‘저 폭탄들을 최대한 챙겨서 도망치려는 거겠지.’

정말 최선은 자신들을 막아선 주종을 처치하는 것이겠지만, 검 좀 잡는 자들이라면 둘의 무력이 만만찮음을 한눈에 알아차렸을 거였다. 넷이서 둘에게 감히 못 덤빌 정도로.

“저희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리들.”

연둣빛이 감도는 백금발의 사내가 새로이 데메트리안을 향해 칼을 겨누며 말했다. 그 눈동자에 빛난 절박함이 그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했다. 교묘하게 고쳐 선 그의 뒤편으로 늘어지는 그림자 속에서, 나동그라졌던 사내가 엉금엉금 기어 폭탄들을 쌓아 둔 쪽으로 다가갔다.

“잘못한 게 없다면 우리한테 폭탄이 아니라 물이라도 한잔 줬어야지.”

그 빤한 수작에 아무렇게나 대꾸하며 파이겐이 검을 고쳐 쥐었다. 상대 모두를 제 쪽으로 유인하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스칸다르인들은 눈빛을 주고받더니, 상식적으로 둘씩 갈라 데메트리안과 파이겐을 향해 달려들었다.

챙! 채챙!

데메트리안은 제 상대의 일격을 받아내는 동시에, 팔과 다리를 넓게 벌려 클로에를 제 등 뒤로 숨겼다. 그 어떤 검날도 이 뒤로 보낼 순 없다는 것처럼.

클로에는 최대한 그의 동선에 걸리지 않도록 몸을 움츠린 채 실내의 상황을 살폈다.

‘역시 예상대로 눈속임이네.’

나머지 한 남자가 자루 안에 폭탄들을 쓸어 담고 있었다. 클로에는 슬그머니 제 왼쪽 소맷자락에 손을 가져갔다.

쐑-

그때, 클로에의 눈앞에 번쩍하는 것이 있었다. 데메트리안에게 붙어 있던 두 사내 중 소극적으로 굴던 치가 왼편에서 클로에를 향해 찔러 들어온 것이었다.

데메트리안의 대응이 방어적인 것을 보면, 누가 봐도 클로에는 그의 약점이었다.

“어딜……!”

재빠르게 데메트리안의 검이 짧은 호선을 그리며 그 왼쪽을 막았다. 상대의 칼을 다급하게 미끄러뜨린 탓에, 거기에 스친 데메트리안의 손에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데미!”

데메트리안은 순식간에 몸을 비틀어 먼저 칼을 주고받던 자를 순식간에 걷어찼다. 멀찍이 나동그라진 그가 검을 놓친 것을 확인한 데메트리안은, 곧바로 칼이 미끄러진 바람에 비틀거리던 다른 치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쇄도했다. 횡으로, 또 종으로 날카로운 호선이 번쩍였다.

‘뭐, 뭐야?’

클로에가 평생 봐 온 그의 검술은 그 성정만큼이나 간결하고 깔끔했는데, 그가 그토록 거칠게 검을 휘두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견 위태해 보이리만치.

그의 절박함, 그의 손날에 생긴 상처, 이들을 생포할 요량인지 무너진 벽을 등지고서 고전하는 파이겐까지…… 그 모든 것들을 눈에 담는 클로에의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해.’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야만 했다. 얼른, 빨리.

검문에 걸리지 않기 위해 마정석을 표준 규격 미만으로 조각했고, 그를 운반하기 위해서 대축일 주간의 인기 상품 중 하나인 꽂이 꽃을 활용했으며, 그것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축제 장터에서……

“한 명 더 있어!”

펑!

클로에의 급박한 외침과 동시에 방 안에 연막탄이 터져 사위를 뿌옇게 만들었다.

“아까부터 계속 감이 좋으시네.”

방 안에서 몸싸움하던 자들이 격하게 토해내는 기침 사이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스며 나왔다. 화장실인 줄 알았던 작은 방에서 순식간에 연막탄을 던지며 튀어나온 것은, 낮에 축제 장터에서 만났던 마도구 상인이었다.

연막 가스 때문에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일단 실례.”

고글을 쓴 그녀가 순식간에 쇄도한 탓에 얼굴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마도구상이 저를 스쳐 지나가리라 판단한 클로에는 반사적으로 팔을 내뻗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저지할 수 있지 않을까.

“꺄악!”

그 찰나, 반대로 제 목을 팔뚝으로 휘감아 끌어당기는 마도구상의 완력에 클로에는 중심을 잃고 말았다.

“……로이!”

뿌연 연기 속에서 켁켁거리던 데메트리안이 낸 외침에서, 클로에는 반사적으로 제 처지를 인지했다.

‘이게 바로 그거구나, 인질극!’

말로만 듣던 인질극, 20년인지 25년인지 모를 생애에 처음으로 겪는 일!

꽉 죄인 목 근처에 어른거리는 차가운 날붙이의 감각이 그 판단에 확신을 더했다.

‘여기서 그냥 도망치지 않고 굳이 인질을 잡는다는 것은……’

뒤로 난 길이라곤 계단을 향하는 것뿐인 복도인데. 혹시 다른 방으로…… 침착하게 눈동자를 굴려 복도를 살폈지만, 투숙객이 있는 듯한 방은 모두 연관이 없는지 아까처럼 문만 조금 열어 놓은 채였다.

‘다른 방에 동지가 있는 건 아닌 듯하니 퇴로 확보가 목적이겠지.’

그럴 때쯤, 어느새 자루 안에 마정석 폭탄을 대충 다 쓸어 담은 남자가 순식간에 그들 쪽으로 달려들었다. 저 정도 장사가 아까 데메트리안의 칼부림 한 번에 나동그라진 것은, 역시 의심을 사지 않고 폭탄 더미 쪽으로 향하려던 전략이었다.

마도구상은 클로에의 목을 조르며 벽 쪽으로 붙어 남자에게 길을 내줬다. 증거품들을 다 쓸어 담은 자가 도망칠 기세였다.

일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모든 것을 담아내던 데메트리안의 눈동자는 뿌연 연기 속에서 절박하게 빛났다.

‘저 상인이 나타날 것은 예상했던 바였으니까, 냉정히 판단해야 하는데……’

그녀를 두고 어떻게 냉정히 생각할 수가 있을까.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간신히 다잡아야 했다. 얼마 전 다짐한 대로 제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우선 검을 고쳐 쥐고, 일단 달아난 놈은 파이겐에게 따라잡게 하고, 클로에부터……

그 고뇌를 꿈에도 모른 클로에가 제 소맷부리 안에 손을 넣은 것은, 자루를 둘러멘 남자가 클로에를 밀치며 계단 쪽으로 돌아 나갈 때였다.

“끄헉!”

클로에의 손이 짧게 허공을 그은 순간, 복도 끝에서 꺾어 계단으로 내려가려던 남자가 단말마를 내지르며 고꾸라졌다. 계단참 쪽으로 몸을 돌리기 위해 무게중심을 실었던 발목이 꺾이면서였다. 그대로 계단 밑으로 떨어진 남자는 얼굴부터 처박히고 말았다.

“으아……”

그걸 바라보는 클로에의 입에서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제가 한 일에 지레 놀란 거였다.

남자의 다리에는, 낮에 마르코네서 미라벨이 쥐어 보게 했던 신상 표창들이 박혀 있었다.

현장 정리는 일사천리였다.

제 편에게도 자비 없는 연막탄 탓에 스칸다르인들은 별 저항도 못하고 켈록대다가 모두 제압되었고, 뒤이어 파이겐이 계단참에서 턱이 나가 꿈틀대던 남자를, 그리고 그 앞 골목에서 미라벨에게 제압당한 다른 일당을 차례로 수거해 왔다. 마도구상 또한 파이겐의 손날에 가뿐히 의식을 잃었다.

“거참, 해치지 말라는 명만 아니었어도 이런 꼴은 안 보이는 건데, 아가씨께 신세 단단히 졌네요.”

“경은 아무래도 이번 생에 소드마스터 되긴 그른 것 같아.”

“아까 놈한테 던진 게 표창 아니고 악담이었죠?”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과장하여 지으면서도 파이겐의 눈은 연신 싱글대고 있었다.

파이겐은 데메트리안이 황궁 소년 병사단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의 검술 스승 겸 호위로 크레벨의 녹을 먹고 있는 이였다. 그만큼 클로에와도 봐 온 세월이 깊었다.

저야 근위대 기사의 종자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기사 서임을 받은 기사인데, 아무리 봐도 놀이 친구 딱 그 정도인 또래의 영애를 호위랍시고 데리고 다니는 고용주의 친우 분이 늘 걱정스럽던 차였다.

‘본인이 이런 재주를 갖고 계셨다니.’

연기 때문에 제대로 보진 못했으나 임기응변이 뛰어나셨고, 뒤이어 온 그 호위라는 영애의 뒤처리 또한 깔끔했다.

“이제는 저 볼 때 미심쩍단 눈초리는 않으시기예요?”

그런 파이겐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양 미라벨이 끼어들었다.

‘로이! 혼자 가지 마!’

거리로 뛰어내린 자를 제압하고 있는데, 갑자기 클로에가 쏠랑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통에 미라벨은 하마터면 사내를 놓칠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를 제압했을 즈음, 그가 튀어나왔던 창 안쪽에서 재차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또 혼이 나갈 뻔했고.

저게 그 폭탄인가? 얘는 왜 갑자기 뛰어 들어가서는!

급한 대로 제 치맛자락을 찢어서 남자를 포박해 두고 건물로 뛰어 들어갔더니, 다행히도 계단참에 거꾸러져 있는 게 생면부지의 스칸다르인이었다.

낮에 마르코네서 고른 단도들이 사내의 한쪽 발목과 오금 근처에 박혀 있는 것을 본 미라벨은 클로에가 제 몫을 단단히 했음을 알았다.

“실전이 처음은 아니신가 봅니다?”

“뭐어, 스승이 좋아서 그래 보이나 봐.”

제국의 밤을 풍미했던 농브르의 실력자가 수도 어느 가문에 적을 두고 있다더니, 헛소문은 아니었나. 파이겐은 클로에가 언급한 ‘스승’에 대해 생각했다.

“저는 모르는 일로 하겠습니다. 혹여 아가씨 경호가 허술해지면 안 되니까요.”

“저 하나로 허술하단 소린 아니시죠?”

“결박술이 허술하지 않은 건 이제 알겠습니다.”

“다음번에 로이랑 데미 공자님 만날 때 수련장 비워 둬요.”

파이겐이 얄밉게 이죽대자 미라벨의 얼굴에 오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여자라면 무시하는 치들에게 하도 시달린 조건반사였다. 다만 신중한 파이겐의 경우 그저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단언하지 않으려는 것뿐임을 아는 클로에가 적당히 말을 보탰다.

“우리 부모님이 내게 허투루 누굴 붙이셨겠어? 내가 얼마나 비싼 상품인데.”

“또 그 소리야, 맨날.”

까르륵, 미라벨은 웃었으나, 정작 그 말을 내뱉은 클로에는 흠칫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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