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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9화 (9/189)

9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8)

용병들이 전당 잡히고 돌아오지 못한 것은 안 쓰는 무기만이 아니어서, 마르코네에는 귀금속으로 봐 줄 구석도 있는 장신구들도 있었던 것이다.

아마 고향의 첫사랑 아가씨가 쥐여 준 실크 손수건, 어쩌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인 까메오 목걸이, 추측건대 대대로 내려온 호신용 보검, 높은 확률로 귀족가 잠입 임무 때 슬쩍한 브로치 같은 것들……

‘예전엔 별 관심도 안 가던 것들인데.’

대부분이 서민들의 장신구거나 유행에 뒤떨어진 것들이어서 시선을 오래 잡아끌 것들이 아니었는데, 아까 노점에서 뫼니엘의 마정석을 알아보고 나니 괜히 보석 달린 액세서리에 관심이 가는 것이었다.

클로에의 안목은 여느 귀족들처럼 사기꾼들에게 겨우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준이었으나, 보석과 마정석이 특산품인 나라에서 최고급품을 보고 지내는 동안 꽤 발달했던 것이다.

‘10년 전에나 유행했을 디자인에 사파이어가 고급일 리 없지. 누가 봐도 이건 색만 벌건 유리조각이고. 7세기 디자인이라도 뫼니엘식 커팅이면 복고풍으로 밀어 볼 만할까……?’

마르코에게 물어볼 말을 품은 조마조마한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클로에는 이내 액세서리함을 뒤지는 데에 빠져들었다.

스칸다르에서의 귀비 전하 생활이 정말 호화롭기는 했다. 겨울이면 모피가, 여름이면 얇은 실크가, 사시사철 크고 작은 보석들이, 각지에서 저마다 다른 빛깔과 질감을 띠고 별궁으로 몰려들었으니까. 클로에의 안목이 섬세해진 것이 바로 그 덕이리라.

‘이것 봐라?’

능숙하게 장신구들을 살피던 손에 엄지손톱만 한 보석이 한가운데에 박힌 펜던트가 걸렸다.

언뜻 보기에 투박하게 세공된 뿌연 보석이었는데, 그 모서리 어름에서 비치는 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뭘 그렇게 봐?”

서대륙의 단도들을 구경하던 미라벨이 만지작거리던 것 몇 가지를 들고서 다가왔다.

“또 뭐 알겠어?”

“운 좋으면 뭔가 얻어걸리지 않을까 싶어서. 볼래?”

“저야 아가씨 쓰시는 거나 얻어 쓰는 처지인걸요.”

미라벨이 익살스러운 말투로 거절했다.

귀족 영애에게 필요하다 싶은 것들은 클로에가 방문하는 의상실에서나 라크루아 백작 모녀를 방문하는 상인들에게서 나도 하나 더, 하며 장만해 온 그녀였던 것이다.

“한번 봐 봐.”

클로에가 미라벨의 손에서 단도들을 건네받으며 대신 펜던트를 쥐여 줬다. 어쩔 수 없이 창가로 들어오는 어스름한 햇볕이나 마정석 램프 쪽을 향해 비춰보았지만, 미라벨의 눈에는 그냥 희끄무레한 조각일 뿐이었다.

“이게 뭐 괜찮은 거야?”

“이런 커팅을 책에서 본 것 같아서…….”

탐나는 거구먼. 가장 처음 좋아하게 된 이를 욕심 내지 못하기 때문일까, 제 아가씨는 욕심부리는 데에 소질이 없었다. 미라벨은 마음속으로나마 조금 전까지 동행했던 그 낯짝을 혼내 주었다.

“마르코오! 이건 얼마야? 나 이것도 할래!”

“그 상자는 다 10실버씩! 주인장이라고 좀 부르라고, 요 아가씨야!”

귀족 영애님이 여기 단골인 거 광고하고 다닐 일 있냐. 구시렁거리는 마르코에게 미라벨이 펜던트를 던졌다.

선객은 간 지 오래고, 미라벨이 사려고 갖다 놓은 것들이 판매대 앞에 올려져 있었다. 마르코는 투덜대며 그 펜던트도 함께 포장하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그를 보면서, 이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생각해 두었던 질문을 다시금 입안에서 굴렸다.

‘이 건물에 스칸다르인이 묵고 있는가?’

누구도 모르겠지만, 스칸다르를 저버릴 수 없는 저에게 제 살을 베는 듯한 말.

어제 미라벨과 약속한 대로 마르코네 앞에 다다랐을 때의 그 위화감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미라벨과 단둘이 외출할 때면 세 번에 한 번꼴로 자주 들렀던 곳이 왠지 너무 오랜만인 느낌이더라니, 클로에가 살아낼 ‘미래’에 더 이상 온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마르코네는 장사 쉰대. 저번 테러 때문에 가게 건물이 무너졌다나 봐.’

언젠가 흘려들었던 미라벨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귓전에 달려들었다.

축제 장터거리에서 스칸다르인을 마주칠 때까지 잊고 있었던 이즈음의 사건들이 선명히 기억나기 시작했다.

스칸다르 분리 독립파가 벌인 대축일 주간 퍼레이드 테러. 퍼레이드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동시다발적으로 연막탄을 터뜨려 아수라장을 만들었고, 그 틈에서 쏘아 올린 ‘독립국 스칸다르 만세’라는 글귀가 하늘을 수놓았다.

제도의 대로들을 가득 채운 인파를 마비시킬 정도로 규모가 컸던 것치고는 소수의 인원으로만 결행한 범죄였던 탓에 검거가 쉽지 않았다. 범인들의 정체는 선명한데 자취는 오리무중이었다.

반동분자들이 자연스레 신분을 숨기고 녹아들 곳 중 하나로 마르코네 위층의 여관방이 지목되었고, 수색을 위해 경비대가 접근했을 때에 증거 인멸을 위해 설치되어 있던 트랩이 작동하면서 건물이 붕괴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바로 이 건물에, 분리 독립파의 아지트가 있다.

그날 저녁, 클로에는 가족들과의 만찬을 마친 뒤 미라벨을 꼬셔 몰래 저택을 빠져나갔다.

축제 야시장에 가 보고 싶다 하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케이였다. 클로에의 시녀이자 호위인 미라벨은 클로에가 함께하지 않으면 밤나들이를 나갈 수 없는 처지인지라, 기회를 놓칠 리 없었던 것이다.

마침 때도 잘 맞아서, 디가 아쉴의 밤마실을 따라 저택을 비운 덕에 사용인들의 눈을 속이기가 더 수월했다.

“오랜만에 밤에 나오니까 개운하네.”

“밤만 되면 저택 밖은 위험하다던 네가 할 말이야?”

또 그냥 웃는 수밖에 없었다. 뭐가 됐든 오랜만이면 다 좋은 거였다.

다소 거칠지만 질긴 천, 끝단이 어중간하게 종아리께에 오지만 그래서 걸리적거리지 않는 치마. 서민풍의 옷 밑으로는 기사 생도들이 신는 수련화까지. 양가죽으로 부드러이 발을 감싸고 접지력 좋은 밑창이 울퉁불퉁한 지면을 차단해 주는 느낌이 오랜만이어서 괜히 콩콩 뛰어보았다.

‘진짜로 오랜만인데. 라비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단둘이 종종 저택을 몰래 빠져나오곤 했었는데, 리도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밤거리보다 동기들과의 사교 모임에 더 빠져든 것이었다. 한 달에 한두 권씩 데메트리안과 나눠 읽는 책도 그 두께며 깊이가 어마어마해졌고.

그렇다고 해도 미라벨이 조를 때면 셋에 한 번쯤은 감행했었지만, 스칸다르에서의 지난 몇 년간에는 정말로 언감생심이었다.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건 달랐다.

‘그러고 보면 미라벨이 함께 스칸다르로 가면서 잃은 것이 또 있었구나.’

씁쓸함인지 아스라함인지 모를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어떻게든 하룻밤 외출을 즐기고 나면 한소리 듣는 것은 미라벨뿐이었지만, 함께하는 밤 외출이 즐거운 만큼 미라벨은 기꺼이 이를 감수하곤 했었는데.

“솔직히 말해 봐. 왜 나오자고 한 거야?”

근 이십 년 세월을 얕보지 말라구, 미라벨이 내뱉었다.

야시장 말고 아티장 지구 쪽으로 가자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는데. 클로에는 반가운 기색을 누르며 진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꿈을 꿨는데.”

“엥?”

“마르코 씨네 건물에서 폭탄들이 잔뜩 쏟아져 나왔어. 그 폭탄들이 필립 1세 대로랑 앙헬라 거리랑 페드로 거리로 굴러가는 거야. 퍼레이드 때 폭탄 테러가 일어난단 예지몽 아닐까?”

일부러 엉뚱하게 꾸며낸 말이었다.

‘꿈이라는데 알 게 뭐야.’

“주님이 너한테 꿈을 내리신 거라고? 네가 무슨 사제도 아니고.”

“그래서 말인데, 한번 아티장 지구 쪽에 가 보자. 개꿈이면 거기서 파는 술이나 좀 먹어 보지 뭐. 지갑 가지고 나왔지?”

탐정 놀이 좀 하다가 맥주나 마시자는 소리다. 아서라, 네가 퍽이나 거기를 좋아하겠다. 핀잔을 주면서도 미라벨은 기꺼이 길을 안내했다.

클로에는 공용 마차에 몸을 싣고 밤의 거리를 달려가면서도 제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무고한 시민들을 구하고 싶다거나 하는 선량한 마음으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낮에 제가 한 일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고, 애초에 이 사건 역시 신문에서 글로만 접한 것이었으니까.

클로에와 같은 귀족 영애들에게 대축일 퍼레이드는 그저 어린 시절의 추억일 뿐, 머리가 좀 굵어지면 평민들의 여흥이라며 빠져 주는 게 기품이었던 것이다. 혹여 궁금하더라도 프란츠 광장 근처 전망 좋은 고층 살롱에서 내려다보는 정도면 충분했고.

애초에 사상자가 많지 않은 사건이었다. 인명 피해가 많고 적음으로 사건의 경중이 정해지는 건 아니지만 고위 귀족가의 영애가 밤거리를 내달릴 정도로 시급한 사안은 아니란 말이었다.

그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제복남을 비롯한 경범죄자들은 사실 어느 난리 통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수준의 불한당이었고, 스칸다르에서 차곡차곡 쌓아 온 지식들은 책에서 읽은 것을 갖고 착각을 일으킨 거라 생각해도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십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이, 제가 평생 가 볼 일 없는 밤의 아티장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그건 정말로 믿을 만한 것이지 않을까.

‘계속 확인하면서도 못 믿어지는 걸 어쩌겠어. 하지만 이마저 진짜로 일어난다면, 정말 꿈이 아닌 걸 테니까…….’

클로에는 미라벨의 팔짱을 낀 손에 힘을 꾹 줬다.

마르코네가 위치한 골목은 낮에 들렀을 때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뒤편의 아티장 지구는 공방들이 다 닫았으니 어두컴컴한데, 오로지 이 골목에만 불이 환히 들어와 흥성대고 있었다.

낮에는 노인정마냥 조곤조곤한 말소리나 흘러나오던 마르코네 뒤편 주점의 노천 좌석은, 맥주잔 하나씩을 손에 쥔 덩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르코네에 무기를 구하거나 맡기러 온 용병들이 이 근방에 묵는 덕에, 용병 길드와 다른 의미로 용병들의 사랑방이 된 이 거리는 그래서 ‘용병 거리’라 불리곤 했다. 용병 거리 일대에는 용병들과, 용병들에게 도움을 받으려는 자들과, 그들에게서 정보를 캐내려는 자들, 그리고 그들을 노리는 자들로 가득했다.

클로에와 미라벨은 그 쨍한 불빛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반대편 골목 안쪽에서 그편을 살피고 있었다. 아무리 로브를 뒤집어썼어도 저들이 이질적일 것은 너무나 분명했기에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사제님, 그래서 어디서 폭탄이 쏟아져 나오던가요?”

이게 맞으면 당장 성국으로 짐 싸 들고 가야 되는 거 아니냐며 미라벨이 밉살스럽게 굴었다.

클로에라고 어렴풋한 기억 하나만을 믿고 무작정 나온 것은 아니었다.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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