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1)
‘또, 그때의 꿈.’
꿈과 현실의 그 어슴푸레한 경계. 제가 잠에서 깨어난 것을 깨달은 클로에는 자조했다.
‘괜히 마음만 싱숭생숭하게.’
스칸다르에 오고서도 데메트리안을 마지막으로 만난 날의 일들은 몇 번이고 꿈속에서 반복되었다.
어느 때보다 무거운 감정의 실타래가 두 사람을 내리눌렀던 데메트리안의 집무실, 그 낱낱의 풍경들. 마지막으로 맛본 원로원 비품 찻잎, 저는 먹지도 않으면서 클로에가 들를 때를 위해 갖다 둔 시내 유명 제과점 비스킷 같은 것들…….
그의 얼굴에 그토록 고통스러운 감정이 흐르는 것을 본 적이 있었을까. 결국 그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하나마나 한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씹어서 말했다.
‘편지 자주 할게. 스칸다르에 사절로 파견될 일이 있으면 꼭 자원할게.’
그게,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스칸다르의 젊은 왕이 아르투젠의 황궁에서 독립 협약서에 조인했고, 그 길로 클로에는 스칸다르로 넘어왔다. 다시 두 달 뒤 국혼.
시간은 쏜살같았고, 그리움은 어떻게든 무뎌졌다.
자신을 늘 정중하게 대해 주는 스칸다르의 젊은 왕과 풍요로웠던 별궁 생활 덕분이리라. 폐쇄적인 스칸다르의 왕실은 제국 출신 비에게 정실 자리를 내주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의무가 적어 매일이 큰 굴곡 없이 흘러갔다.
그렇게 제국을 떠나온 것이 3년. 아르투젠 사교계의 그리운 이들에게서 변변한 연통 하나 없었음에도, 정실 자리는 채우지 않을 거라 약조해 주는 다정한 부군이 있어 헛헛하지 않았다. 그는 공공연히 클로에를 귀비라 일컬었고, 제 귀비가 모든 것을 최고로만 누리길 바랐던 덕에 셰비크의 별궁에는 각지의 진귀한 것들이 몰려들었다.
무엇보다 해마다 여름이면 스칸다르의 수도를 피서지로 새로이 정한 어머니가 외로운 딸을 방문하곤 했다.
‘오늘 국경 포털 통과하신댔으니 내일이면 셰비크에 도착하시겠네.’
그렇게, 어머니가 세 번째로 스칸다르 땅을 밟게 된 어느 여름날이었다.
‘오전에는 손님 방 커튼이 도착할 거니 확인해 보고, 오후엔 시녀장과 시녀들 배치를 확정하기로 했지. 시종장도 환영 연회에 대해 의논하러 오기로 했고. 간만에 바쁘겠어.’
감은 눈을 찔러 오는 햇살에 잠에서 깨어난 클로에는 그렇게 오늘의 일정을 헤아렸다.
―라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햇살에 잠이 깼다고?’
북방에 위치한 스칸다르의 여름은 서늘했지만 햇살이 좀 더 날카로웠다. 그래서 아침에 햇살이 들지 않도록 동쪽에는 창이 나 있지 않은데.
해가 중천이 되도록 시녀들이 깨우지 않은 것인지, 아니, 애초에 이렇게 늦잠을 잘 만큼 제가 피곤하기나 했는지.
그런 생각을 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린 클로에의 눈앞에, 너무나도 그리운 정경이 한가득 펼쳐졌다.
주신 에르드의 여덟 사도들이 아기 천사의 형상으로 그려진 천장화. 이른 아침에 기울어진 햇살이 들어올 때면, 클로에의 수호 사도인 미의식과 전쟁의 베람이 밝게 빛나곤 했다.
그러니까, 스칸다르로 오기 전 20여 년을 지낸 방의 풍경이 그랬다는 말이다.
‘어머니 오신다고 별 꿈을 다 꾸네.’
그 풍경을 눈에 담은 클로에는 간명하게 결론을 내렸다.
스칸다르로 건너오고서 한 번을 다시 가 보지 못한 고향집, 아르투젠의 제도 고티유의 라크루아 궁정백저. 형제들과 뛰놀고 친한 영애들과 다과회를 열던 타운하우스.
교제까진 않았지만 서로 관심을 가질 뻔했던 몇몇 영식들이 드나들었던 소응접실, 예법과 교양을 배우던 공부방, 체력 단련을 하던 뒷마당 연무장……. 그 모든 공간들과 그곳에서의 추억들이 대번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추억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얼굴은……
자연스레 이어지는 생각의 꼬리에 클로에는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사절로 오기는 개뿔, 편지도 않는 주제에.’
어린 정혼자께서 이제 사교계에 데뷔도 하셨을 텐데, 약혼 소식조차 들려주지 않는 고국의 첫사랑 오빠 얼굴은 세월이 흘러도 어찌 희미해지지 않는 것인지.
결혼 전의 파릇파릇한 연심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어야만 하는 것을 아는 일국의 제2왕비는, 그리운 풍경에서 바로 벗어나기로 했다.
눈 떠 보니 여전히 꿈속이었다면, 다시 한번 잠들면 되는 거랬다.
햇살을 덮으려고 이불을 끌어올리자니, 손목에 달린 꽃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보라색 아네모네를 메인으로 작은 장미와 스위트피가 자잘하게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맞아, 고티유에선 장미가 일찍도 폈었지.’
대축일 주간 첫날에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하는 미혼의 영애들은 새 봄의 축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꼭 이런 꽃팔찌를 끼곤 했다. 다시금 훅 끼쳐 오는 그리운 느낌.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런 리본을 썼던 것 같기도……
까무룩 잠들었을 때쯤이었을까.
“로이이! 우리 시내 안 가?”
귀를 찔러 오는 발랄한 목소리에 클로에는 또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매일이고 듣는 젖자매 미라벨의 목소리지만 뭔가 낯설었다.
‘뭔가 목소리가 조금 더 높은 톤이고, ‘비전하’라 부르지도 않고…….‘
그래, 격의가 없다.
아르투젠을 함께 떠나 와 시녀로서 여전히 곁을 지키는 미라벨은, 시녀장과의 기 싸움에서 호되게 당한 뒤 그깟 궁정 예법 못 익힐쏘냐며 서운할 정도로 깍듯이 말하곤 했는데 말이다.
털썩. 이불 위로 더해지는 일인분의 무게가 웬일인가 싶다. 단둘이 있을 땐 편하게 하자 해도 못 그러던 애가.
“왜 이래, 다른 시녀들 없어?”
그 반가움에 비전하의 기품이고 뭐고 이불을 휙 쳐내니, 여전히 유년 시절을 함께한 천장화가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쏙 튀어나오는 미라벨의 얼굴.
미라벨인데, 어젯밤에 본 미라벨이랑은 뭔가 좀 달랐다. 볼이 좀 더 통통하고 눈가가 더 밝달까. 스칸다르 궁정의 여느 시녀들처럼 모자 속에 머리를 틀어넣어 볼 수 없었던 보랏빛 머리칼이 정수리쯤에서 하나로 땋여 대롱거리고 있었다.
‘아까 꾸던 꿈에서 아직 안 깬 건가?’
고티유의 타운하우스에서 함께하던 미라벨의 모습 꼭 그대로다.
다시 잠들려나 싶어 초점을 흐려 보았지만, 오히려 정신은 점차 명료해져만 갔다.
‘꿈속에서 잠이 달아난 느낌도 드나…….’
이상하다 싶어서 몸을 일으켜 보려는데, 왠지 모르게 머리가 아파 온다. 이 꿈 참 공감각적이네.
끙, 목을 울리며 이마를 짚자니 여전히 시선 끝에 걸리는 꽃팔찌.
“무슨 소리야? 우리 아가씨, 어제 그리 홀짝대시더만 술이 덜 깨셨어?”
“술?”
“어제 축제주 맛있다고 그렇게 마시더니 귀택해서 또 백작님 컬렉션 또 슬쩍하고.”
“……축제주?”
미라벨이 짚어 주는 술 이야기를 들으니 콧가며 목구멍에서 어른거리는 감각이 있었다.
황실 주최 연회에서만 풀리는 황실 양조장의 로제 스파클링 와인, 그 은은하고 쿰쿰한 향과 따끔거리지 않을 정도의 탄산. 축성을 받아 잔 안에서 탄산이 무지개 빛으로 아롱지는 것이 예쁘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자꾸 마셨던 것 같다.
그러니까 성년이 되고 처음으로 참석했던 대축일 주간 무도회에서 말이다.
그러고서 다시는 예쁜 술에 속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분명 5년 전인데…… 꿀꺽, 왠지 그 목 넘김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새 와인은 안 건드렸더라.”
“혹시 893년산 무앙……?”
긴가민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콧등에 잔주름을 잔뜩 잡으며 미라벨이 까르륵 웃는다.
“와중에 기억은 기똥찬 거 봐?”
그러니까, 저와 빈티지가 같다며 뭘 꺼냈던 기억이 두서없이 떠오르는 것인데……
아, 전날의 숙취가 골을 울리고 있는 이 아침은 분명 5년 전인 제국력 913년 봄, 대축일 주간 무도회 다음날인 것이다.
두통 때문에 와글거리는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분명 스무 살 때의 꿈인 것 같은데, 너무 생생하고 현실적이었다. 구체적이게도 과거의 어느 날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꽃팔찌의 중심을 장식하고 있는 보라색 아네모네는 크레벨 공작저의 온실에서 꺾어 온 것이었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꽃잎 몇 장이 뜯어져서……
이마를 짚은 손을 천천히 살피니 정말, 클로에가 기억하는 그대로 아네모네 꽃잎이 두어 장 뜯겨 있었다.
클로에가 그러는 양을 바라보던 미라벨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만 좀 아까워해. 크레벨 온실에 널린 게 꽃인데…… 아, 그래서 온 건가? 네가 어제 하도 칭얼거려서.”
“오다니?”
“아니, 데미 도련님이 왜 온 거야? 나랑 시내 나가기로 했잖아.”
“데미가?”
깜짝 놀란 마음에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이 생생한 꿈에 대한 의문과 새로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들에 지끈대던 머리가, 새벽의 고향집과 어울리지 않는 그 이름 하나에 한순간에 가라앉는 것 같았다.
데미, 데메트리안. 스칸다르의 궁중에서 문득 외로움에 사무칠 때면 가족들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보고 싶었던 이. 3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 가볍게 인사한 것이 결국 작별 인사가 되고 말았던, 이 꿈의 첫 자락에서부터 습관적으로 떠올리던 그 얼굴……
클로에는 제 손목을 감싸고 있는 꽃팔찌를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데미가 여기 와 있다고……?’
혼란에 빠진 클로에를 뒤로 한 채 미라벨은 설렁줄을 잡아당겨 치장을 도울 하녀들을 불렀다. 그러고서 옷장에서 꺼내 든 엷은 금빛이 감도는 실내용 드레스. 열아홉 살의 가을에 새로 맞춘 거였다.
“어제 네가 오라 한 거 아냐? 이 새벽에 와서 다들 얼마나 놀랐는데.”
그러니까, 그 그리운 이가 지금 저를 만나러 와 있다는 것이었다.
클로에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슬며시 눌렀다. 어쩌면, 어쩌면 그동안 눌러 두었던 마음이, 고향집을 배경으로 한 꿈에서나마 죄책감 없이 터져 나오는 것일까.
“정신 좀 차려 보시죠, 아가씨. 아니면 이거 입을래?”
클로에의 멍한 얼굴을 숙취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는지, 미라벨이 콧등을 찡긋거리며 다른 드레스를 흔들었다. 그 진주빛 실내용 드레스는 스무 살 여름휴가로 간 라쥐르령에서 그곳 하녀들의 실수로 눌어서 버릴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시점으로부터 석 달은 뒤에 말이다.
하녀들의 손길에 저를 내맡겨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다듬는 동안, 클로에는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맹렬히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5년 전 4월이고, 셰비크의 별궁에서 잠들고 일어났더니 이 상황인 거니까 꿈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데……’
그런데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슬며시 제 손등을 꼬집어 보았지만, 역시나 아프다.
‘진짜 현실인 거야, 뭐야.’
미라벨이 격의 없이 저를 대하는 이 아침이, 데메트리안을 세 해 만에 볼 수 있게 된 이 상황이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게 꿈이라면, 또다시 잠들면 깰까? 아까 실패하긴 했지만. ……일단 데미만 만나고 다시 생각해 볼까? 아니, 그런데……’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5년 전 이날에 데메트리안이 저를 방문했던 기억이 없었다. 오랜만에 보게 된 데 대한 설렘과 별개로 의아한 일이었다. 기억력과 암기력만은 아카데미의 수재 데메트리안도, 부전자전의 행정가 꿈나무인 오빠 에티엔도 능가하는 클로에라 헷갈릴 것도 아니었는데.
‘역시 꿈인가.’
그래서 아르투젠을 떠나고 3년이 다 되도록 소식조차 없던 그를 만날 수 있는 것인가.
설령 그렇더라도 이토록 생생하니 설레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클로에는 하녀들의 단장이 끝나기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얼른 그를 만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