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5화
예고도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윈터가 흠칫 놀랐다.
“너, 너 뭐야!”
“문단속은 여전히 안 하네요.”
“거기로 들어오는 인간은 어차피 너밖에 없거든?”
“아닌 것 같던데.”
가볍게 발코니를 넘어 들어온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오늘 손님이 많았다면서요?”
“……그랬지.”
순순히 인정하는 목소리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엉망인 방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다가온 메이딜리언은 흐트러진 윈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중얼거렸다.
“뭐 그렇게 급해서 다들 모이셨던 걸까.”
이마를 간질이는 손길이 익숙해서 자기도 모르게 몸을 맡기던 윈터가 순간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메이딜리언의 손을 탁, 소리가 나게 쳐 냈다.
“치워.”
“윈터.”
“여긴 왜 왔어?”
메이딜리언은 반사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안에서 반지가 달그락거렸다.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려 입을 여는데 윈터가 더 빨랐다.
“온종일 소식도 없더니.”
말해 놓고 윈터도 아차 싶었는지 혀를 깨물었다.
이래서야 꼭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 같지 않은가.
가볍게 한발 물러선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오늘 왜 안 왔어요?”
“……바빴잖아.”
“나 만나는 것보다 그 새끼들 보는 게 더 좋았어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너야말로 드디어 나랑 얘기할 결심이 섰나 봐?”
두 사람 다 그동안 쌓인 서운함 때문에 말이 뾰족하게 나갔다.
시선도 제대로 마주하지 않은 상태였다.
메이딜리언은 이대로 가다가는 오늘 마음먹은 일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푹 한숨을 내쉰 그가 대답했다.
“그건, 사정이 있었어요.”
“무슨 사정.”
“당신한테 주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주고 싶은 거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윈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아함이 가득한 눈동자를 마주한 메이딜리언이 이마를 짚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들 때문에 자괴감이 들었다.
“하아, 이런 식으로 하려던 게 아닌데.”
“뭐야. 대체 뭔데 그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윈터가 덥석 메이딜리언의 팔을 잡아챘다.
그가 제게 저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게 무척 낯설면서도 걱정스러웠다.
“약속을 지키려고 그랬어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메이딜리언이 중얼거렸다.
“당신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윈터도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뭔가 숨기는 일이 있으니 그렇게 사람을 이리저리 피해 다닌 거겠지, 하는.
“메이.”
금방 안쓰러운 마음이 든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살살 달래 손을 내리게 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근데 그게 당신을 힘들게 하는 일이었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조금 더 뒤로 물러난 메이딜리언이 그대로 윈터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덕분에 카우치에 느슨하게 기대 있던 윈터의 눈이 커졌다.
“예전에 제가 선물 준다고 한 거 기억해요?”
매년 자신의 생일선물을 챙겨 준 윈터에게 언젠가 답례를 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메이딜리언은 늘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지만 도무지 윈터에게 줄 만한 물건을 고를 수가 없었다.
고작 물건 따위에 제 마음을 담는다는 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런 물건을 바치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짓이라고 여겨졌다.
“그건…….”
“받아 줘요.”
메이딜리언이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내밀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짐작한 윈터는 놀라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내 곁에 있어 줘요, 윈터, 영원히.”
“이거, 고작 이것 때문에……!”
여태 그렇게 자신을 피해 다닌 게 이 반지 때문이라니.
기쁜 것과 동시에 허탈하고 어이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심정은 꿈에도 모르고 메이딜리언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고작이라뇨. 원래는 더 성대하게 하려고 했는데, 하아…….”
울컥한 윈터가 눈앞에서 반짝이는 은빛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결 좋은 머리카락은 아주 착실하게 손에 얽혔다.
미약한 통증에 메이딜리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악몽 속의 윈터와 지금의 윈터가 겹쳐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어차피 이런 거 없어도 나는 계속 네 옆에 있을 거야. 그러기로 약속했잖아, 멍청아.”
“……하지만 난 아직도 불안해요.”
메이딜리언은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그런 그를 보며 윈터는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께를 퍽퍽 쳤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내가 당신에게 속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어쭈, 그러면서 반지는 하나밖에 준비 안 했어?”
“나중에 당신이 나한테 줬으면 해서요.”
수줍게 눈을 내리깔고 고백하는 얼굴이 어여뻤다.
윈터는 뜻밖의 요구에 눈을 반짝였다.
“좋아. 그렇게 할게.”
후후, 웃는 얼굴이 의미심장했다.
“마침 쌓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나 했는데, 드디어 알맞은 곳을 찾았군.”
“……윈터?”
“응?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메이딜리언은 어쩐지 그녀를 말려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운을 뗐다.
하지만 윈터가 너무나 신나 보여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하려던 말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그래서, 받아 줄 건가요?”
“흐음, 글쎄.”
윈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메이딜리언의 얼굴에 미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확답을 미루면서도 윈터는 그가 내민 반지를 가져가려고 했다.
“아.”
그런데 순간적으로 반지가 두 개로 보이는 바람에, 졸지에 그녀는 허공에 헛손질을 했다.
이틀 연속으로 과음한 부작용이었다.
“내,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윈터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미 메이딜리언의 시선에 방 안을 굴러다니는 술병이 보였다.
“척 봐도 다섯 병은 넘어 보이는데요.”
“…….”
“저걸 다 혼자 마셨어요?”
부끄러운 듯 윈터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별다른 대답이 없어도 긍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일, 다시 해 줘.”
다시 뻔뻔하게 고개를 든 윈터가 속삭였다.
나른하게 웃는 얼굴에 메이딜리언은 그대로 홀려 버렸다.
“내가 제정신일 때.”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대답은 미리 할게.”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그대로 끌어당겼다.
여전히 머리채가 휘어 잡힌 채로, 메이딜리언이 카우치를 짚었다.
고개를 숙인 윈터가 그에게 입을 맞췄다.
술의 단내가 훅 끼쳤다.
“이거면 충분하지?”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메이딜리언이 몸을 일으켰다.
“……아뇨. 부족해요.”
윈터의 뒷덜미를 붙잡은 그가 다시 깊게 혀를 얽었다.
몇 번이고 그녀에게 다시 승낙받고 싶었다.
* * *
윈터의 손가락에서 오묘한 빛의 반지가 반짝였다.
그녀의 앞에는 에스핀이 조금 불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메이딜리언에게 청혼 반지에 대한 답례를 하기 위해 세공사를 알아보던 중 엘리슨이 에스핀을 추천했다.
‘잘 아는 곳이 있는데 한번 가 보실래요?’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어째 좀 묘했지만, 알아보니 에스핀은 이미 대륙에서 꽤 유명한 장인이었다.
“데이트를 방해해서 미안해요.”
윈터가 예의상 사과의 말을 전했다.
“요즘 세공사 아가씨가 빵집에서 산다는 소문 때문에 여기로 올 수밖에 없었거든요.”
“하, 하하하.”
에스핀은 여전히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고, 그녀 곁에 앉아 있던 빵집 청년만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차를 내주고는 주방 안쪽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빵집 청년이 사라지고 나자 에스핀이 입을 열었다.
“……용건만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반지 세공을 부탁하고 싶은데요.”
제 앞에 앉은 사람이 그 유명한 공작이고 나발이고 아무 상관 없었다.
어렵게 성사된 데이트를 방해받은 탓에 에스핀의 감정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절하겠…….”
“이 정도 가격이면 어때요?”
하지만, 거절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었다.
게다가…….
“저 청년 아주 미남이네. 에스핀이랑 잘 어울리는데요?”
“헙.”
“근사한 데이트 장소라도 빌려줄까요?”
“허업.”
“원한다면 평생.”
데이트 방해범은 알고 보니 귀인이었다.
제가 바라는 것만 쏙쏙 골라내서 말하는 윈터를 보며 에스핀은 입을 틀어막았다.
“맡겨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끝내 에스핀은 윈터의 앞에 납죽 엎드렸다.
“흐음, 좋아요, 에스핀. 앞으로 잘 부탁해요.”
윈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편 메이딜리언의 프러포즈는 어쩌다 보니 결혼식으로 발전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바쁘게 뛰어다니는 궁인들을 보며 엘리슨은 그저 허허, 웃었다.
눈 밑은 시커멓게 그늘이 진 데다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는 마치 유령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다들 엘리슨을 보고는 기겁해서 도망쳤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런 그녀의 시야에 우글우글 몰려 있는 귀족 영식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낯이 익은 인물들이었다.
얼마 전 공작저에 몰려가 윈터와 교류를 청한 이들이었으니까.
메이딜리언은 엘리슨에게 저들에 대한 조사를 개별적으로 맡겼다.
그러니까 엘리슨의 피로에 한몫을 한 인물들이라는 의미였다.
“여러분에게 불이익 같은 건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자세히 보니 그들은 윈터와 함께였다.
메이딜리언과의 애정 전선이 위태롭다는 소문에 눈이 멀어 공작가에 방문했다가 후환이 두려워 오들오들 떠는 모양이었다.
윈터는 그들을 능숙하게 안심시켰다.
“하지만 사, 살생부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괜찮아요. 그건 제가 찾아서 없앴어요.”
“히, 히익! 그럼 실제로 있긴 있었다는…….”
“아.”
아니, 저게 정말로 능숙하게 안심시키는 게 맞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러분에게는 그 어떤 불이익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들 돌아가세요.”
윈터가 싱긋 웃었다.
그러나 불안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쉰 엘리슨이 그들 곁을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이러고 있다가 폐하께 걸리면 그땐 정말로 죽…….”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복도는 순식간에 깨끗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