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3)
‘역시 고전적인 방법을 써 봐야 할까?’
일거수일투족을 바로 옆에서 보살피는 폼폼을 외출시킨 게 신의 한 수. 클로에는 몇 가지 대담한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벽에 머리를 박아 보았다. 눈물 찔끔.
코를 막고 어질어질해질 때까지 숨을 참아 보기도 했다.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물구나무도 서 보았고, 꼭대기 층에서 창밖으로 몸을 빼어 고소공포를 즐겨 보기도 하고, 기도 방에서 주신께 사정도 해 보았다.
제 방에서 코끼리 코를 잡고 한참을 돌다 쓰러진 클로에는, 뱅뱅 돌아가는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가 되는 것 같아…….’
폼폼이 봤다면 호들갑을 떨며 집사에게 달려갔을 이 기행들에도 불구하고 클로에는 ‘원래’대로 돌아가는 데에 실패했다.
‘이게 정말 꿈이라면 이렇게 애쓰지 않아도 언젠가 깨어나지 않을까?’
그 생생한 실패들의 끝에 클로에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이게 오늘 단 하루의 꿈이라면……’
그렇다면 허투루 보낼 일은 아니었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닿은 클로에는, 가족들과의 만찬 시간이 다가왔을 때 기꺼이 만찬장으로 향했다.
“어머니, 아버지, 오랜만이에요.”
식당에서 만난 라크루아 궁정백 부부를, 클로에는 일단 양 팔로 힘차게 끌어안았다.
“아이고, 우리 아가씨가 웬 어리광이실까.”
“그러게 어제 일찍 왔으면 좋았잖니?”
“헤헤, 죄송해요.”
부모님의 입장에선 저를 하루 만에 보는 것이겠지만, 클로에에게는 지난 여름휴가 이후로 1년 만의 재회였다.
이리도 부모님을 격의 없이 대하는 게 얼마 만일까.
엄숙한 셰비크의 왕궁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 부모님이 오셔도 마음껏 어리광 피우지 못했던 것이었다. 더구나 아버지와는 스칸다르로 가는 것이 결정되고서부터 조금 어색해졌고……
클로에는 벅찬 마음으로 부모님의 낯을 살폈다. 기억보다 수년 젊어진 부모님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찡한 구석이 있었다.
“어제 아버지 와인 훔쳐 마셔서 찔리나 보죠.”
그 감동을 희석하며 끼어드는 소년의 목소리.
오랜만에 듣는데, 너무 반가운데, 와- 그래도 얄미워서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반가움을 대번에 사그라트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손아랫동생이리라. 노려보자니 혓바닥을 내밀어 보이는 아쉴의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꼴 보기 싫었다.
“영식께서는 아직 뭘 모르시니 입을 다무시지요.”
“누나도 성년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입술을 삐죽이는 열세 살 아쉴의, 마지막으로 본 모습보다도 더 앳된 얼굴.
어머니의 피서에 한 번씩은 동행했던 아버지나 오빠 에티엔과 달리, 클로에가 스칸다르에 간 직후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공부하느라 바빴던 동생 아쉴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키도 훌쩍 크고 어깨도 떡 벌어졌다던데, 알 게 뭐람. 지금 눈앞의 연갈색 고수머리의 소년은 변성기의 비읍도 오지 않은, 그저 귀여워 콱 깨물어 버리고 싶은 막냇동생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갓 들어온 경비대원들이 한차례 난리였나 봐요.”
“대축일 주간에는 그래서 기사단이랑 경비대가 고통스럽지. 경범죄도 늘어나고, 혹시 모르니 테러 분자도 살펴야 하고.”
경시청 행정관으로 고군분투 중인 한 살 터울의 오라비 에티엔은 만찬 때마다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사건 사고들을 식탁에 올리곤 했는데, 고티유의 모든 인구가 흥분하는 대축일 주간에 들어서고 나니 매일같이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쏟아졌다.
“소매치기도 늘어서 걱정이에요. 심지어 소매치기를 잡았더니 이미 다른 소매치기한테 당해서 물증이 사라지기도 했고요. 또 사기꾼들은 어찌나 극성인지……”
클로에는 입가에 미소를 건 채 가족들의 낯을 눈에 담으며 그의 재담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어떤 귀부인이 미아 신고를 하셔서 경비대가 저잣거리를 헤매고 다녔는데 영 찾을 수가 없었대요. 왠지 짐작이 가세요?”
‘이름이 미미라서 영애님을 찾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그 댁의 호신용 대형견이었지.’
“그 귀부인이 미미를 찾아 달라기에 대원들이 모두 미미 영애, 미미 영애, 외치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그 귀부인의 반려견이었다지 뭐예요.”
에티엔의 이야기가 클로에가 기억하는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제 성미만큼 정직하기 그지없는 오라비의 입담은 두 번 귀담을 정도는 못 됐지만, ‘그게 뭐니’, ‘말도 안 돼’ 하며 추임새를 넣어 주는 화목한 제 가족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오랜만에 맛보는 라크루아 주방의 솜씨를, 비전하의 기품을 신경 쓰지 않고 맘껏 맛볼 수 있어서 실제로 배가 부르기도 했지만.
어리둥절한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어린 시절 읽었던 로망스들 중에 시간을 되감는다거나 다시 태어나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많았지만, 그 주인공들은 대부분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나 죽음에 맞먹을 정도의 고통을 받다가 신이나 악마의 도움으로 시간을 되돌리곤 했다.
고향을 떠나 쓸쓸했을지언정 왕의 편애를 받던 귀비 전하에겐 삶을 되감을 곡절이 전혀 없었다.
주신을 믿지 않는 스칸다르에 가고서도 매주 기도를 올렸지만 한번도 응답을 들은 적 없었고, 악마의 속삭임이라곤 꿈에서조차 느껴 본 적이 없다.
‘스칸다르로 갈 줄 알았으면 고티유에서 평판 신경 안 쓰고 하고 싶은 것 다 해 볼 걸 그랬다고 아쉬워하기야 했었지만 말야…….’
이 정도의 아쉬움은 누구의 삶에나 있는 것 아닐까.
‘리도테나 황궁 도서관엔 참고할 만한 책이 좀 있으려나. 이런 초현실적인 이야기는 황자궁 서고가 더 맞을지도……’
밤이 깊어 고향의 침대에 멋대로 벌러덩 드러누운 클로에는 이 시절의 제게 익숙한 곳들을 헤아렸다. 황자궁 서고에 방문하려면 만나야 할 제 친우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은 일단 지금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잠들고 나면, 이 번민이 그저 하룻밤 꿈의 끝자락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으니까.
‘혹시라도 내일 눈을 떴을 때 아직 그대로라면, 정말 재밌게 보내야지. 정말 후회 없이……’
오늘 어색하게 헤어진 그와도 다시 한번……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숙취도 없이 정말 푹 자고 일어난 아침.
클로에의 시야에 담긴 것은 다시금 창문으로 비껴 들어온 햇살이 천장에 그려진 베람을 비추는 풍경이었다.
여전히, 스무 살의 봄날이었다.
* * *
“로이, 저거 맛있겠다. 그치?”
“너 작년에도 그거 먹고 실망했어.”
“딸기가 문제였어. 올해 딸기는 달다니까 맛있지 않을까?”
미라벨이 딸기에 설탕 시럽을 입힌 꼬치를 탐내며 말했다. 대축일 주간 풍습에 따라 가면을 쓰고 있어 그 눈길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올해도 똑같아. 정 그러면 파인애플이랑 섞인 걸로 도전하든가.”
“앗! 아가씨, 제 속을 읽으셨나요?”
속을 읽은 건 아니고 5년 전이라고 해야 할지, 오지 않은 미래라고 해야 할지 싶은 기억에 따른 것이었지만.
귀족가 주방에 납품되는 것보다 낮은 품질의 딸기로 만들었을 게 분명한 올해의 딸기 꼬치 또한 실패할 예정이었다. 나중에 파인애플 꼬치가 맛있었다는 아쉴의 말을 들은 미라벨이 ‘더 비싼 데엔 이유가 있었네’라며 아쉬워할 것이었고.
제도의 중심인 프란츠 광장에서 남쪽으로 광활하게 뻗은 필립 1세 대로에서는 마차의 통행을 제한하고 대축일 주간 축제 장터를 열어 신분 고하를 막론한 제국민들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다니니 귀족들도 마음 놓고 인파에 섞여들 수 있었고.
흥성대는 축제 거리의 분위기를 즐기며, 클로에는 제 나름대로의 감회에 벅차올라 가면 뒤에서 싱글거렸다.
‘이토록 자유롭게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다니!’
결혼식 퍼레이드 이후로 궁 밖에 나가 본 적이 손에 꼽으니 말이었다.
“오늘따라 네가 골라 주는 거 다 맛있어!”
동행인 추임새도 좋고.
영문은 모르겠지만 스무 살의 나날이 새로이 주어진 또 하루. 약속한 대로 미라벨과 놀러 나온 클로에는, 어젯밤 다짐했듯 후회 없이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이 기묘한 체험이 오늘로 정말 끝날 수도 있으니까.
‘어머니랑 티타임도 가지면 좋겠지만…… 그래도 만찬 시간이 있으니까.’
과일 모듬 꼬치 이후로도 클로에의 추천은 모두 적중했다. 버터구이 오징어, 물고기 슈크림 빵, 닭 꼬치를 해치우고 마지막으로 집어 든 볶은 땅콩까지 맛본 미라벨이 신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실제로 미라벨이 좋아했던 것만을 권한 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라비가 이렇게 마음껏 식탐 부리고 온몸으로 좋다고 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그 누구도 같이 가달라고, 같이 가게 해달라고도 하지 않았지만 당연한 듯이 스칸다르로 함께 건너간 미라벨은, 엄격한 궁중에 적응해 보이겠다더니 조금씩 그 발랄함을 잃어 갔다. 더 이상 클로에의 침대에 뛰어들지도, 기쁠 때 발을 동동 구르지도, 성질을 긁는 남자들에게 다짜고짜 단도를 날리지도 않게 되었다.
이를 두고 여름을 맞아 찾아온 라크루아들은 ‘성숙해졌다’라고 표현했지만, 어쨌든 봄날의 망아지처럼 한껏 날뛰는 편이 아무래도 제 젖자매다웠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5년 전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미라벨의 이 발랄함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보람 있다 생각될 만큼.
‘물론 데메트리안을 다시 본 것도……’
클로에는 오늘 아침에도 계속된 데메트리안의 기행을 떠올렸다.
전날 갑작스레 찾아왔던 게 저도 민망했는지 선물을 보낸 것이었다. ‘깜짝 선물’은 그들의 우정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어제는 악몽을 꿔서 그랬어. 어제의 무례를 사과하며. 너의 데미가.」
부득불 라크루아 영애님을 직접 뵙고 전해야만 한다며 전령이 건넨 것은 크레벨 온실의 보라색 아네모네 꽃다발이었다. 꽃팔찌에 썼다가 망가져서 속상해했던 바로 그 꽃.
연인 관계의 남성이 선물하는 꽃팔찌에 크레벨 온실의 꽃을 썼던 것은, 클로에에게 작은 보상 같은 거였다. 클로에는 그의 무엇도 독점할 수 없었으니까.
클로에는 대신 다른 많은 무의미한 것들을 바랐다. 그것은 데뷔탕트의 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청일 때도 있었고, 정혼자가 데뷔탕트를 치를 때까지 첫 춤은 저에게만 신청하라는 막무가내일 때도 있었고, 저 이외의 이에게 애칭을 허용하지 말라는 강요일 때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데메트리안은 적당히 합리적인 선에서 들어 주었다.
아네모네도 그중 하나였다. 크레벨 공작부인이 하사하신 것이라고 둘러댈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시드는 꽃이어서 부담 없는 것이었건만, 그 꽃이 그리도 빨리 망가져 버릴 줄은 몰랐다. 귀택하는 마차에서 내내 속상해서 울먹이는데 꽃은 원래 빨리 망가지는 거 몰랐느냐던 그가 어찌나 야속했는지.
클로에에겐 그 아네모네가 저들의 관계 같았다. 언젠가 시들 것, 그런데 더 빨리 상한 것.
‘……스무 살 때에는 그런 마음이었지.’
해묵은 씁쓸함이 클로에의 얼굴에 번졌다.
‘이젠 다 지난 일이지만.’
하루를 그저 즐겁게만 보내기로 해놓고 이리 울적한 감상이라니.
어젯밤의 다짐을 상기하며 생각을 털어내는 클로에의 시선 끝에, 마치 그 맘을 읽은 듯한 인영이 나타났다.
제국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훤칠한 키의 흑발의 남성, 마치 어제 본 것 같은 뒷모습.
클로에가 연상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