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이 좋았다. 아마도, 그 역시도 그녀를……
“데미!”
“어머, 라크루아 영애.”
“단짝께서 오셨으니 저희는 빠져 드려야겠어요.”
클로에가 데메트리안과 그녀가 서로에게만 허락한 애칭을 부르며 다가올 때면, 사교계의 유명인사 크레벨 소공작 주변에 몰려들어 있던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리를 피해 주었다.
클로에는 그런 순간을 좋아했다. 화려하게 꾸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데메트리안이,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볼 때.
단정하게 꾸며 두었던 얼굴이 깨어지고 깔끔히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칼 아래로 푸른 눈동자가 저만 아는 기색을 담아 제게로 향할 때면, 클로에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악단의 음악도,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의 조명도,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모두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은 그 순간.
“또 많이 마셨어?”
“헤헤.”
“너 있는 연회 올 때엔 마부더러 아예 궁정백저에서 대기하라고 해야겠어.”
비꼬듯 말하는 데메트리안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저만이 그를 이렇게 웃게 할 수 있다. 클로에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저 두 분은 정말 친밀하기도 하시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붙어 다니시더니, 라크루아 소궁정백보다 크레벨 소공작이 더 친오라비 같아 보이기도 해요.”
“크레벨 소공작의 첫 춤을 독점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두 분이 워낙에 잘 어울리시니 샘도 안 나지만요.”
“말씀 조심하세요, 아무래도 소공작은……”
“그렇죠, 두 분은…… 크레벨 공작께서 캄포 대공과 맹세하신 일인데.”
그들에게 호감을 가진 사교계의 인사들이 걱정을 담아 어떤 이야기를 입에 담을지라도.
클로에를 라크루아의 마차에 먼저 올려 태우고서, 데메트리안은 날랜 몸짓으로 익숙한 듯 클로에의 옆자리에 들어앉았다.
클로에는 사교계 연회에 참석할 때면, 늘 이 순간을 설레며 기다리곤 했다.
그녀가 사교계에 데뷔한 이래로 데메트리안은 모든 첫 춤을 그녀에게만 신청했고, 사교계의 인사들은 그들의 우정을 곡해하지 않아 주었다. 그리고 연회의 마지막에 클로에가 분위기와 풍미 좋은 와인에 취하고 나면, 꼭 데메트리안이 바래다주었고.
기억이라는 게 시작되었을 때부터 클로에는 이미 데메트리안을 좋아하고 있었다.
제국의 다섯 공작가 중 하나인 크레벨 공작가의 후계자, 제국 아카데미 시절에나 지금의 사교계에서나 인기를 잃어 본 적 없는 유명인사, 원로원 의장인 크레벨 공작의 보좌관이 되고서 탄탄대로를 달리기 시작한 전도유망한 청년 관료.
그에게는 수많은 꼬리표가 있었지만, 클로에가 좋아하는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크레벨 공작저의 미로 같은 정원을 쏘다닐 때면 꼭 잡고 놓지 않던 손, 크레벨 온실의 다양한 꽃들의 꽃말을 알려주던 일곱 살배기의 짐짓 어른스런 얼굴, 또래의 그 누구보다 뛰어난 그가 제 이야기만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것처럼 듣는 표정.
남들에게는 비치지 않는 소년처럼 짓궂은 미소나 저와 정치나 고전을 논할 때의 다소 냉소적인 말투 같은, 근 20년간 저만 알고 있는 것들까지.
“왜 이기지도 못할 술을 연회 때마다 그리 홀짝이는 거야?”
“그야……”
그래야 네가 바래다줄 수 있으니까. 그런 말을 입속으로 삼킨 클로에는 배시시 웃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양 볼, 꾸밈없이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클로에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던 데메트리안의 입술이 삐딱한 호선을 그렸다.
“어떨 땐 네 오빠가 에티엔이 아니라 나인 것 같다니까.”
“그런 끔찍한 소린 하지도 마.”
푸우, 클로에의 도톰한 입술이 빼죽 튀어나왔다.
귤빛 머리칼에 고정된 머리 장식을 대충 빼어든 클로에가 차창에 기대더니, 말발굽의 리듬에 맞춰 끄덕거리다가 설핏 잠에 빠져들었다. 위태롭게 꾸벅이던 머리통은 여느 때처럼 곧 데메트리안의 어깨로 옮겨졌다.
그의 시선은 무심한 듯 창밖 밤하늘로 가라앉았지만, 그의 마음은 세상에 서로만이 존재하는 듯한 그 평온하고도 간질간질한 공기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톡톡, 라크루아의 타운하우스가 저 멀리 나타나면 동그란 이마를 손톱으로 두드리는 데메트리안의 손짓, 아쉬운 듯이 끔벅이는 클로에의 눈동자, 애정을 알기 쉽게 감춰둔 채 비아냥대는 말소리. 모든 것들이 그 고즈넉한 설렘 속의 일이었다.
“라크루아의 비싼 상품에는 설명서가 꼭 동봉돼야겠어. 와인 한 병 이상 마시면 어디서든 잠든다고.”
“캄포에 예약된 상품에는 말을 너무 밉살스레 한대도 반품 불가라고 써 붙일 거야.”
서로를 정략혼 시장의 혈통 좋은 상품에 비유하는, 여느 때와 같은 농담들까지.
“예에, 그러시죠. 귀택하실 시간입니다, 아가씨.”
언제나처럼 제가 먼저 내리고 난 뒤 클로에를 향해 내뻗는 손. 그 너머에는 소년 시절의 것이 그대로인 미소, 이 안정적인 우정에 대한 확신, 어떤 다른 종류의 열기 같은 게 뒤범벅된 눈빛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뜨거운 손을 쥐고 장난스레 폴짝 뛰어내리면, 그가 맞잡은 손에 꾸욱 힘을 주어 비틀거리지 않도록 단단히 지지해 주는 것이었다.
달빛이 어스름히 비치는 현관 앞.
마차가 마구간으로 향하고 클로에의 호위가 대신 타고 온 크레벨의 마차가 정문에 다다르면, 모든 건 현실로 돌아오고 만다.
“조심히 들어가.”
“잘 자.”
“응, 너도.”
맞잡은 손이 풀리고도 장난스레 손끝을 스치는 클로에의 낯에, 데메트리안은 어린아이 어르듯 살포시 미간을 찌푸려 보이고는 돌아섰다.
이 밤에도 흐트러짐 없는 연미복 차림새, 아쉬우리만치 성큼성큼 걸어가는 곧은 걸음걸이, 그의 성정만큼이나 딱딱하고 냉정해 보이는 크레벨의 육중한 검정색 마차.
여기까지다. 이제는 밤 요정이 부린 마법에서 깨어날 때.
사실은 별로 취하지도, 피곤하지도 않았던 클로에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뒤돌아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응, 부모님께서 아직 깨어 계시는 거야?”
시중들러 나온 하녀들에게 머리 장식과 장갑을 건네주면서, 클로에는 아직도 불이 훤하게 켜져 있는 응접실을 일별했다. 재작년에 사교계에 데뷔한 클로에가 다양한 연회에 불려 다니느라 자정이 다 되어 귀택하면, 부모님은 이미 주무시는 중이곤 했던 것인데.
“예,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를?”
집사의 송구스러운 낯을 지어 보였지만, 클로에는 깊이 생각지 않고 응접실로 들어섰다.
“어머니, 아버지, 둘째 왔어요!”
그래 왔니, 오늘도 즐거웠니, 아이고 우리 주당 보시게나, 그런 대꾸 하나 없이 라크루아 궁정백 부부는 음울한 낯을 짓고 있었다. 연회에서 먼저 돌아와 있던 오빠 에티엔도, 이런 때면 누나가 방탕하다며 대경실색하는 척했을 남동생 아쉴도 말이 없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않는 분위기에 아까 집사의 송구한 낯이 겹쳐졌다.
“로이, 얘야.”
아버지, 라크루아 궁정백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게…… 정략혼 제안이 들어왔구나.”
구국의 영웅이라 했다.
제국 아르투젠이 잃어버렸던 국보를 그 제후국인 스칸다르 왕실에서 찾았고, 이를 송환하는 대가로 천문학적인 보상금이 거론되었다. 이를 탕감할 수 있는 건 스칸다르의 온전한 독립뿐.
아르투젠은 천 년의 제후국을 막무가내로 놓아 줄 수 없었고, 스칸다르는 온전한 독립을 보장받기를 원했다. 그 담보는 아주 편리하게도 정략혼이 되었다.
다만 황실에는 황녀가 없었고, 공작가의 영애들의 경우 이미 결혼을 했거나 나이가 맞지 않았다. 후작가에서 후보를 물색하자니 스칸다르에 명분이 안 서는 것은 둘째치고, 그들은 모두 반독립파거나 반황실파거나 이를 빌미로 무슨 한몫 잡으려는 것 같다거나…… 아무튼 저마다 안 될 사유가 있었다.
해서, 대대로 황실을 가장 가까이서 섬겨 온 궁정백 가문의 영애에게 그 고배가 돌려진 것이다. 말이 백작이지 웬만한 공작가의 권세를 누리는 게 제도 행정의 총괄, 궁정백이니까.
가족이나 다름없다는 허울 좋은 말로 궁정백가의 영애는 순식간에 준황녀의 지위를 얻었다.
데메트리안은 그날로부터 단 한순간도 이 낯선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정말로 올 줄은 몰랐다.
그는 황궁 소년 병사단에 들어가기 위해, 제국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하기 위해, 매해 수석을 거머쥐어 크레벨 공작가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조기 수료를 해서 더 빨리 원로원에 입성하기 위해, 그리고 이제는 내무부 입성을 목표로 늘, 크레벨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달리고 있었다.
이 여정에는 클로에를 잃는 것에 대해 생각할 여유란 주어지지 않았다. 우정이라 이름 붙인 특별한 마음을 주고받는 그녀를.
‘로이에게 정혼자라도 있었다면…… 아니, 로이가 늘 나와만 붙어 다니는데 누가 섣불리 구혼장을 넣겠어. 그러니까 내게 정혼자가 없었다면……’
그리고 이 낯선 감정이 ‘후회’임을 알았을 때, 데메트리안은 깜짝 놀랐다.
무언가를 계획하고 그대로 성취하는 것이 그의 본분이었지, 후회는 그의 인생에 존재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데메트리안은 그토록 갑작스레 클로에와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사실을 이 정도로 절망적으로 받아들이는 저 자신에게 한 번 더 놀랐다.
데메트리안도 클로에가 좋았다. 어쩌면 제가 더……
어머니가 다과회를 열어 귀부인들이 공작저로 몰려드는 날이면, 가정교사가 내준 숙제를 하다가도 제 근처서 기웃대는 왕방울만 한 초록색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었다. 제 손을 꾸욱 잡은 그 애가 “집에 가기 싫어! 데미랑 결혼할래!”라고 말할 때에는, 어른들이 애매하게 웃는 이유를 알면서도 그 귤빛 머리칼을 쓰다듬게 되었다.
결혼이라.
제 아버지, 크레벨 공작이 어려서부터 절친했다던 캄포의 대공과 자식들끼리 혼인시키자고 신전에서 맹세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게 크레벨 후계자의 사명이었으니까. 하지만 캄포에는 또래의 사내아이만 있었던지라 와닿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결국 캄포 대공가에 늦둥이 딸이 태어났고, 클로에의 막무가내에 어른들은 “데메트리안은 나중에 캄포의 공녀님이랑 결혼해야 해”라며 구체적으로 대꾸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클로에는 여전히 떼를 썼고 데메트리안은 늘 그 머리통을 쓰다듬었지만, 언젠가부터 한마디를 더 얹게 되었다.
“아쉽지만 다음에 또 놀자.”
아쉽지만, 아쉽지만……
이성만으로 후계자로의 길을 착실히 살아온 데메트리안은 저를 괴롭게 하는 이 낯선 감정을 다룰 줄 몰랐다.
한 달 만에 보는 클로에는 한층 더 아름답고 한층 더 가냘파져 있었다. 그들이 이토록 오래 만나지 못한 적이 있었을까. 그간 황궁을 오가며 황실 전통 신부수업을 받은 클로에는 어딘가 지친 기색이었다.
이 계절이면 저와 승마를 즐기며 초여름의 볕 아래서 건강하게 그을렸을 그 피부는 백옥 같았고, 저와 다과를 즐길 때 오물대던 그 볼은 한껏 갸름해져 있었다.
그런 클로에를 보면서 데메트리안은 제 낯선 감정을 진정시키는 것 외에는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숨겨 둔 정인이 있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아르투젠을 떠나고 싶지 않은 건 알겠지만 말이야.”
클로에는 제가 데메트리안을 좋아해 온 시간만큼, 그를 독점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언젠가는 멀어져야 한다는 것 또한…… 하지만 그게 이런 식일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클로에는 스칸다르의 젊은 왕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고, 또 스칸다르는 너무 너무 멀었으니까. 누군가를 평생 보지 못할 수 있을 만큼.
“그래도, 애인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속전속결이진 않았을 거 아냐. 미리 정해뒀던 것처럼 뭐야, 이게.”
“웬만한 급의 영식으로는 안 될걸.”
“그러니까 말인데……”
그래서 이런 때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데메트리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그랬다.
데메트리안은 언젠가 캄포 대공녀와, 그리고 자신은 더 멋진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해로하리라 믿어 온 세월이 스무 해였다. 그건 이 배타적 우정의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하지만, 크레벨 공작이 그 언약만 하지 않았었어도, 어쩌면……
클로에는 뒤따르는 생각들 중 어느 것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숨길 수밖에 없는 열망을 담아 클로에의 녹색 눈이 서글프게 빛났다.
데메트리안은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말줄임표에 숨은 뜻을 전혀 몰랐다면 갑작스레 찾아온 그녀를 맞이하러 뛰어나가는 가슴이 그토록 사무치게 떨리지도, 스칸다르에 가기 싫다 말하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속절없이 애타지도, 기울어 가는 오후의 햇볕이 안타깝지도 않았으리라.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나 소식을 듣는 정혼 상대보다야, 어린 시절로부터 단 하루도 신경 쓰지 않은 날이 없는 클로에에게 그는 제 마음의 가장 확실하고도 큰 부분을 내어 주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을 일은 지금껏 없었지만.
그럼에도 데메트리안은 대답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미 모든 게 늦어 있었으니까.
오랜 침묵 끝에 결국 그가 짜낸 말이라곤 이런 것이었다.
“몇 년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야…….”
클로에가 데메트리안을 만난 마지막 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