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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3. 4화 (148/150)


 

외전3. 4화

“아, 알겠습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집사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사실 윈터가 저들을 초대하기로 마음먹은 것에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반항심 정도랄까.

‘다른 사람도 좀 만나 봐야지. 넌 어릴 때부터 그 자식만 싸고돌았잖아.’

문득 윈터는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이라…….”

어차피 메이딜리언 외에 눈에 찰 만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그녀의 말은 더없이 진심이었다.

하지만 제게 자꾸만 뭔가를 숨기고, 그것 때문에 자신을 외면하는 메이딜리언이 영 못마땅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시원하게 골탕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 이번에도 무시할 수 있으면 해 보라지.”

흥, 윈터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뭐, 굳이 네가 찾아다니지 않더라도 알아서 줄을 설 테지만.’

그때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설마 진짜 줄을 설 줄은 몰랐지.”

여전히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윈터가 중얼거렸다.

“각하, 한 분씩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충직한 블라디미르 가문의 집사는 일 처리도 아주 빨랐다.

쓰린 속을 문지르며 윈터는 어기적어기적 밖으로 나왔다.

“차는 꿀을 타서 시원하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집사가 속삭였다.

덕분에 줄곧 우중충하게 구겨져 있던 윈터의 미간이 조금 풀어졌다.

걸음을 멈춘 그녀가 집사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그럼 오늘은 황궁에 안 가시는 건가요?”

“글쎄요. 저 많은 손님과 대화하려면 아마 못 가지 않을까요?”

“그럼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윈터와 집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소 지었다.

악마도 흠칫할 만큼 사악한 얼굴이었다.

* * *

“뭐?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날이 밝고, 윈터가 다시 황궁으로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메이딜리언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는 소식을 가져온 엘리슨에게 재차 물었다.

“윈터가 왜 못 온다고?”

“저택에 손님이 많이 오신 바람에…….”

“하, 손님이라니. 대체 누가 왔다는 거야? 뭐 나 빼놓고 파티라도 한대?”

“글쎄요. 모인 인물들을 보면 못할 것도 없겠던데요.”

엘리슨이 애써 치밀어오르는 한숨을 참아 내며 대답했다.

그 묘한 뉘앙스를 메이딜리언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공작저에 찾아간 인간들이 누구야.”

음산한 기운이 메이딜리언의 주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아마 황도에 머무는 귀족 영식들은 다 찾아갔을걸요?”

“……뭐?”

“이쪽도 저쪽도 다 미혼이니까, 아무래도 이 기회에 교류를 나…….”

빠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메이딜리언의 손에 들려 있던 장식품이 그대로 바스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윈터에게 프러포즈할 홀을 꾸미는 궁리를 하고 있던 그는 활활 타오르는 파괴욕에 눈이 멀어 버렸다.

“하.”

짧은 헛웃음을 짓는 메이딜리언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미혼? 교류?”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했던 엘리슨은 그저 담담했다.

어차피 예정된 수순이었다.

두 사람이 제대로 된 대화도 안 나누고, 식사는커녕 동석도 안 하는 순간부터 엘리슨은 진작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저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제 등만 터질 것이라는 걸.

“젠장, 미쳐 버리겠네.”

엘리슨은 혹시 제가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했나 싶어 움찔했다.

다행히 메이딜리언이 한 말이었다.

지은 죄가 있는 그는 책상에 제 머리를 쿵쿵 찧었다.

찾아가긴 해야 하는데, 찾아가도 되나 싶고.

찾아가려면 그동안 숨겨 뒀던 사실을 밝히고 전부 다 얘기를 해야 하는데.

아직 프러포즈는 채 1할도 준비가 안 된 상황이었다.

“대체 준비는 언제 마치는 거야?”

“아직 좀 더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반지만이라도 완성 시켜.”

“그건 에스핀 님이 주관하는 일이라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참다못한 메이딜리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반지 하나 만드는데 뭐 이렇게 오래 걸려?”

“에스핀 님도 인간이니까요.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지친 몸도 회복하시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 회복? 그 정도는 내가 해결해 주지.”

드디어 할 일을 찾아낸 메이딜리언은 당장에 집무실을 박차고 나섰다.

엘리슨은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히익! 폐, 폐하를 뵙습니다.”

복도에서 메이딜리언을 마주친 궁인들은 저마다 기겁하며 벽 쪽으로 바짝 붙어섰다.

윈터와 사이가 멀어졌다는 소문이 돌던 그 순간부터 그들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조만간 메이딜리언이 저렇게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황궁을 활보하리라는 것을.

미친 사냥개처럼 마구 내달린 메이딜리언은 당장에 에스핀의 공방에 쳐들어갔다.

“에스핀!”

“……좋은 아침입니다, 폐하. 무척 부지런하시군요.”

막 잠에서 깬 에스핀에게도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녀는 까치집이 생긴 머리도 어떻게 수습하지 못하고 즉시 세공 작업에 착수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만들어 내.”

“그렇게 말씀하셔도 한계가 있습니다.”

“무조건 오늘 안에 마쳐야 해.”

“그러니까 그렇게 말씀하셔도…….”

“원하는 걸 말해.”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에스핀의 눈이 반짝였다.

요 며칠 이 괴짜 같은 장인을 상대하다 보니 메이딜리언도 그녀를 다루는 요령이 늘었다.

다른 이들처럼 무력이 먹히는 상대가 아닌 데다, 무력을 쓸 수도 없었다.

채찍이 통하지 않는다면 역시 당근을 쓰는 게 인지상정.

“돈을 원하나? 건물? 땅? 아니면 작위?”

에스핀이 눈을 끔벅였다.

그녀에게는 필요 없는 것만 줄줄 늘어놓는 황제에게 과연 제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싶었다.

“폐하, 저 건너편에 빵집 보이세요?”

뜬금없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메이딜리언은 에스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저기 저 잔뜩 줄 서 있는 건물을 말하는 건가?”

“맞아요.”

“저길 사 주면 되나?”

“아뇨. 제가 이 반지 완성하고 나면 저 앞에 있는 손님들 좀 쫓아내 주세요.”

“뭐?”

괴상한 요구에 이번에는 확실히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스핀은 태평하게 말을 덧붙였다.

“제가 요즘 저 빵집 청년을 꼬시는 중이거든요.”

“…….”

“근데 장사가 너무 잘 돼서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느릿느릿 이어지는 말에 메이딜리언은 오랜만에 당황했다.

“저 집이 빵이 친절하고 주인이 맛있는 곳이거든요.”

“……반대로 말한 것 같은데.”

“제대로 말했어요.”

옆에서 만담 아닌 만담을 듣고 있던 엘리슨이 이마를 짚었다.

여전히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던 메이딜리언은 의외로 회복이 빨랐다.

기민한 눈치와 영민한 머리로 금세 에스핀의 요구를 이해했다.

“그러니까 저 빵집 손님들만 쫓아내 주면 된다는 거지?”

“네, 그럼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흔쾌한 승낙에 처음으로 에스핀이 씩 웃었다.

“이거, 오늘까지 만들면 되는 거 맞죠?”

“그래.”

메이딜리언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요구 조건이 완벽하게 합치되는 순간이었다.

제대로 불이 붙은 에스핀은 그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세공에 몰두했다.

그녀가 조금 지친 기색이 보이면 메이딜리언은 그 즉시 제 마력을 이용해 에스핀의 체력을 보충했다.

그리고 마침내 뛰어난 집중력과 욕망을 연료 삼아, 에스핀은 희대의 역작을 만들어 냈다.

“……와.”

곁에서 꾸벅꾸벅 졸던 엘리슨은 드디어 완성됐다는 말에 눈을 떴다가 그대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때요?”

“아름답네요.”

에스핀의 물음에 엘리슨이 홀린 듯 대답했다.

“역시 장인의 손길은 다르군요.”

“이번엔 워낙 재료부터가 좋았어요. 설마 ‘시리크 해의 일몰’을 만져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안 했는데.”

시리크 해의 일몰.

노을을 그대로 담은 듯 빛을 받으면 금빛부터 붉은빛까지 여러 가지 빛깔로 반짝이는 보석이었다.

지금은 멸망한 옛 왕국의 보물이었다는데, 영원불멸의 사랑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유명했다.

“드디어 완성됐군. 수고했어.”

천문학적인 가치를 가진 반지를 갈취하듯 품에 넣은 메이딜리언은 그대로 바깥으로 나갔다.

“하아암, 폐하, 제 약속은 지키셔야 해요.”

맡은 바를 충실히 완수해 낸 에스핀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온종일 웅크리고 세공만 했던 탓에 온몸이 찌뿌둥하고 정신적인 피로도 엄청났다.

“폐, 폐하! 어디 가십니까!”

당황한 엘리슨이 황급히 메이딜리언의 뒤를 쫓았다.

어느새 다 늦은 저녁이었다.

메이딜리언은 초조한 듯 제 입술을 짓씹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따라오지 마.”

그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번뜩였다.

엘리슨은 그대로 멈춰 섰다.

원칙대로라면 그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 게 맞지만, 그랬다가는 아마도 평생 원망을 들을지도 몰랐다.

“뭐, 어차피 갈 곳도 정해져 있으니까.”

머리를 긁적이던 엘리슨은 그대로 돌아섰다.

이 늦은 시간에 반지를 챙겨 향하는 곳이라면 뻔했다.

“이번엔 부디 잘 해결되셔야 할 텐데…….”

엘리슨이 염려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리다 이내 히죽 웃었다.

저쪽의 연애 사정이야 어쨌든, 오늘의 그녀는 드디어 퇴근이었다.

* * *

“에이씨.”

작게 씨근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윈터가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녀는 저녁도 거르고 진작에 혼자 방에 처박힌 상태였다.

건강하지 못할 때 술은 입에도 못 댔지만 이제 웬만큼 마셔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아침에 숙취로 고생했던 사실은 까맣게 잊고 윈터는 시원하게 목구멍에 술을 털어 넣었다.

재미도 없고 못생긴 애들 상대해 주느라 온종일 피곤했던 몸은 술을 쭉쭉 받았다.

“으욱,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는데.”

금세 동이 난 술병을 아무렇게나 굴리며 윈터가 중얼거렸다.

오늘 출근 못 한다는 소식은 아침 일찍 전해졌는데, 저택 앞을 가득 채웠던 인간들이 다 떠날 때까지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씨, 나쁜 새끼.”

“그거 설마 저 말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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