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4)
‘분명 입궁했을 텐데?’
오전에 다녀간 전령도 원로원에서 나온 자였으니까. 여가를 모르는 그 데메트리안과 축제 장터거리는 아무런 교집합도 없었다.
그 합리적인 의심과, 여기에서조차 그를 떠올린 데 대한 자조적인 마음으로 남자를 뜯어 살피니 제복의 견장 색깔이 어제 본 것과 달랐다.
‘그러면 그렇지.’
그 데메트리안이 혼자서 먹거리를 파는 노점을 기웃거리는 건 상상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정답을 찾고서 안도하고 나니, 저를 뜨끔하게 한 남자에게 심술이 났다.
‘무슨 축제 장터에까지 제복을 입고 와?’
엘리트 티를 그렇게도 내고 싶나. 삐딱한 눈초리로 쳐다보는데, 언젠가 들었던 에티엔의 말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아카데미 제복을 어디서 구해 와서는, 생도인 척하고 영애들에게 접근했다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대축일 주간의 장터거리엔 잡범들이 많았다. 그게 생업인 경우도 있었지만, 가면을 쓴 김에 일탈을 저지르는 경우도 많았다.
‘아카데미 제복남’의 경우엔 후자에 속했는데, 처음에는 무전취식이나 하자던 것이 잘 먹혀드니까 귀족 영애들에게 접근해서 반한 척하고는 훗날을 기약하며 패물을 뜯었다는 것이다.
제국 아카데미는 귀천을 막론하고 관료가 되려면 수료해야 하는 곳이었다. 데메트리안은 물론이고 소궁정백인 오라비 에티엔을 포함해 작위를 잇고자 하는 많은 귀족가들의 후계자들 또한 제국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때문에 입학시험의 난이도는 극악이었고, 나라에 몸 바치려는 의지 하나로 이를 뚫은 아카데미 생도들은 온 제국민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귀족이라면 미래의 지도자시고 평민이라면 장한 아르투젠의 건아였던 것이니, 저잣거리 상인들도 외상을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생도들이 그 짓을 대축일 주간에까지 할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는데.
클로에는 마침 드는 생각에 그 ‘제복남’의 뒷모습을 한 번 더 노려보았다.
‘에티엔의 말로만 들었던 일이 일어난다면, 지금이 정말로 내가 살았던 5년 전이라는 증거일 테지.’
스무 살로 돌아온 요 이틀간을 돌이켜보면 제 가족들과 미라벨은 기억대로였는데, 뭔가 달라진 듯한 데메트리안의 태도를 보면 제가 살았던 과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직접 겪지 않았던 일은 어떨까.
클로에는 홀린 듯 제복남을 뒤쫓았다.
“레이디들께서 드시니 더없이 풍미 있는 만찬처럼 보이는군요.”
“생도 분들도 듣기 좋은 말을 꾸밀 줄 아시는군요? 드셔 보세요, 저렴한데 맛있답니다.”
“맛있나요……?” 그가 측은함을 불러일으키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연극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소매치기만 아니었어도…….”
“어머, 저런. 부디 저희에게 대접할 기회를 주시겠어요? 황실의 번영을 위해 일하실 분인데요.”
그걸 지켜보던 클로에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고작 소세지 꼬치 하나 갖고 별 유난을 다 떠네. 일단 무전취식은 확정이고.’
제복남은 은근히 세심하게 타깃을 설정한다고 했다. 하급 귀족 또는 부유한 평민. 가면을 썼대도 옷차림이나 머릿결, 자세 등으로 귀족을 알아보는 건 쉬웠지만, 그렇게 세세하게까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데 용케도 가능했나 보다. 그리고 유모나 하녀와 동행하지 않고 친구들끼리 나온 영애들을 노렸다고.
지금 제복남의 구걸을 받고 있는 영애들이 딱 그랬다.
정중하게 ‘한 입만’을 시전한 미래의 인재가 풍기는 짠함은 귀여움을 거쳐 호감으로 승격되기에 충분했는지, 하급 귀족의 영애들로 보이는 목표물들은 그에게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사교계 파티에서라면 숙녀답지 못할 일이었으나, 얼굴을 가려 주는 가면의 존재와 축제의 열기가 용기를 북돋웠을 터였다.
기실 제복남에게서는 뭔가 미남일 것 같은 태가 났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눈만 가리는 반가면을 쓴 걸 보니 제 하관이 뭔가 귀족적이고 미남인 뉘앙스를 풍기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내가 괜히 데미인 줄 안 게 아니지……. 딱 저기까지면 소소한 추억거리일 텐데.’
노점에서 파는 것들이야 바가지를 써도 영애들에겐 푼돈일 것이고, 어쨌든 생도들은 인기가 좋았으니까.
하지만 이 이야기가 에티엔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은, 누군가가 신고할 만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었다.
“제가 영애께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축제의 열기와 생도들의 인기 덕에, 이처럼 후일의 만남을 기약하며 정표를 나눠 갖자는 얼토당토않은 제의가 먹혀 들어갔던 것이다.
저야 제복 단추 하나 떼어 주면 되는 것인데, 영애들은 갖고 있던 장신구나 손수건밖에 줄 게 없는 게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실크 손수건 하나가 그의 손에 쥐였다. 제복남은 그 귀퉁이에 수놓인 이니셜을 찬찬히 살피는 척하더니 그녀의 손을 받아 제 입가로 가져갔다.
“축제가 끝나면 제가 아가씨를 찾아가겠습니다. 반드시.”
그가 손등에 입술을 묻자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 모두에겐 여기가 로망스의 한 장면이었다.
손등에 키스를 받은 영애는 물론이요 동행인 친우 또한 얼굴이 새빨개졌음을, 가면에 가려졌어도 알 수 있었다.
에티엔이 해 줄 말에 따르면 저 남자는 높은 확률로 생도 사칭범인데 말이다.
‘이래서 운명적인 사랑 따위를 바라면 안 돼.’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약해지니까.
탁, 클로에는 입맛이 떨어진 양 아몬드 볶음이 담긴 고깔을 접었다. 오늘 아침에 아네모네를 보며 떠올랐던 이맘때의 제 모습을 다시금 연민하면서.
그 미약한 불쾌감은, 클로에로 하여금 전에 없던 마음을 먹게 만들었다.
“어머, 여기서 동문을 다 만나네.”
바로 타인의 불의에 끼어드는 것. 클로에는 사교계 3년 차, 아니 8년 차의 연기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런데…… 축제 기간에 제복 착용은 금지인데.”
그리고 콘셉트는, 아카데미 학생회 산하 윤리위원회 정도일까.
정의 구현을 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이는 충동에 가까웠다. 간만에 느끼는 자유와, 제가 말로만 들었던 이야기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반가움이 빚어낸 과잉된 흥분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 스무 살의 봄날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 한 켠에 남아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갑작스레 클로에가 끼어들자 당황한 제복남의 잘생긴 하관이 떨떠름하게 굳었다.
“이번에 그런 교칙이 생겼던가요……?”
제복남은 아가씨들의 소시지를 탐내던 때처럼 아련한 말투를 연기했다.
축제 기간 제복 금지. 클로에가 방금 만들어 낸 것이었지만, 무엇이 교칙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난주에 학생회에서 고지했는데. 무슨 전공의 몇 학년이지?”
“경찰 행정학 전공, 1학년입니다.”
얼씨구, 주워들은 건 있나 보네. 다만 노란색 견장은 그 제복이 2학년의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고, 생도들은 3학년 때에나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상하네. 우리 과에 그런 이름은 없는데.”
클로에가 쥐고 있던 아몬드 볶음 고깔로 그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거기 수 놓여 있는 이름의 주인도 클로에를 모를 거였다.
“더군다나 우리는 미래에 제국민의 종복이 될 자들로서 금품을 수수해선 안 되고.”
저잣거리 상인들이 앞다투어 외상을 주는 만큼 있으나 마나 한 규칙이었지만. 그런 점을 지적하면 되는 것을, 당황한 제복남은 뻔뻔스레 연기를 한 것치고는 순발력이 떨어지는지 당황한 듯 목소리를 떨 뿐이었다.
“저는 그냥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충동적으로 나와 본 것뿐입니다. 여기서 운명을 만나려고 그랬나 봐요.”
그가 또 아련한 눈길을 제가 실크 손수건을 뜯어낸 영애에게로 옮겼다.
‘얼굴도 모르는 게 운명은 개뿔.’
운명적인 사랑이 있었으면 내가, 응? 내가…… 클로에의 마음 한구석에 신경질이 돋아났다.
“대축일 주간에 아카데미 폐쇄했는데?”
고향이 지방인 학생들을 위해 아카데미의 문은 1년 336일 아주 활짝 열려 있지만. 클로에는 제복남에게 질문 공세를 이어 갔다.
“자네 지도 교수는 누구시지? 애런 테슬라? 데이빗 잭슨? 마그누스 바이스?”
“테, 테슬……”
“아, 그분은 특허법 교수님이신데.”
가면 밑으로 제복남의 얼굴이 희게 질리는 게 보였다. 당황하는 모습만 보이니 곁의 영애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속닥대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더욱 당찬 삿대질로 아몬드 볶음 고깔을 제복남의 턱께를 위협하듯 휘두르며 취조를 이어갔다.
“지난해 학생회장은 누구였지?”
“크레벨 소공작……”
“풀네임.”
“아, 으음……”
아무리 크레벨의 위세가 높다 해도 평민들에게 크레벨 공작은 공작 나리, 소공작은 공자 나리였으니까.
이를 눈치챈 영애들은 순식간에 그로부터 간격을 한껏 벌렸다. 제도의 유명인사 크레벨 소공작의 이름은 귀족 사회와 아카데미 생도들 사이에서 기본 상식이었던 것이다.
귀족도 생도도 아닌, 아카데미 생도 사칭범 확정이었다. 클로에가 언젠가 들었던 에티엔의 말대로였던 것이다.
“한심하기는.”
클로에는 연극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끝을 내기로 했다.
“생도 강령 4조, 우리는 미래의 공복公僕으로서 제국민들을 섬기는 마음을 갖는다! 생도 강령 5조! 우리는 미래의 공복으로서 어디서나 품위를 잊지 않는다! 6조는?”
“우, 우리는……”
“6조 없어!”
아몬드 볶음이 제복남의 얼굴로 날아올랐다.
* * *
“에티엔 학생수첩을 봐 뒀던 보람이 있네.”
클로에로 말할 것 같으면 애초에 관료가 될 일이 없어서 제국 아카데미는 시험도 치지 않았던 것이다.
‘내 귀신같은 기억력이 큰 몫했고 말야.’
개운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본 클로에는, 그제야 미라벨과 떨어졌음을 깨달았다.
“얘는 잠깐 사이에 어딜 갔담?”
혼잣말을 한 것이 민망해 입안에서 우물거리며 내뱉은 한마디. 실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래서 저를 놓친 것도 모르고 다시 찾으러 오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근처 어디에도 미라벨의 높게 묶은 보라색 머리칼은 보이지 않았다. 미라벨이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이라도, 남자도 많고 높은 모자를 쓴 사람도 많은 이 축제 장터거리에선 별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때 기척도 없이 다가온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미라벨은 앞쪽 기념품 가판대 앞에 있습니다.”
경호조의 디였다. 평소 클로에가 미라벨과 다닐 때에는 호위가 따로 붙지 않는데, 사람도 많고 탈도 많은 대축일 주간인 만큼 따로 동행한 모양이었다.
‘그땐 몰랐었는데.’
이런 혼잡한 곳에서 귀족들이 범죄의 타깃이 되기 쉬웠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면을 썼어도 귀족은 영락없이 티가 났으니까. 미라벨이 경호조가 따라붙은 것을 알아서 안심하고 있나 보다 싶던 찰나,
‘아, 그거 다 봤겠네…….’
제 혼신의 윤리위원회 위원 연기가 뒤늦게 떠오른 클로에는 한껏 민망해졌다.
디가 말해 준 즈음에서 쫑긋 솟아오른 미라벨의 포니테일을 알아본 클로에는, 몰래 다가가서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혼자 막 가 버리면 어떡해?”
“왔어? 별일 없었어.”
“너는 그랬겠지. 너 말고 날 걱정하라고, 나를.”
서로의 너스레에 까르르 웃던 그때. 방금 제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미라벨에게 들뜬 마음을 토로하려던 순간, 클로에의 시선을 다시금 붙드는 광경이 있었다.
“왜 그래, 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