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6)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둘러싼 사람들이 숨죽이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고급스런 옷을 입어 놓고 라쥐르령 산골 마을 출신인 척하던 수상한 아가씨가, 이제는 제국 아카데미의 생도와 반말로 대화를 나누는 상황.
크레벨 소공작의 얼굴은 몰라도 제국 아카데미의 금빛 견장은 알아본 사람들은 대번에 아가씨들 편으로 기울었다. 어쨌든 아카데미 생도는 인기가 좋았으니까.
‘저 지긋지긋한 제복이 이렇게 도움이 되는 거구나.’
제국 아카데미를 일찍 수료하고 원로원에서 일하면서도, 아직 공식적으론 생도라며 제복을 고집하던 그를 고루하다 놀리곤 했었는데. 군중들의 우호적인 태도를 느끼며 클로에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무슨 일이십니까?”
데메트리안의 뒤에 따라와 있던 사내가 미라벨에게 말을 붙였다. 데메트리안보다 반 뼘 정도 큰 키에 붉은 머리칼을 짧게 깎은, 데메트리안의 호위 기사 파이겐이었다.
클로에와 함께 다니면서 그와도 안면을 튼 지 오래인 미라벨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저 남자가 소매치기하는 걸 봤어요. 저 탈 속에 훔친 물건을 숨기던걸요.”
그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파문을 일으켜, 좌중을 둘러싼 사람들이 광대탈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실인가?”
“무, 무슨 소리요……?”
데메트리안이 허리를 낮추며 묻는 말에, 광대탈을 쓴 사내가 주춤주춤 손을 뒤로 짚으며 다리를 버둥댔다. 등 뒤에는 이 난리를 구경 중인 인파, 앞에는 그들이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는 아카데미 생도 일행. 진퇴양난이었다.
“탈을 한번 벗어 본다면 결백이 증명될 텐데.”
“…….”
광대탈을 쓴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리만 바르작거렸다. 그걸 바라보던 데메트리안이 고개를 모로 까딱이자, 미라벨의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파이겐이 앞으로 나섰다.
“잠시.”
그가 그 두툼한 체격에서도 짐작되는 악력으로 탈의 밑 부분을 잡고 양옆으로 당기자, 탈이 우두둑, 찢어졌다.
“어, 저거 내 전대잖아?”
“어머! 세상에, 팔찌가 어디 갔나 했더니……”
“레니, 너 돈주머니 간수 잘하랬지?”
찢어진 탈 아래로 우수수 떨어지는 그의 노획품에, 저도 모르는 사이 희생양이 되었던 이들의 새된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경, 처리 부탁해.”
“당연한 말씀을요.”
파이겐이 광대탈을 썼던 사내에게 다가가 그를 포박했다. 도난당했던 물건들을 찾으려고 달려드는 이들을 위해 옆으로 물러나면서도, 데메트리안의 시선은 클로에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가면을 쓰고 있어도, 평복을 하고 있어도 제가 어디서든 알아볼 수 있는 귤색 머리칼의 제 아가씨에게서.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너야말로, 네가 장터거리는 웬일이야? 입궁한 줄 알았더니.”
“나야……”
거기까지 말한 데메트리안이 말을 잇지 못했다.
제 운명을 건 일의 밑 작업을 위해 나온 것인데, 그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비밀이었으니까.
‘아니, 아무 기미도 없을 때에 모든 것을 바로잡을 거니까.’
데메트리안은 말할 수 없는 제 모든 사연들을 마음속으로 꾹 누르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뭐, 축제 장터거리 감찰 정도?”
“원로원이 그런 일도 한다고?”
“흥미로운 제보가 들어온 게 있어서.”
“흐응.”
데메트리안은, 가면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그 구멍 너머에서 클로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그녀의 표정이란 없었으니까.
괜히 마음이 간지러워진 그는 제 콧잔등을 긁적이는 척하며 제 허물어지는 입꼬리를 슬며시 가렸다.
“공자님 덕분에 손쉽게 풀렸어요. 역시 생도 끗발이 최고인데요?”
“위험할 뻔했습니다. 경비대에 신고하시지. 저 자가 무기라도 갖고 있었으면 어쩌시려고…….”
“아이, 제가 있잖아요.”
“그래도 말입니다.”
미라벨의 너스레가 민망할 정도로, 데메트리안의 얼굴은 단단히 굳어져 있었다. 그녀가 클로에의 호위도 겸하고 있음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실력을 정확히 알 기회가 아직 없었던 것이다.
‘아까 마주친 기사가 믿고 따로 움직일 정도면 실력을 의심할 바야 없겠지만.’
알아볼 것이 있어 들렀던 경비대에서, 웬 소매치기를 검거해 인계 중이던 라크루아 경호조의 기사를 본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데메트리안이 그의 얼굴을 기억할 일은 없었지만, 파이겐이 무사의 기감으로 알아본 것이었다.
‘라크루아의 아가씨께서 여기 와 계시나 봅니다?’
‘로이가?’
‘저 갈색 머리 기사, 라크루아 경호조거든요.’
‘……아쉴이 온 걸 수도 있겠지.’
기대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리 말하면서도, 목적한 바를 수색하기 위해 두리번대는 그의 시선은 자꾸만 귤빛 머리칼을 찾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 혼잡한 거리에서 정말로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클로에와 미라벨이 소동을 벌여 준 것이 제게 득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데메트리안은 익숙하게 팔을 접어 팔꿈치 쪽을 클로에에게 내밀었다.
“……뭐야?”
“어디 가려던 거였어? 바래다줄게.”
“아.”
클로에는 그 팔을 선뜻 잡지 못하고 빤히 쳐다보았다.
‘데미가 에스코트해 준다는 거지…….’
그래, 이맘때의 그들에게는 너무 자연스럽고 익숙한 행동이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크레벨 공작저나 황궁에 도착하면, 마중 나와 있는 그의 팔에 손을 얹고 보폭을 맞추곤 했으니까.
어서 잡으라는 것처럼 한번 까딱이는 팔꿈치. 클로에의 시선이 저를 모로 내려다보고 있는 데메트리안의 얼굴로 옮아갔다.
상황이 우스워서일까, 그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긋고 있는 듯도 했고…… 그런 것을 보는 클로에의 마음에는 설렘이 뒤늦게 피어났다. 어떠한 ‘역할’을 했다는 고양감이나 예상치도 못한 데서 그를 만난 놀라움에 가려져 있던 감정이었다.
‘데미도 원래 이날 장터거리에 나왔던 걸까?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오늘 아침에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은 걸 알고서 혹 다시 보게 될 것을 기대했고, 또 한편으로는 전령을 통해 보내온 보라색 아네모네 꽃다발을 보며 이 시절의 철없던 제 마음이 떠올라 차라리 보지 않기를 원하기도 했지만…… 역시, 그를 만나는 건 몇 번을 거듭한대도 설레는 일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때에 말야.’
혹여 데메트리안이 그가 장담한 대로 스칸다르에 사절로 왔었대도, 이처럼 허물없이 대하지는 못했을 거였으니까.
‘오늘 밤에 셰비크로 돌아가면 아쉬워서 어쩔 거야…….’
갑자기 서글퍼지는 마음. 저도 모르게 데메트리안의 팔에 손을 올릴 뻔했던 클로에는, 그래서 주먹을 꼭 쥐며 손을 물렸다.
“가자, 라비.”
뒤에 서 있던 미라벨의 팔짱을 급하게 끼며 하는 말에,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황당하다는 듯이 굳어졌다. 클로에는 일부러 밉살스런 목소리를 내었다.
“뭘 모르시네, 공자님께서는. 이런 데서 에스코트받는 건 귀족이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거라고.”
“하하, 참.”
그조차 데메트리안은 기꺼웠다.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파이겐이 돌아올 때까지만 동행한다는 핑계로 데메트리안을 뒤에 달고서, 클로에와 미라벨은 장터거리 구경을 재개했다. 클로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디가 돌아온 것인지, 미라벨이 마음 놓고 다른 쪽으로 움직여도 괜찮겠다고 한 터였다.
”데미, 너 가면 쓸 생각 없어? 대축일 주간에는 그게 예의인데.”
클로에는 마침 꼭 아까의 제복남이 썼던 것과 같은 반가면이 진열된 가판대를 보면서 말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를 흘끔대는 것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정작 데메트리안은 개의치 않는 듯했지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니까 내가 데미를 더 의식하게 되잖아.’
그에게 자꾸 설레는 게 싫어서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려 했는데 말이다.
“난 안 불편한데. 곧 돌아갈 거고……”
“내가 불편해서 그래.”
“네가? 왜?”
“다들 쳐다보잖아. 날 뭐라고 보겠어.”
“우릴 아는 사람이면 클로에 라크루아로 보겠지.”
“그러니까.”
“……?”
다들 가면을 쓰고 있어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흘끔대는 사람들 중 반은 크레벨 소공작의 얼굴을 알고 있는 귀족일 거였다. 나머지 반은 누구나 돌아볼 법한 정석적인 미모를 지닌 아카데미 생도에게 호기심을 갖는 평민들일 거였고.
그리고 그와 일행인 듯한 저와 미라벨에게 자연스레 호기심이 이어질 거였다.
‘이맘때의 나라면…… 그래, 데미와 나를 한 묶음으로 보는 게 좋았겠지만.’
그런 사소한 데서조차 제가 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임을 확인받고 싶었던 진짜 스무 살 시절이 떠올라 클로에는 다시금 씁쓸해졌다.
‘그때는 우리가 멀어지게 될 것도 모르고…….’
클로에의 자조적인 상념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로이, 저기 신기한 거 많이 파는 거 같아.”
클로에와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흔들며 미라벨이 건너편의 가판대를 가리켰다. 근방에서 가장 많은 손님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곳이었다. 밝은 금발이 희끗희끗 센 중년의 여성이 매대 한가득 마정석으로 움직이는 장난감들을 팔고 있었다.
‘밝은 금발에 마정석이라니.’
클로에는 반가운 마음에 홀린 듯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역시 북방계 사투리.’
클로에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싶었다.
“뫼니엘 지방에서 오셨나 보군.”
클로에의 말에 상인이 눈을 끔벅였다. 미라벨이 둘의 얼굴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뫼니엘? 스칸다르 남부 거기?”
“맞아요.”
“정말요?”
상인의 대답에 휘둥그레진 미라벨의 노란 눈동자가 클로에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알았어?”
얘 맞추는 거 보셨어요, 그런 기색을 담은 미라벨의 시선이 데메트리안에게로 향했다. 그런 때면 눈썹이라도 한번 들썩여 줘야 할 데미 공자님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상인의 얼굴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표정을 굳히고 있을 뿐이었다.
‘관료들은 대축연 주간에도 공무 생각에 바쁘신가 보네.’
미라벨은 그렇게 생각해 버리고는 다시 클로에 쪽으로 고개를 들렸다.
“스칸다르에서는 마정석을 보석처럼 세공해서 액세서리에 많이 쓰는데, 여기 봐 봐.”
클로에가 제 앞에 놓인 머리핀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끝에 보석이 박혀 있는 그 머리핀에는 머리칼에 진주가루를 뿌린 효과를 내게 한다고 설명이 적혀 있었다.
“마정석이 다섯 발로 물려 있잖아. 이게 뫼니엘 세공 길드들 특징이야.”
“오호라.”
신기하다는 듯이 주억거린 미라벨이 상인을 쳐다보자, 상인이 제법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 아시네요.”
보석 광산이 많은 동시에, 보석에 마력을 불어넣은 마정석 산업이 함께 발달한 스칸다르에서 귀비로 지내며 알게 된 상식이었다. 아르투젠에서야 마정석은 보석 하등품에 마력을 불어넣어 전등이나 주방, 난방 설비 내부에 삽입되는 것뿐이어서, 마정석을 보석처럼 세공하는 것은 낯선 방식이었다.
‘스칸다르 귀비 전하로서 쌓은 교양이 어디 가겠어?’
클로에는 뿌듯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데메트리안의 미간이,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어렴풋이 좁아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