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2)
이 문 너머에 데메트리안이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클로에는 숨이 막혀 오는 것만 같았다.
시간을 벌겠다는 건지, 숨을 고르려는 건지. 제 목적도 모르고서 클로에는 소응접실 앞에 서서 한참을 그렇게 붙박여 있었다. 정교히 조각된 손잡이 장식도, 문에 새겨진 부조도 눈길을 끌 것도 없이 여전한 것들. 그런 것에 집중하지 않고는 혼란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지금 이게 꿈이라면 꿈인 대로 좋을 일이었다.
하지만 내내 저를 혼란케 하는 이 기묘한 생생함 때문일까, 혹시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은 아닐까 싶은 마음이 피어오르자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침을 꼴깍, 삼킨 클로에는 조심스레 응접실 문을 열었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무겁게 떨어지는 겨울 커튼 사이로 이른 아침의 햇살이 내려앉고 있는 소응접실의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교계의 많은 지인들과 시간을 보낸 공간이었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의 기억은 클로에에게도 드물었다.
그리고 그 풍경 한쪽에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다보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있었다.
목깃을 넘지 않는 그의 단정한 먹빛 머리칼. 이 연휴에도 역시나 입고 있는 제국 아카데미의 제복. 견장이 금색인 것을 보니 최고학년생.
……5년 전의 제국력 913년 초봄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시선을 창밖에 던져둔 데메트리안은 제 뒤에서 난 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미동도 없었다.
제가 언제나 올려봐야만 했을 만큼 훤칠한 키와, 그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벌어진 어깨…… 기억 속 그대로인 것들을 눈을 담는 것만으로도 숨 막힐 듯 두근거렸다.
아무리 꿈이라도, 아무리 절박하지 않았어도, 그래도 제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에 좋아했던 사람인데 떨리지 않을 리가 있나.
클로에는 마음을 다독이며 목소리를 짜냈다. 잠긴 목소리가 괴상하게 울리지만 않길 바라며.
“데미?”
바람과는 다르게 떨려 버린 목소리가 공간을 울리자마자, 데메트리안의 어깨가 움찔했다. 천천히 고개가, 발이, 어깨가 움직였다.
클로에에게는 그것이 마치 천년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얼른 얼굴을 확인하고 싶으면서도, 이대로 그가 영원히 돌아서지 않았으면 싶기도 했다.
기대감 때문일까, 두려움 때문일까.
와중에 그 또한 어쩐지 머뭇거리는 것 같다면 제 마음을 투영한 탓일까.
마침내 모로 선 그의 뒤로부터, 햇살이 매끈한 콧대며 다부진 턱선 같은 것들을 타고 흘렀다.
“……로이.”
그래서 그림자 진 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어떤 감정이 그의 얼굴에 피어오르는지, 그의 눈빛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다만 그의 목소리는 클로에와 마찬가지로 목 졸린 듯 떨렸다.
어쩌면 슬픈 표정인 듯도 했고, 어쩌면 눈가에 뭔가 반짝이는 듯도 했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잘 지냈지?”
“응, 데미도 바빴지? ……그동안?”
탁자를 사이에 둔 채 마주 앉은 데메트리안의 얼굴을, 클로에는 오랜만에 쥐는 라크루아의 찻잔 너머로 살폈다.
그의 얼굴은 제가 기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건 데미가 스물셋일 때의 모습일 테니까…… 마지막으로 본 게 스물다섯일 때였고.’
데메트리안을 알고서 이토록 오래 보지 못한 적이 있었을까. 클로에는 맞은편의 그 반가운 얼굴을 뜯어보며 이보다 조금 거칠해졌을 수도, 눈빛이 조금 더 깊어졌을 수도, 턱선이 더 도드라졌을 수도 있는 그의 스물여덟을 상상했다. 제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의 그를.
보고 싶었어.
데메트리안을 처음 마주했던 바로 그 순간에도 내뱉을 뻔했던 그 말을, 클로에는 다시 한번 입안에서 굴렸다.
이것이 꿈이라면 하고 싶은 말, 마음에 삼켰던 말을 다 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 혹시라도 조심해야 하는 걸까?
‘이토록 생생한데 정말 꿈일까…….’
그러면서 말을 고르다 보니 마음속에 울렁이던 말들은, 결국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었다. 언제나처럼.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데메트리안은, 그 역시도 클로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함께 차를 마실 때면 그는 늘 갓 우려낸 차를 곧바로 음미하곤 했는데, 클로에가 떨리는 손길로 차를 낸 지 한참이 지나도록 그의 손은 꼬아 둔 무릎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꿈이어서 그도 저답지 않게 구는 걸까.
‘처음 봤을 때도…… 낯설었지.’
뒤늦게 피어오르는 어색함을 곱씹으며, 클로에는 찻잔에 입을 묻었다.
데메트리안은 그제야 다과의 존재를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슬그머니 손을 뻗어 찻잔을 쥐었다. 손잡이 끝을 가볍게 쥐는 그의 곧고 단단한 손가락.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클로에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때, 클로에가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데메트리안은 돌아서고도 한참을 그렇게 창가에 서 있었다.
여전히 그림자에 잠겨 있어서 명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클로에를 꼼꼼하게 살피는 시선은 왠지 뜨거운 듯도 했다. 정작 클로에는 역시 넘실대는 제 마음을 추스르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한달음에 성큼 다가온 데메트리안은 손을 들어 올렸다가, 머뭇거리듯 내리는 듯하더니 그대로 굳었다. 다가오나 싶었던 손길은 클로에의 얼굴과 어깨 근처에서 방황했고, 굳어졌던 입술은 달싹이며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낯선 기색. 그가 무엇에라도 이리 조심스러워 하는 사람이었을까. 그는 기실 무엇에 대해서건 늘 오만해 보일 정도로 여유로운 사람이었는데.
‘역시 꿈이어서일까.’
클로에는 요동치는 이 마음의 너울을 내색하지 않을 줄 아는 귀족 영애였고, 데메트리안은 그런 클로에를 무엇을 가늠이라도 하는 것처럼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닌 척하다가도 결국 클로에에게로 돌아가고 마는 진득한 시선은 분명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인데, 클로에는 저의 혼란을 감추느라 바빠 이를 짐작도 못했다.
서로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서는 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 때였을까.
“……입궁할 시간이네.”
별로 입에 대지도 않은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데메트리안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다소 음울한 기색이 돌았다. 응접실 한 구석에 자리한 괘종시계를 흘끗 쳐다본 클로에는, 이맘때 제 오라비가 출근하던 시간을 떠올렸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배웅은 됐어.”
데메트리안은 클로에가 따라 일어나려는 것을 손을 들어 사양해 보였다. 그 낯에는 혼란스러운 기미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반가운 마음과 별개로 역시 혼란스러웠던 클로에는, 그가 일찍 자리를 뜨는 것이 내심 잘되었다 싶기도 했다.
“다음에 보자.”
“……그래, 다음에.”
다음이 있다면 말이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클로에는 그리 생각했다.
* * *
클로에는 그 길로 방에 틀어박혔다. 시내에 나갈 줄 알고 들뜬 미라벨이 방까지 찾아왔지만, 막 합법적으로 음주를 즐기기 시작한 젊은이들에게는 숙취가 굉장히 유용한 핑곗거리였다.
“대신 내일 들어오는 길에 마르코네 들러야 해?”
“그래 그래. 미안해, 라비.”
미라벨과 노는 것도 끌렸지만, 이런 심란한 마음으론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이 꿈이라는 것만 확실하다면 꿈에서나마 그리운 시절에 한바탕 노는 셈 치고 미라벨과 시간을 보내겠지만…… 너무도 생생한 이 상황을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보니, 마음 편히 즐거워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일단 최선을 다해 벗어나 볼까.’
꿈에서 깨고 싶다기보다, 확인하고 싶었다. 저를 속절없이 5년 전의 어리숙한 감정으로 끌어들인 이 상황이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말이다. 할 수 있었던 건 잠들어 보기밖에 없었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30분가량 뒤척였지만 실패.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것일까, 하녀들이 가져다 둔 토마토 수프로 적당히 배를 채운 뒤 또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면서 정말로 몇십 분쯤은 잠에 들었던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떴을 때 클로에는 여전히 고티유의 타운하우스 제 방 안이었다.
아, 진짜…….
점심식사 거리가 담긴 트롤리를 밀고 들어오는 소녀의 모습에 클로에는 낯을 밝혔다.
“도대체 어제 얼마나 드신 거예요? 들어오실 땐 멀쩡하셨는데.”
클로에의 전담 하녀, 폼폼. 아침에 보긴 했지만 제대로 다시 보니 또 반가웠다.
10대에 접어들 무렵부터 함께했던 폼폼과는 스칸다르로 떠나면서 헤어졌더랬다. 폼폼뿐 아니라 다른 하녀들 모두 먼 북방 타국에까지 데려갈 수가 없었기에, 이따금 함께 자란 그녀들이 그리웠었는데.
“오늘 하루 종일 멍하신 것 같아요.”
은근하게 물어오는 그녀의 낯에서 제 아가씨에 대한 걱정이 묻어났다.
‘모든 것이 오랜만이라서 그렇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간단한 티푸드로 차려 나온 식사에 곁들여진 차에서는 그리운 내음이 났다. 아침에 데메트리안과 있을 때에도 같은 것이 나왔지만, 그땐 울렁이는 마음을 추스르느라 제대로 즐기지 못했는데. 이 중상등품의 실키웨이는 제 귀비가 모든 것을 최상품으로만 누리길 바랐던 부군 덕에, 이 시절에 매일같이 마시던 것을 지난 3년간 접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제 안부를 살펴 주는 폼폼의 손길은 또 어떻고.
모든 것이 오랜만이어서 어색하고, 또 익숙해서 반가운 느낌. 클로에의 입가가 살풋 호선을 띠었다.
“그러게. 머리가 좀 무겁네.”
“아유, 대축일 주간인데 구경도 못 나가시고 이게 뭐예요.”
“너는 나갔다 와. 안 찾을게.”
“아, 아가씨, 그런 의미가 아닌 거 아시면서…….”
말은 그렇게 해도 헤벌쭉 웃는 폼폼의 해맑은 낯을 보며, 클로에는 가 봐도 좋다고 웃어 보였다. 하녀장을 찾으러 가는 듯 우당탕탕 뛰어가는 폼폼의 발소리. 이 활기참은 또 얼마 만인지.
스칸다르의 우등한 시녀들은 모시는 분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말 또한 먼저 꺼내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는 폼폼은, 라크루아의 사용인들은 다 이랬다. 오랜만에 느끼는 나고 자란 곳의 공기…….
‘그래, 모든 것이 다 기억 그대로야.’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그 어느 한순간도 ‘아, 역시 꿈이구나’ 싶은 적이 없었다. 기억과 다른 것이라곤 이날 이 시간에 미라벨과 시내에 나가는 대신 방에 틀어박혀 있는 저밖에 없었다.
‘……아니, 데메트리안도 달랐지.’
이때의 데메트리안은 아카데미를 조기 수료한 뒤 졸업까지 1년을 남겨 두고서, 아버지인 크레벨 공작의 보좌관으로서 매일같이 입궁하고 있었다. 연휴인 대축일 주간에도 마찬가지. 평생을 후계자로 자라 온 그의 사전에 여가란 없었다.
그런 데메트리안이 새벽과도 같은 시간에, 연통도 없이 찾아왔고,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닌지 차나 조금 홀짝이다 갔다.
그들 사이에 그리도 오랜 침묵이 흘렀던 때가 있었을까.
응접실을 배경으로 한 그와의 추억이라곤 오로지 나눠 읽은 책을 갖고 토론하는 둘만의 독서 모임 때뿐인데. 그때의 데메트리안의 모습이란 대부분 ‘생각이야 그렇게 해볼 수 있겠지,’ ‘참신함으로는 좋은 의견이야’ 따위의 말을 내뱉으며 여유 만만한 미소를 입에 건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 마주했던 데메트리안의 굳어진 얼굴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초조한 듯, 말을 꺼낼 듯 말 듯한 그런 표정.
……그런 걸 생각하면 클로에는 이게 정말 꿈이구나 싶어지는 것이었다.
‘얼른 깨야지. 더 미련이 들기 전에. 그러려면 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