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7)
“데미 공자님이랑 놀고 싶어서 책 핑계 대는 줄 알았더니, 그 책들 다 읽긴 하시나 봐요?”
상인의 감탄을 들으며, 미라벨이 클로에의 어깨에 팔을 둘러 끌어안으며 이죽거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누구보다 제가 클로에의 영리함을 잘 알았다.
“공자님, 그렇지 않아요?”
평소 같았으면 제가 짓궂게 내뱉는 말에 한마디 얹었을 데메트리안이 여전히 표정만 굳힌 채 말이 없자, 미라벨이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
“아, 그러게요.”
저만의 세상에서 갑자기 끌려나온 사람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데메트리안이 대꾸했다.
“그나저나…… 스칸다르 마정석에 대해서 네가 언제 이렇게 잘 알았어?”
“으응?”
“원로원 상공회의소 사람들도 마정석 산업은 잘 모르는데…… 언제부터 네가 스칸다르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고?”
클로에는 제게 향할 줄 몰랐던 질문의 화살에 한껏 놀랐다.
‘뭐야, 쓸데없이 예리해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이 저에 대해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제가 저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이 정도야 상식이지. 리도테가 3년제라도 배울 건 배우잖아.”
“그래?”
“응, 그래.”
데메트리안도 청강생으로 다닌 적 있는 교양 아카데미인 리도테까지 들먹이며 하는 말에, 데메트리안의 눈초리가 이유 없이 가늘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데메트리안과 클로에는 어려서부터 많은 것을 함께 익히며 자라 왔고, 그래서 그들이 쌓은 상식이며 교양은 함께 나눌 것이지 왜 알게 되었는지 추궁할 대상은 전혀 아니었는데 말이다.
‘혹시 데미도……?’
뭔가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로이 어머니께서 다른 나라 문화에 얼마나 관심이 많으시다고요.”
손님 많은 가판대에서 상인을 앞에 묶어 둔 채 여느 때처럼 실랑이를 벌이려는 두 사람 사이로 미라벨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으응, 맞아. 너도 알잖아.”
“……그러시긴 하시지.”
말은 그렇게 해도 뭔가 떨떠름한 표정. 클로에는 그런 그의 날카로운 기색이 당황스러워서 미라벨의 팔짱을 끼고 가판대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마정석 장난감들과 액세서리들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인형이나 하늘로 던지면 날개를 퍼덕이는 드래곤 인형 등의 눈에 마정석이 뫼니엘 식으로 세팅되어 있었다. 머리에 아름다운 컬을 넣어 주는 머리핀, 손톱을 발갛게 물들이는 팔찌 같은 이색 상품들도 눈에 띄었다.
“우와, 이거 신기하다. 로이, 봐 봐.”
“자꾸 끼시면 마력이 소진됩니다.”
“앗, 몰랐어요.”
미라벨이 신기한 마음에 이것저것 착용해 보자니, 상인이 무뚝뚝하게 말을 얹는 것이었다. 클로에는 그런 미라벨의 모습에 아무도 모를 의미를 담아 미소 지었다.
‘나도 처음 봤을 때 얼마나 신기했다고.’
스칸다르에서 귀한 보석으로 만든 최고급 마정석을 자주 진상받았던 클로에의 눈에도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평소에 끼기 부담스러울 만큼 큰 다이아몬드 반지나 주먹만 한 루비 목걸이에 방어 마법이나 마법을 파쇄하는 마법이 새겨져 있대도, 더 와닿는 건 새끼손톱만 한 마정석 눈알을 빛내며 꼬리를 살랑대는 강아지 인형인 법이니까.
‘그러고 보면 라비도 내가 받은 마정석 액세서리들을 늘 함께 확인했었는데…… 그땐 이렇게 신기하다는 티를 못 냈었지.’
무엇에든 쉽게 감탄하고,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웬만해선 참지 않는 미라벨이 셰비크의 엄격한 시녀들 사이에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가.
스칸다르로 함께 건너가기 전처럼 꾸밈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미라벨을 보는 것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혹여 오늘 밤에라도 갑작스레 ‘원래’대로 돌아가든, 지금까지처럼 그때와 동일하게 시간이 흘러가든…… 저는 어쨌든 스칸다르에 가게 될 거니까.
‘그렇다면 라비는……’
“이 꽂이 꽃은 얼마예요?”
“거기 쓰여 있소.”
다른 쪽의 손님에게 대꾸하는 상인의 말소리가 클로에의 상념을 깨웠다.
미라벨에게 핀잔을 주던 그 목소리보다도 한껏 퉁명스러운 그 말투에, 미라벨도 데메트리안도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북부 사람들 말투가 원래 퉁명스레 들리긴 하지만 이 상인은 유독 심한 것 같네.’
그 손님들이 있는 쪽에는 은은하게 빛나거나 오팔 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는 조화들이 쌓여 있었다. 대축일 주간 동안 귀나 앞섶에 꽃을 꽂고 돌아다니다가 대축일 전날 퍼레이드 행렬에 던지며 소원을 비는 풍습에 쓰이는 꽂이 꽃들이었다. 무명으로 만든 꽃의 꽃술 부분에 일반적인 규격보다 작은 마정석을 달아 마법 효과를 준 듯했다.
그 마법 꽂이 꽃들의 인기가 좋은 모양인지 가판대의 손님은 모두 그쪽에 몰려 있었다.
“30브론즈면 어떤 거야? 책이 10실버쯤 하던데.”
“평민들 빵집에서 좀 비싸다 싶으면 그쯤 해.”
“마정석 쓴 것치고 저렴한 거지?”
“글쎄…… 아까 물고기 단팥빵이 20브론즈였어.”
마도구를 사 본 적 없는 남작가 영애와 길거리 음식을 사 본 적 없는 궁정백가 영애는 꽂이 꽃 물가를 가늠하는 데에 실패했다. 퍼레이드는 평민들의 행사여서, 12개월짜리 행복을 빌기 위해 버려지는 꽃이 한 송이에 얼마쯤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나 해서 데메트리안을 쳐다봤지만, 그는 계속 저만의 생각에 빠져 표정을 굳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 가판대며 상인을 꼼꼼히 살피는 눈빛은 언뜻 날카로운 듯도 했다.
“혼자 뭐가 그렇게 심각해?”
“아, 아냐. 30브론즈가 비싸냐고 했던가?”
“넌 알아?”
클로에는 그럴 리가 없다는 뉘앙스를 담아 말했다. 아무리 그가 원로원 의장의 보좌관으로서 많은 상식을 갖고 있대도, 예산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평민들의 생활 물가에 대해 알 리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버리는 셈 치고 써 볼 만한 가격 아닐까? 응대가 불친절한데도 저렇게들 사는 것 보니까.”
그러고 보면 상인의 말투가 퉁명스럽거나 말거나 가판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이런 꽃, 저런 꽃을 사서 귀나 블라우스 앞섶에 꽂아 넣고 매대를 떠나가는 것이었다.
마정석이 쓰인 상품이 인기가 좋은 걸 보는 클로에의 마음이 괜스레 뿌듯했다. 내 나라 특산품이에요, 여러분! 어쨌든 자기 기억으로는 그저께까지 4년 차 스칸다르의 비전하였으니까.
그 반가움으로 클로에는 자기와 미라벨의 눈동자 색을 닮은 마정석이 박힌 머리핀을 하나씩 골랐다.
“내가 살게. 너랑 장터거리 와 본 것도 처음이고.”
미라벨이 셈을 치르려는 것을 막으며, 데메트리안이 은화 몇 개를 상인에게 건넸다. 혼자 계속 무슨 생각에 빠져 있던 것치고는 재빠른 손놀림이었다.
“신기하다. 카니발 때 스칸다르 사람 처음 봤어.”
종이봉투에 담긴 머리핀들을 받아 매대를 떠날 때 미라벨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이에 불현듯 클로에의 생각을 잡아채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축일 주간에 스칸다르인이라고?’
스칸다르는 대축일을 기리지 않는다. 주신, 에르드를 믿지 않으니까.
천 년 전 캄포 왕국과 통합한 아르투젠이 칭제하고 정복 전쟁을 벌였을 때, 항복하고 제후국을 자처한 나라들은 모두 주신을 받아들였다. 반면 가장 늦게 항복한 데다 캄포와 오랜 세월 반목했던 스칸다르는 유일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맞섰다. 대신 후계자를 제국에 볼모로 보내는 것으로 절충하였고.
종교의 차이는 문화의 차이로 거듭나서, 대부분의 제국과 같은 문화권을 형성한 것과 달리 스칸다르는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스칸다르의 마정석 액세서리들이 제국에 퍼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스칸다르는 지속적으로 독립을 요구했고, 결국 클로에가 겪었던 미래에서 이를 쟁취해 내고야 만 것이었다.
그 과정은 온건했지만 이전의 요구들은 모두 폭력적이었다.
대축일 주간 퍼레이드 행사에 폭탄 테러를 일으킨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제 스칸다르도 조금씩 개방하려는 건가?”
“설마요.”
그 와중에도 미라벨의 말을 듣고 있었는지, 데메트리안이 끼어들듯 대답했다. 그 어조는 왠지 모르게 엄숙한 듯도 했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단정 짓는 그의 말소리에 클로에는 제 기억을 헤집어 보았다.
‘맞아, 내일이었어…….’
마음속으로 날짜를 가늠하던 클로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르투젠의 가장 큰 골칫덩이였던 스칸다르 분리 독립파가 바로 내일 테러를 일으킬 것이었다.
* * *
필립 1세 대로와 페드로 거리 사이에 위치한 마르코네는 겉으로는 잡화점인 척하지만 대체로 무기를 팔아서 벌어먹는 곳이었다. 대륙의 대장간에서 취급하지 않는 서대륙의 무기들이나, 용병들이 전당 잡혀 놓고 죽어서 되찾아가지 못한 무기류를 취급했다.
전직 용병의 딸로서 클로에의 호위도 겸하고 있는 미라벨에게 각양각색의 무기를 접할 수 있는 마르코네는 신세계였다.
보석 세공이나 자수같이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모인 아티장 지구 입구쯤에 위치해 있고 외관상 어쨌든 잡화점이어서, 클로에의 외출 도중에 들르기 용이한 점도 그 매력이었다.
바로 오늘처럼.
본디 마르코네서 파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클로에는 마지못해 들르곤 했었으나, 오늘만은 진정 기꺼운 마음으로 미라벨을 따랐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미라벨이 잃은 것들을 생각하면, 좋아하는 것을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이 녀석이 근무지 이탈도 않고 뭘 그리 사들여 오나 했더니, 아가씨께서 도와주신 덕이었군요?”
제 아가씨가 익숙하게 마르코네에 들어가는 것을 본 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주다니? 내가 여기 단골인걸. 경은 초행이야?”
능청스러운 클로에의 대답에 디가 복면을 벗으려다 말고 어색하게 잠시 입을 가렸다. 주인님의 인심이 개연성이었다. 아저씨 개그를 해도 웃어드렸을 것이다. 물론 아까 보니 좀 웃긴 구석도 있으셨던 것 같지만……
“여기 좋은 물건 많아. 좀 추천해 줄까?”
“아가씨가 연기에 소질이 있으신 줄 오늘 알았습니다.”
1절만 하셨으면 더 진정성 있게 웃어드렸을 텐데.
미라벨과 디가 저들의 흥밋거리에 열중해 있는 것을 확인한 클로에가 계산대 쪽을 흘끗 보니, 주인장 마르코는 선객들을 응대하느라 바쁜 모양새였다.
‘오늘 마르코네에 오게 된 것이 어쩌면 운명일까.’
그 뒤로 얼마간 장터거리를 더 돌아다니다가 이제 집무실로 돌아가 봐야겠다는 데메트리안과 헤어지고서 이곳에 다다랐을 때. 클로에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테러가 일어난다면 이곳은……’
이 가게가 곧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 알고 있는 클로에는, 이제껏 말 섞어 본 적 없는 마르코에게 반드시 물을 말이 있었다.
그의 곁이 비기를 기다리며 하릴없이 가게를 둘러보았지만, 긴장감을 늦추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잡화점이어서 밀가루나 소금 같은 식료품도 있었고, 싸구려 브랜디나 그에 곁들일 육포나 비상식량에 귀족가에선 볼 수 없는 색다른 포장재 같은 것들이 시선을 끌었지만, 늘 그랬듯 잠시뿐이었던 것이다.
열없이 헤매던 클로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허름한 액세서리 함에 들어 있는 보석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