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5)
클로에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원숭이 가면을 쓰고 머리칼을 두건으로 싸맨 사내였다.
‘소매치기 녀석들이 작당을 해서는 다 같은 가면을 쓰고 머리칼을 싸매고 다녔더라고요.’
역시 언젠가 들었던 에티엔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울렸다. 소매치기 패거리들이 누가 범인인지 헛다리를 짚도록 똑같이 차려입은 덕에, 지갑을 털리고도 진범을 못 찾은 피해자들의 제보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흘려듣던 경비대도 나중에는 민원인들이 똑같은 차림새를 읊자 경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고.
제가 나중에 알게 될 일들이 눈앞에서 거듭해 벌어지자, 클로에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역시 진짜 과거인가……
“라비.”
클로에가 미라벨의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에티엔이 저러고 다니는 자들 소매치기라고 그랬는데.”
며칠 뒤에야 에티엔이 만찬 식탁에 올릴 이야기였지만, 말한 건 말한 거였으니까. 미라벨이 헤에, 신기하다는 듯 클로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쫓아가 볼까?”
장난스런 미라벨의 목소리에, 클로에는 순간 머뭇거렸다.
확인하고 싶은 건, 여전히 그랬다. 믿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한편으로 제복남에게 망신을 준 뿌듯함 덕분인지 영웅 심리가 솟아오르고 있었지만…… 제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는 위화감이 가시질 않았다.
‘확인해서 그게 맞으면, 뭐 어떡할 건데?’
조만간 경비가 강화되면 들통 날 것이고, 거기에 귀족 영애가 힘을 쓸 구석은 없었다. 사회의 톱니를 구성하는 자들이 제 기능에 따라 처리할 일이었다.
클로에는 그런 쪽으로 제 역할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저 가족들의 사랑과 사용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교양과 외모를 가꾸다가, 혼기가 찼을 때 정해지는 가문의 안살림을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뭔가 뿌듯한 마음은 들었지.’
그건 제가 귀족가 자제들을 위한 원로원 산하 교양 아카데미인 리도테를 차석으로 졸업했을 때에도, 데뷔탕트를 성공적으로 치렀을 때에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감정이었다.
클로에는 작은 절충안을 내었다.
“디 경.”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예의 그 인기척이 다시금 나타났다.
“저 두건 쓴 자 따라가서, 수상한 짓 하면 경비대에 넘겨.”
“여기 계십시오.”
클로에가 미라벨과 하는 이야기를 이미 들었을 디는, 군말 없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무언가 주의를 주려는 듯, 머리카락으로 가려지지 않은 쪽 눈으로 미라벨에게 슬쩍 시선을 던지고서였다.
‘그래, 내가 나설 일은 이제 없어. 이게 최선이야.’
“로이, 이 구슬 정말 자수정 같지 않아?”
디를 기다리며 클로에와 미라벨은 근처의 수공예 액세서리 가판대를 구경하기로 했다. 에르드의 여덟 사도들을 상징하는 보석들인 에르드의 여덟 심장과 같은 색의 구슬로 만든 것들이었다. 주신 에르드의 축복을 기리는 대축일 주간에는 이처럼 색 구슬을 활용한 잡동사니들이 하루 이틀짜리 기념품으로 유행하곤 했다.
“저 연두색 말고? 네 수호 사도는 리도테잖아.”
“아니, 우리 엄마.”
“아, 맞다. 남작부인 수호 사도가 에시스였지……”
“응, 순례의 에시스답게 지금도 순례 떠나셨으니 대축일 장터 구경하신 지도 오래되셔서 말야. 아빠 때문에 엄마만 고생이지…… 로이, 듣고 있어?”
“아, 으응. 그럼, 그럼.”
적당히 대답하면서도 클로에의 눈동자는 연신 시장을 훑느라 바빴다. 에티엔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는 상황들이 다시금 눈에 밟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왜 다들 대축일 주간, 대축일 주간 하는지 알겠어요. 정말 별 기상천외한 자들이 많더라고요. 큰 탈을 쓰고 다니면서 훔친 귀금속을 그 속에 숨기지를 않나, 사람들의 경계심을 늦추려고 사제들의 수련복을 입고 나온 자도 있었다니, 나 참.’
디를 시켜 따라가게 한 이와 똑같은 차림새를 한 자를 비롯해, 큰 탈을 뒤집어쓴 이나 사제처럼 차려입은 자들이 액세서리 구경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 근처에서 수상쩍게 굴고 있었던 것이다.
에티엔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 클로에는 자꾸만 눈에 밟히는 잡배들을 보며 마치 시험에 들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라비, 있잖아.”
클로에는 매대를 구경하던 미라벨의 로브 자락을 살짝 당겼다. 그 작은 동작도 기민하게 알아차린 미라벨이 미련 없이 손에 쥐었던 실 팔찌를 내려놓았다.
“저기 저 광대탈 쓴 사람 좀 이상해.”
“왜?”
조금 한적한 곳으로 물러선 미라벨은 클로에의 눈길을 따라 그 광대탈을 쓴 자를 살폈다. 보통 사람들이 얼굴 앞면만 가리는 가면을 쓰는 것과 달리, 머리를 통째로 감싸는 것을 뒤집어써서 목에서 여미고 있었다.
“탈이 뭐 저렇게 커? 답답하지도 않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민폐도 크겠고.”
“그게 아니라…… 저 턱 부분이 너무 묵직해 보이지 않아?”
클로에는 최대한 에둘러 미라벨의 관심을 유도했다. 밑 부분을 잘 보강해 둔 모양인지 얼핏 봐서는 티가 안 났지만, 미묘하게 앞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러고 보면 조금 휘청거리는 듯도 하고……”
미라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것도 에티가 뭐라고 얘기한 거야?”
“으응, 그게……”
“어라?”
클로에가 결국 같은 레퍼토리의 거짓말을 흘려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미라벨이 놀란 소리를 내었다. 액세서리를 구경하려는 듯 허리를 숙이고 있던 그 치의 손이, 바로 옆에 서 있던 소년이 입은 조끼 주머니를 스치더니 탈의 입 부분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소매치기인 거야……?”
미라벨은 제 로브 자락을 쥔 클로에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에서, 클로에가 말했던 ‘이상하다’라는 게 바로 제가 본 것임을 알았다.
“한번 털어 볼까?”
미라벨이 제 눈높이보다 살짝 낮은 클로에를 쳐다보며 말했다. 가면의 구멍 사이로 비친 그 초록빛 눈동자에는 미라벨이 쉬이 읽기 어려운 감정이 서려 있었다.
‘이런 데에 관심도 없던 애가 웬일이지?’
제가 졸라서 가끔 평민들 사이에 섞여들고는 한대도, 클로에는 아무래도 명문가의 영애님이었다. 그 가문이 대대로 제도 고티유를 다스려 온 궁정백 가문이었고, 외가 또한 5공작 가문 중 하나였으니까. 공작가 자제들이나 황실 직계들과 어울리며 자라 온 클로에는 그 밖의 세상이란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인 양 굴 때가 많았다.
‘가장 가까운 데미 공자가 어려서부터 정혼자가 있었으니까, 저도 정략혼 시장에 나갈 상품이라면서 자기 관리를 좀 철저히 했었어?’
미라벨의 의아해하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클로에는 미라벨의 팔을 꼭 잡고서 그 광대 탈을 쓴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 가면 속의 낯에는, 미라벨이 상상도 못할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일어날 일이 정말로 일어나는 것을 자꾸만 목격하게 되니, 손을 쓰고 싶어지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 역할이 아닌 걸 알지만.’
불의를 처단하는 데에 힘을 보태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미라벨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했지만, 조금 전 그 성취감을 처음으로 느껴 본 클로에는 지난 스물다섯 해 동안 느껴 본 적 없는 일종의 고양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클로에의 눈동자가 마침내 미라벨에게로 향했다.
“그럴 수 있을까……?”
“말씀이라굽쇼, 아가씨.”
클로에만 없었다면 이미 실력을 발휘하고도 남았을 미라벨은 가면 밑으로 씨익 웃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깔끔한 행실을 추구하는 클로에와 함께일 때엔 오지랖을 부리지 못해 좀이 쑤시던바, 불의 앞에서 참지 않아도 되어 대환영이었다.
미라벨은 지켜보라는 듯 클로에를 한번 쳐다보고서 광대탈을 쓴 자의 뒤로 다가갔다. 그때쯤 그가 다른 희생양을 물색하려는 듯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타이밍 좋고.’
미라벨은 우연히 그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척하다가, 순식간에 무릎으로 그의 오금을 세차게 찍었다. 누구라도 감탄할 간결한 동작이었다.
“으윽! 뭐, 뭐야…….”
광대탈을 쓴 자는 갑작스런 충격에 한쪽 다리가 꺾이며 그대로 털푸덕 주저앉았다. 근처에 몰려들어 있던 사람들이 순발력 좋게 주변을 비워 주었다.
“어라? 아저씨, 죄송해요.”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재질의 로브를 입었으면서, 미라벨은 짐짓 평민인 양 꾸며서 말했다.
“뭐, 뭐요?”
“아하하, 발이 걸려서 그만……”
“발이 걸리다니, 누가 봐도…… 아니, 아가씨가 그랬다고?”
이 고통으로 보아 꽤나 단련한 이의 소행인데…… 광대탈을 쓴 사내는 제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울컥하는 마음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탈 안에 든 게 많아서인지 사뭇 부자연스런 움직임에, 클로에는 마지막 확신을 얻었다. 제복남을 망신 줬을 때부터 하늘을 찌르고 있던 영웅심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미라벨 앞으로 나섰다.
“뤽 아저씨 아니세요? 라쥐르령 앙베르 마을에 양치기로 다녀가셨던……”
“에엥? 아가씬 또 뭐요?”
역시 고급스런 옷을 입어 놓고선 평민인 체하는 이의 등장에, 광대탈을 쓴 사내의 황당함이 극에 달했다.
“로지 아줌마가 아저씨를 얼마나 그리워했는데요. 뤽 아저씨 아니세요? 아저씨 얼굴 확인해 보면 안 될까요?”
“웨, 웬 헛소리요? 난 평생 고티유를 벗어나 본 적이……”
“어머, 목소리도 똑같아! 어쩜 좋아, 폼폼?”
폼폼이라 불리게 된 미라벨로 말할 것 같으면, 스무 해를 함께 자라 온 제 젖자매의 처음 보는 깜찍한 행동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황당해하는 중이었다.
‘얘 오늘 진짜 왜 이래?’
이상하다기보다…… 아니, 이상하긴 이상했지만, 그편이 평소보다 더 재밌으니 좋으면서도 수상쩍었다.
‘갑자기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거야, 뭐야? 어제부터…….’
“폼폼. 꼭 그렇지 않니?”
“어어, 쥘, 맞아.”
보채는 말에 미라벨은 얼른 폼폼의 짝꿍인 다른 하녀의 이름을 주워섬겼다.
“나도 뤽…… 아저씨인 줄 알았지 뭐야? 로지 아줌마에게서 돈을 빌려서는 도망쳤다니 꼭 잡고 싶었던 거지!”
“맞아, 그렇지?”
어린 시절에 읽었던 통속 로망스에 나올 법한 상황을 아무거나 주워섬긴 것인데, 미라벨이 재치 있게 받아 주는 양에 클로에는 신이 났다.
‘이래야 라비지! 이게 정말로는 꿈이래도 괜찮아. 너무 좋은걸.’
격앙된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사내의 광대탈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러니까 가면 좀 벗어 보세요, 네?”
“아니, 나는 그러니까 라쥐르에는 단 한 번도……”
“아저씨, 괜찮아요. 로지 아줌마가 살아 있는지만 알고 싶다고.”
“아니, 그게…… 좀 놔 보시오!”
“꺅!”
“로이!”
탈이 벗겨지지 않도록 꼭 잡고 있던 사내가 클로에를 뿌리치려는 듯 고개를 휙 돌리는 바람에, 클로에가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렸다.
웅성웅성,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높아질 무렵이었다.
“무슨 소란이지?”
갑작스레 날아든 목소리에 모두가 그쪽을 쳐다보았다. 뒤이어 사람들이 한둘 자리를 피하며 틔워 준 길로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그 목소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클로에는, 가면을 쓰고 있던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빌 뻔했다.
“로이, 무슨 일이야?”
“데미…….”
제복남을 마주쳤을 때 이 장터거리에 절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데메트리안이 거기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