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9)
클로에가 믿는 것은 이번에도 언젠가 에티엔이 들려준 이야기였다. 이른바, ‘경시청발 오피셜’.
우스꽝스런 민원이나 치정 범죄 이야기만 식탁에 올리는 에티엔이었지만, 이따금 제도의 주목을 받는 대형 사건들의 뒷이야기도 전해주곤 했다. 궁정백인 아버지야 이미 보고받은 내용이겠지만, 이 정보를 조금 먼저 앎으로써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지는 다른 식솔들에겐 귀 쫑긋 세워야 할 소식들이었다. 시민들의 공포를 조장할 수 있으니 제도 길바닥에 나부낄 신문에까지는 실릴 내용은 아니었으나, 귀족 사회에는 언젠가 알음알음 퍼지게 될 이야기들이었으니까.
‘아티장 지구의 여관방이었어요. 용병들 상대로 하니 누가 드나들어도 모르는 곳요.’
‘검문에 안 걸리려고 초소형 마정석만 썼더라고요. 그렇게 작은 보석에 마법을 새길 수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장터에서 꽂이 꽃에 마정석을 달아 팔았던 모양인데, 그 마정석들이 연쇄 폭발을 일으켜서 난리가 커진 거예요.’
‘퍼레이드 행렬에 꽂이 꽃을 던진 시민들은 저들도 모르는 사이 도화선이 된 셈이죠.’
앞다투어 떠오르는 에티엔의 목소리는 정말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것일까.
“여기 어디 여관방이었어.”
“이 위는 다 여관 아냐?”
“들어 봐, 그러니까 뒤편 말고 이쪽 마르코네 바로 위쪽이었다고.”
“1층의 반이 마르코넨데?”
놀려 먹겠다는 셈으로 말끝마다 물고 늘어지는 미라벨의 낯을 클로에는 한번 노려봐 주었다.
들은 바만 있고 직접 본 게 아니니 클로에도 답답했다. 차라리 정말 꿈이었다면 본 기억이라도 있을 텐데.
“몇 층 몇 호인지는 주님께서 말씀 않으시던가요?”
“있어 봐, 좀.”
에티엔은 말해 줄 거면 자세히 말하지 왜. 클로에는 그의 멱살을 짤짤 흔드는 상상을 잠깐 하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싶어졌다.
방 하나하나 다 털어 보면 좋겠으나 어쨌든 여자 둘짜리 일행이다. 여자 둘은 마주 본 것만으로도 왠지 이길 것만 같은 자신감을 샘솟게 해 주지 않던가. 물론 상대방에게 말이다. 게다가 마르코네는 건물도 컸고. 6층짜리 건물에 부지도 넓어 객실이 서른 개는 될 거였다.
‘근방에서 제일 큰 여관이 여기니까 낮이고 밤이고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서 택한 거겠지.’
클로에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비. 폭탄은 크지 않아.”
머리 하나라도 보태면 뭐라도 나오겠지 싶어 클로에는 되는 대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작아. 거기 들어갈 만큼 마정석이 컸으면 지금 시기에 외성 검문에 걸렸을 거야.”
그러셨어요, 깐족거릴 법도 한데 대꾸가 없었다. 클로에의 진지해진 말투에 미라벨도 덩달아 숨죽여 경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혹시 아까 마르코한테 물어본 거랑 연관돼 있어?”
잠시 고민하던 미라벨이 물어온 말에 클로에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건물에 스칸다르인이 묵고 있는가? ’
그 질문을 조심스레 던졌을 때, 마르코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입술을 조금 오므림으로써 클로에의 짐작이 맞았음을 표현했다.
‘반백의 중년 여성이 있었지? 혹시 그들의 짐에 뭔가 수상한 점은 없었나?’
‘저희 여관에 들고 나는 자들이 하루에도 수십인데요. 요즘 같은 때에 외성 검문이 좀 깐깐했으려고요?’
경비대가 와서 탐문할 때와 마찬가지로 준비된 답을 읊는 마르코를 보며 클로에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거 때문에 당신 이제 장사 접게 생겼다고! 정말로 그렇게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하긴, 그런가…….’
그렇다고 달리 더 캐물을 수 있는 것도 없어서, 클로에는 이상한 영애님 취급받지 않는 선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웬일로 마르코랑 말을 섞나 했더니.’
낮의 그 일을 곰곰 떠올려 보던 미라벨의 낯에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반백의 중년 여인이라면 아까 마도구상…… 혹시 분리 독립파? 분리 독립파가 또 일을 벌인다고? 그래서 얻는 게 뭔데?”
“그러게 말야.”
실제로 얻는 게 없었다. 그들의 거사는 사실상 성공했지만 스칸다르 왕실이 납작 엎드려 사과하는 것으로 끝났으니까. 복속된 이래로 스칸다르는 늘 독립을 요구해 왔고, 고티유에서의 테러 역시 10년에 한 번쯤 도는 역병 같은 이벤트였다.
그래서 에티엔도 다른 이야깃거리를 가져왔을 때와 달리 열의를 띠지 않았고, 그때의 클로에도 깊이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독립 의지를 계속 관철하는 거지…….”
제 안에서 명확한 답이 만들어지지 않으니 덩달아 자신감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세 좋게 집에서 나올 때까진 좋았는데,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었다.
클로에는 다시금 마르코네 뒤편 노천 광장에 시선을 던졌다. 이 근방에 묵는 용병들이나 그들 사이에 녹아들고픈 뜨내기들은 대부분 여기서 밤을 즐겼다.
‘나와 있는 이들 중에서 찾을 수 있다면 일이 한결 수월할 테니까.’
스칸다르인은 제국 연방의 다른 지역 출신들에 비해 알아보기가 쉬웠다. 워낙에 폐쇄적인 탓에 외국인들과의 혼인을 꺼렸고, 그래서 그들은 밝은 금발이나 연둣빛이 섞인 머리칼을 대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왕실은 더더욱 폐쇄적이었으니 귤빛 머리칼의 제국 출신 공비가 배척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클로에와 미라벨은 자연스레 노천 좌석에서 웃고 떠드는 취객들을 머리색 위주로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스칸다르 출신으로 보이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민머리 용병이 몇몇 눈에 들어왔지만 그 일행은 모두 어두운 색깔의 머리칼뿐.
‘하긴, 거사 전날 밤에 마시고 떠들 리가 없나.’
클로에는 초조함에 로브 앞섶을 바짝 여몄다.
어쨌든 4년 차 스칸다르 제2왕비로서, 스칸다르인에 대한 혐오만 깊어질 이 비행을 막고 싶다는 마음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지금 고티유에는 아직 제 부군이 될 분도……
쾅!
그때였다. 건물 반대편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광장의 취객들이 느릿느릿 시선을 돌릴 때에, 클로에와 미라벨은 이미 그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콰쾅!
마르코네 모퉁이를 막 돌아섰을 때, 다시 한번의 폭음과 유리 깨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건물 3층 저편에서 유리창과 그 아래쪽 벽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사람도 빠져나올 수 있을 크기의 그 공동 너머로 그 안의 사정이 엿보였다. 한 남자가 구멍을 막듯이 밖을 등지고 서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달려들어 몸싸움을 하는 듯하다가 순간,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라비!”
제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은 미라벨은 클로에가 외치기도 전에 골목으로 뛰어내린 인영을 쫓아 튀어 나갔다. 골목 저편에서 구름처럼 넘실대는 인영의 머리칼이, 어두운 골목에 잠기면서도 레몬 빛으로 빛난 것이다.
폭탄, 밝은 금발. 찾았다.
“죽이진 마!”
“걱정은?”
탁, 탁, 미라벨의 단도가 보도블록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털푸덕. 어둠 속에서 제 가랑이 사이로 파고든 단도에 놀란 도망자가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도망가려 했지만 웬 무거운 것을 졌는지 중심을 대번에 잡지 못하고 비틀대는 모양새였다. 그새 따라잡은 미라벨이 다리를 걸어 놈을 다시 넘어뜨리는 것이 보였다.
이제 3층을 확인해 보면 된다. 상황도 확실하고 가봐야 할 곳은 명확한데, 폭탄 터지는 소리가 여전히 몸속에서 울리는 듯했다.
뭐 하려고 여기까지 왔는지! 클로에는 자책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라벨을 보냈으니 발을 들이고야 만 건데…… 일단 올라가 봐야 할까? 누가 나오는지 기다리면 안 될까? 창문으로 누가 또 뛰어내릴까? 저 위의 남자도 분리 독립파와 한 패면 어쩌지? 내가 휘말리면? 이 건물이 무너지면?’
밤마실은 자주 했었지만 그것이 암행인 적은 없었던 탓에 경험 부족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클로에가 입구 즈음에 붙박여 있던 그 순간, 부서진 벽 너머로 구멍을 막듯이 서 있던 남자가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도망친 자를 확인하려는 듯한 얼굴.
실내의 전등 빛에 비친 그 얼굴을, 클로에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라면 더더욱. 붉은 머리칼을 짧게 깎은 거구의 남자……
‘파이겐 경!’
순간 해빙된 듯 클로에는 가볍게 발걸음을 떼었다.
“우리가 잡았어!”
건물 쪽으로 향하며 외치는 소리에 제 눈을 의심하고 있던 창가의 사내, 파이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니, 저 아가씨가 여긴 어디라고? 낮부터 참……’
한껏 당황한 파이겐보다야 지금의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고 있는 클로에는, 방금까지의 머뭇거림은 다 잊은 채 반가운 마음만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파이겐이 있다는 것은, 이곳에 그가 있다는 것이니까.
클로에가 수련화의 견고함에 힘입어 귀족 영애답지 않은 기세로 2층을 스쳐 지나갈 때쯤 객실 문들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별일이 다 일어나는 밤의 용병 거리래도, 제가 묵는 건물에서 터지는 폭음은 모른 체하기 힘들 거였다.
3층에 다다랐을 때에는 대부분의 객실 문이 열려 있었다. 몇 투숙객들은 복도로 나와서 살피기도 했다. 제 이윤이 걸린 문제가 아니니 참견하려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흘끗 보며 벽이 부서진 쪽에 가까워질수록, 클로에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숨이 차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떨려서였다.
그 객실의 문을 막아서고 있는 그림자. 그리고 기사 파이겐의 주군. 이런 상황에서 그를 또 마주치게 되다니……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클로에의 외침을 들었을 때부터 끓어오른 걱정을 참지 못하고 클로에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로이, 네가 왜……?”
그 푸른 눈동자가 혼란으로 흔들렸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데메트리안이 그의 호위 기사 파이겐과 함께 한발 앞서 와 있었던 것이다.
둘의 시선이 부딪힌 찰나.
“데미, 앞!”
데메트리안과 대치하고 있던 남자가 그 틈을 타 달려들었다. 눈을 날카롭게 빛낸 데메트리안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상대의 칼을 흘려냈다. 그러는 바람에 무게중심을 잃은 남자는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시도는 좋았어.”
그 남자를 내려다보며 데메트리안이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네가 여기 어쩐 일이야?’
그것은 클로에의 눈빛이 던지고 있는 물음과 같은 것이었다. 목구멍까지 서로에게 물을 것이 차올랐지만, 일단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아까 폭파로 부서진 벽 쪽은 파이겐이, 현관문은 데메트리안이 막아선 채 객실 안의 일당들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었다.
방 안의 사내들은 모두 다섯. 방금 나동그라진 사내를 제한 나머지 넷은 손에 쥔 검으로 두 침입자를 번갈아 겨누며, 등진 벽을 따라 조금씩 구석으로 이동하려는 듯했다.
그들이 향하는 쪽에는 커다란 자루 안팎으로 주먹 크기의 검은 물체들이 쌓여 있었다. 클로에는 한눈에 그것이 제가 꿈에 봤다 주장하던 것임을 알았다.
‘저게 내일 테러에 사용될 것들…….’
군납되는 마정석 폭탄이 아기 머리통만 한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크기가 훨씬 작았다.
그리고 한쪽에 쌓인 조화 꽂이 꽃 더미. 마정석이 물려 있었을 수술 부분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꽂이 꽃으로 위장해 반입한 마정석들을 따로 제작한 외피의 소켓에 일일이 재조립한 것으로 보였다.
“손님이 한 분 더 오셨군요.”
여자 둘보다는 여자 하나가 더 만만해 보이는 법. 클로에의 등장에 내부의 스칸다르인들이 히쭉 웃는 것이 보였다.
클로에는 처음으로, 데메트리안이 이를 가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