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2화
당연히 메이딜리언은 윈터를 무척이나 환영했다.
아예 두 발 벗고 달려 나가서 콱 끌어안는 통에 윈터는 한참이나 붉어진 얼굴을 식히느라 고생해야 했다.
그 뒤로도 갓 태어난 오리처럼 온종일 윈터를 졸졸 따라다니며 붙어 있으려고 하는 바람에 민망하고 난처한 상황들은 계속해서 벌어졌다.
“저기, 메이.”
“네, 윈터.”
“우리 식사는 좀 떨어져서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찰싹 옆에 붙어 일일이 고기를 썰어 주고 물잔을 채워 주고 시중을 드는 황제를 보며 궁인들의 표정은 시시각각 창백해져 갔다.
참다못한 윈터가 결국 운을 띄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체해서 제대로 식사조차 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불편하세요?”
그러나 윈터가 말문을 열기 무섭게 메이딜리언의 어깨가 눈에 띄게 축 처졌다.
기가 팍 죽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황제를 보며 궁인들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
윈터 또한 마음이 안 좋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늘 그렇듯 그녀는 메이딜리언의 얼굴에 약했다.
잔뜩 기죽은 강아지 같은 남자에게 굳이 면박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그런 거. 내가 널 왜 불편해하겠어.”
“그럼 계속 제가 챙겨 줘도 되죠?”
반짝 눈을 빛낸 메이딜리언이 반문했다.
“어? 으응.”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인 윈터는 어쩔 수 없이 현 상황을 받아들였다.
뭐, 지금이야 오랜만에 만났으니 반가워서 이러는 거겠지 뭐 얼마나 가겠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윈터 곁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귀가 축 처진 강아지가 아니라 상대를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집념의 맹견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윈터.”
“응?”
“혹시 어디 놀러 가고 싶은 데는 없어요?”
“아니 딱히. 왜? 너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그럴 리가요.”
입술을 삐죽인 메이딜리언이 제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가리켰다.
“이것들을 다 해결하기 전까지는 여기서 일어날 수도 없을걸요.”
“그건 그렇지…….”
이제 막 황위를 이어받게 된 메이딜리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저야 그렇다 쳐도 윈터까지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
“또 맘에도 없는 소리 한다. 난 여기 있는 게 제일 마음이 편해.”
“그래도요. 이제 막 건강해졌는데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그럼. 충분히 잘 먹고 자고 지내는걸.”
윈터는 공작이자 공신으로서 메이딜리언의 곁에서 그를 도우며 거의 황궁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미 기반이 잘 다져진 공작가야 원래 해 왔던 것처럼 가신들이 충분히 잘해 주겠지만, 궁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섭정이 처형되고 선황이 암살된 사건을 밝히고, 1황자는 계승권을 포기하고 사라지면서 갑자기 나타난 2황자가 실권을 잡았다.
귀족들도 제국민들도 혼란스러운 상황을 최대한 잡음 없이 정리하려면 수뇌부가 고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일 고생하는 건 엘리슨인걸.”
윈터의 시선이 엘리슨에게 향했다.
그녀는 집무실 한편에 마련된 책상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이내 메이딜리언의 시선까지 꽂히자 흠칫한 엘리슨이 고개를 들었다.
“예?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뇨, 엘리슨이 제일 고생한다고요. 좀 쉬면서 해요.”
“하하, 괜찮습니다.”
물밑에서 활동하던 선황 친위대에서 벗어나 메이딜리언의 보좌관이 된 엘리슨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윈터가 잠시 칼로프로 사라지며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고삐가 있는 메이딜리언은 생각보다 괜찮은 군주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의 자질과는 별개로 최근 들어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예전보다 좀 싸늘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연히 기분 탓이겠지.’
엘리슨은 가볍게 치부했다.
누군가에게 적대심을 갖기에는 메이딜리언은 인간에게 큰 기대나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요. 차도 한 잔씩 마셔 가면서 하세요.”
요 며칠 눈에 띄게 해쓱해진 엘리슨에게 윈터가 직접 차를 가져다주었다.
덕분에 메이딜리언의 눈초리가 더 날카로워졌다.
“윈터, 저는요?”
“응? 너는 이 차 안 마시잖아.”
“마실래요.”
평소에는 입도 안 대는 차를 갑자기 마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영 간질간질한 것 같아서, 윈터는 애써 웃음을 꾹 참았다.
“자, 여기.”
엘리슨은 금세 핑크빛 기류를 물씬 풍기는 두 사람을 무시했다.
두 사람의 애정 전선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그녀 자신 또한 안전할 테니까.
“오늘도 자고 갈 거죠?”
“그래야지. 저녁 식사하고 나서도 일이 꽤 될 것 같네.”
일이 워낙 많은 터라 윈터는 거의 공작저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여유가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메이딜리언이 진작 그녀를 위해 제 침실 근처에 숙소를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두 사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치 한 몸처럼 찰싹 붙어 지냈다.
“그래도 이 정도 속도면 조만간 여유가 생기긴 할 거예요.”
“그래? 그러면 그때쯤 칼리스타 본부에 다녀와야겠어. 거기도 밀린 일이 꽤 있거든.”
윈터가 슬쩍 메이딜리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가 자신이 리어트와 만나는 것을 크게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메이딜리언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러지 말고 내일쯤 다녀오는 게 어때요?”
“어? 내일? 정말 그래도 되겠어?”
“당연하죠.”
생각 외로 흔쾌히 허락이 떨어졌다.
윈터는 반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내 그녀의 표정이 환해지더니 메이딜리언을 와락 끌어안았다.
“갑자기 왜 그래요?”
“아니, 그냥. 네가 부쩍 자란 것 같아서.”
먼저 다가오는 윈터를 밀어낼 리 없는 메이딜리언은 그녀를 마주 끌어안으며 웃었다.
“전 진작에 다 자랐거든요.”
“알지. 네가 다 자란 거야 내가 제일 잘 알지.”
원래라면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리어트를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도 못하고, 시종일관 불안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성숙한 자세라니.
기특하기 짝이 없는 그를 위해 윈터는 최대한 빨리 밀린 일을 해결했다.
아예 저녁 식사까지 하고 가라는 리어트의 제안도 거절한 채 환궁했으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저녁은 메이딜리언과 함께 보내려고 했다.
“화, 황제 폐하 말씀이세요?”
그런 그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당연히 서류 더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생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 메이딜리언은 뜻밖에도 궁에 없었다.
“잠깐 어디 가신다고…….”
“어디요?”
“그것까지는 잘…….”
늘 메이딜리언의 집무실을 지키는 기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쩔쩔맸다.
아무리 메이딜리언이 호위가 필요 없다고 하지만 설마 황제의 행방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니.
아니면 혹시 알고는 있는데 제게만 숨기는 거라든가.
“흐음.”
윈터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기사들의 얼굴은 더욱더 창백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한 것까지는 없고요.”
가볍게 손을 내저은 윈터는 제 방으로 돌아왔다.
결국 그녀는 황도로 돌아오고 처음으로 혼자 저녁 식사를 했다.
목욕까지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간 거야?”
평소의 메이딜리언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어딜 간다는 언급도 없었고, 심지어 누구도 그의 행방을 모른다니.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내일쯤 다녀오는 게 어때요?’
신발 안을 굴러다니는 작은 돌처럼, 메이딜리언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는 성숙한 태도라고 뿌듯해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녀를 궁 밖으로 내보내야 했었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대체 왜……?”
풀리지 않는 의문에 윈터가 뒤척였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잠이 들지도 못한 채 저절로 밤이 깊었다.
막 가물가물 잠에 빠지려는 찰나,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인 채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가 물끄러미 잠든 윈터를 내려다보다 그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익숙한 향기에 윈터가 눈을 떴다.
“이제 와?”
소리 없이 다시 방을 나서려던 그림자가 흠칫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메이딜리언이 들어왔다.
“아, 안 자고 있었어요?”
메이딜리언이 보기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수상쩍은 행동에 윈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애써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이 시간까지 어디 있다가 온 거야?”
“잠깐 밖에요.”
“뭐 하러?”
“으음…….”
평소의 윈터는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차피 메이딜리언이 어딜 가든 그녀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캐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메이딜리언은 그녀에게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았다.
“아, 저 잠깐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나서요.”
“……뭐?”
“자, 잘 자요, 윈터.”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메이딜리언은 그대로 쌩 밖으로 나가 버렸다.
홀로 방 안에 남은 윈터는 그저 황당하기만 했다.
“쟤…… 왜 도망가?”
* * *
“그러게, 대체 왜 도망간 거야?”
한참 심각하게 윈터의 얘기를 듣던 아이셀이 되물었다.
“내가 그걸 알면 이렇게 고민할 리도 없지.”
“하긴, 그건 그렇네.”
아이셀이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 뭔가 조언이라도 해 줄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윈터보다도 연애 경험이 적었다.
아니, 정확히는 없었다.
“혹시 바람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어?”
“나도 말하는 거랑 동시에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메이딜리언이 이 세상에서 관심을 가지는 존재는 윈터가 유일했다.
그런 인간이 바람이라니, 지나가는 개도 안 웃을 농담이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 봤지만 그 무엇도 적절하지 않았다.
“그 자식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끝내 아이셀이 버럭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