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3. 3화 (147/150)


 

외전3. 3화

* * *

모두가 의문에 휩싸인 그때, 메이딜리언은 보석 세공사로 이름난 에스핀과 함께 있었다.

“대체 언제쯤 완성되지?”

“조금 전에도 물어보셨지만, 오늘 안에는 안 끝납니다.”

붉은 눈의 황제가 바로 뒤에서 닦달을 하는데도 에스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륙을 통틀어서 손에 꼽히는 세공사였다.

그러니 아무리 험악하고 악명 높은 황제라도 저를 함부로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 속에 있었다.

“그래서, 제일 빠른 날짜가 언제쯤인데?”

“글쎄요. 자꾸 말 시키시는 것만 안 하셔도 조금은 빨라지지 않을까요?”

“…….”

“이렇게 급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무심하게 작업을 이어가며 에스핀이 물었다.

“그건 왜 묻지?”

“청혼을 이런 식으로 다급하게 하는 분은 처음이라서요.”

메이딜리언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예전부터 윈터 주위에는 원체 사람이 많았다.

메이딜리언의 안에서는 늘 그런 윈터를 독식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윈터가 난처해하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불안했으니까.

제 나름대로 최대한 자제한다고 했는데도 역부족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윈터의 앞에서는 애써 감췄지만 메이딜리언은 여전히 초조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집무실을 빙빙 도는 메이딜리언을 보다 못한 엘리슨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여전히 미처 처리하지 못한 서류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저 많은 서류를 검토해야 할 황제라는 인간이 저러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또 야근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폐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윈터를 내 곁에 영원히 붙여 놓고 싶어.’

언제는 안 그랬던 적이 있었다고.

새삼스레 고민에 빠진 메이딜리언의 눈치를 살피던 엘리슨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불법을 저지르시려는 건 아니시죠?’

이미 감금에 해외 도피까지 험난한 연애를 이어 가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엘리슨은 이제 그만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었다.

다행히 메이딜리언은 그런 그녀의 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와락 표정을 구겼다.

‘당연히, 합법적으로.’

‘아아, 그렇군요.’

이를 악물고 돌아오는 대답에도 엘리슨의 얼굴은 더없이 밝았다.

‘그럼 역시 확실한 건 그거죠.’

‘……뭘 말하는 거지?’

합법적으로 영원히.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않은가.

‘프러포즈요.’

메이딜리언은 그 제안이 맘에 들었다.

문제는 윈터와 거의 온종일 붙어 있는 바람에 갑자기 자리를 비우기 뭐 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행방을 윈터가 알지 못했으면 좋겠는데 적당한 핑곗거리를 대고 빠져나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고민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윈터는 시의적절하게 해결 방안을 내려 주었다.

‘그러면 그때쯤 칼리스타 본부에 다녀와야겠어. 거기도 밀린 일이 꽤 있거든.’

리어트를 만난다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준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칼리스타로 간 사이에 에스핀을 섭외해 프러포즈용 반지 세공을 요청했다.

가능한 한 윈터가 황궁으로 돌아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성대한 프러포즈 준비는 당연히 반나절 만에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이 시간까지 어디 있다가 온 거야?’

당연히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윈터는 그 늦은 시간까지 그를 기다리다가 이것저것 물었다.

상황이 영 곤란하게 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패닉에 빠진 메이딜리언은 그대로 도망쳤다.

‘아, 저 잠깐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나서요.’

‘……뭐?’

‘자, 잘 자요, 윈터.’

다시 생각해도 멍청한 짓이었다.

메이딜리언은 그대로 쿵,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괜찮아?”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윈터가 물었다.

어제 그 일이 있고 나서도 그녀는 성실하게 메이딜리언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네, 그럼요. 멀쩡해요.”

메이딜리언은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혹시라도 윈터와 눈이 마주치면 어제의 행방을 물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유심히 보던 윈터가 입을 열었다.

“다들 저녁 식사는 안 하시나요?”

사실상 메이딜리언을 겨냥한 말이었지만 고개를 든 건 엘리슨 하나였다.

“저는, 음…….”

엘리슨의 시선이 난처한 듯 메이딜리언을 향했다.

상급자가 어떻게 할지 정하지 않았는데 제가 먼저 어떻게 하자고 하기가 좀 그랬다.

“메이, 저녁 안 먹어?”

“……아, 저는 끝내야 할 일이 좀 남아서요.”

서류에 거의 코를 박을 듯이 몸을 웅크리고 있던 메이딜리언이 더듬더듬 말했다.

여전히 윈터의 눈은 쳐다보지도 않는 상태였다.

“뭐, 바쁘다면 할 수 없지. 그래도 식사는 거르지 말고 꼭 하도록 해.”

“네. 그럴게요. 미안해요, 윈터.”

“아냐. 그럼 난 먼저 갈게.”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집무실을 나갈 때까지 숨죽인 채 기다렸다.

제게 남아 있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일말의 양심이 쿡쿡 찔렸다.

그 뒤로도 두 사람 사이에 사적인 대화는 사라졌다.

가급적 꼭 필요한 말만 하고, 혹시라도 단둘이 남게 되는 상황은 피했다.

메이딜리언은 명백하게 윈터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덕분에 윈터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우중충해졌다.

“그냥 대충 둘러대기라도 하시지 그러셨어요.”

오늘도 저녁 식사 제안을 거절당한 윈터가 쓸쓸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어색한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만 보던 엘리슨이 결국 메이딜리언에게 한소리했다.

“윈터랑 약속했어. 거짓말 안 하기로.”

책상에 흐물흐물 녹아 엎드린 채로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요 며칠 사이 윈터랑 제대로 된 대화를 못 나눈 탓에 그 역시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윈터와 눈이 마주치고, 혹시라도 그녀가 그날의 행방을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자꾸만 윈터를 피하게 되었다.

메이딜리언은 윈터와 한 약속만큼은 꼭 지키고 싶었다.

그러니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별다른 대책도 없이 두 사람 사이에는 착실히 오해가 쌓여 가고 있었다.

“저기, 윈터.”

“왜?”

“아뇨, 그냥. 오늘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할 건지 해서…….”

“아, 난 이미 먹고 왔어.”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메이딜리언의 손이 움찔 떨렸다.

저를 마주하는 윈터의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모습에 메이딜리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엘리슨, 식사하실 거죠?”

“네? 아, 네. 그럼요.”

“그럼 저도 그동안 잠깐 쉬고 와야겠네요.”

서류를 모아 탁탁 책상에 두드려 정리하는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았다.

메이딜리언의 어깨가 그때마다 흠칫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지나쳐 쌩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멀어지는 윈터를 잡지도 못한 채, 메이딜리언은 그저 윈터의 책상 앞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안 돼…….”

그의 머리에 붉은 경고등이 들어왔다.

프러포즈고 뭐고, 아무래도 큰일이 난 것 같다.

윈터는 단 한 번도 그를 저렇게 매몰차게 외면했던 적이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행동을 돌아보며 메이딜리언은 이마를 짚었다.

“이럴 수는 없어.”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고민 끝에 메이딜리언은 그날 밤 윈터를 찾아갔다.

“각하께서는 공작저로 가셨는데요?”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에 그만 머리가 멍해지고 말았다.

황도로 돌아온 뒤로 윈터는 뻔히 있는 제집을 놔두고 황궁에서 지냈다.

홀로 적응할 메이딜리언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런 윈터가 공작저로 돌아가다니.

“……왜?”

이유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메이딜리언은 물었다.

“굳이 여기 머무실 필요가 뭐 있냐고 하시면서, 내일 아침에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윈터를 모시던 시녀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최대한 에둘러 표현했지만 역시나 있는 줄도 몰랐던 양심이 다시 따끔거렸다.

마지막에 저를 쌩하니 스쳐 지나가던 윈터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하아…….”

메이딜리언은 끝내 푹 한숨을 내쉬었다.

* * *

두 사람의 연애 전선에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는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워낙 소문이 빠른 궁이기도 하고 하필 요즘 제일 시선이 많이 쏠린 두 사람이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마침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지기만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있었다.

“저게…… 다 뭐죠?”

전날 과음한 탓에 숙취에 찌든 얼굴로 윈터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침부터 찾아온 사람들로 인해 공작저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각하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분들이십니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요? 아니, 저 꽃다발들은 또 뭐야.”

“선물 아닐까요?”

“어째 저랑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사람들이 죄다 남자분들뿐이시네요.”

유능한 공작가의 집사는 그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윈터의 말이 대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으으.”

윈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공작저 앞에 꽃을 들고 줄을 서는 건지.

메이딜리언이 저 꼴을 보면 그날로 저 앞이 피바다가 될지도 모를 텐데.

“……다들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윈터가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별 사이 아니었을 때도 메이딜리언은 아스터나 리어트에게 적대감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아, 저는 끝내야 할 일이 좀 남아서요.’

메이딜리언을 생각하자 자연스레 떠오르는 목소리에 윈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요 며칠 사이 저랑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그가 아주 괘씸했다.

그날 도대체 어디를 다녀왔기에 그러는 건지.

윈터는 이제 자세한 사정 같은 건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아.”

울적한 표정으로 윈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잠자코 기다리던 집사가 물었다.

“바깥에 계신 손님들은 어떻게 할까요?”

“으음.”

잠시 고민하던 윈터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일단 최대한 만나 보죠, 뭐.”

“……예?”

“안으로 들이세요, 순서대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