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1화
객관적으로 봐도, 윈터 블라디미르는 아름다웠다.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결 좋은 머리카락은 어깨 즈음에서 찰랑거렸고 황금을 녹인 듯 찬란한 금빛 눈동자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그 안에 때때로 애정 어린 눈빛이 담기면 그 시선은 벌꿀을 녹인 것처럼 달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나 오늘 공작 각하랑 마주쳐서 인사했다!”
“뭐? 진짜? 부럽다. 난 아직 한 번도 못 뵀는데…….”
“어때? 역시 소문대로 미인이셔?”
“당연하지!”
“근데 좀 무섭지 않니?”
“뭐가 무서워?”
“어릴 때는 악마인가 폭군인가 여하튼 그런 별명이었다던데.”
“에이, 설마.”
조잘조잘 저들끼리 떠들던 시녀들이 윈터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늘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악마 같은 별명은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천사라면 모를까.”
윈터는 특히 메이딜리언과 함께 있을 때 웃음이 많아졌다.
반짝이는 눈과 함께 보기 좋게 올라간 두 뺨이 분홍빛으로 붉게 물들면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도 저절로 심장이 뭉근하게 녹았다.
“예전에는 많이 아프셨다던데, 지금은 괜찮으신 거지?”
“골드 드래곤의 심장을 이식받으셨잖아.”
“차기 대현자가 될지도 모른다더라.”
한때는 지병으로 몸이 그리 건강하지 못했으나 그것도 다 옛말이었다.
“근데 그러면 공작 각하는 공작위 말고도 대현자도 되시는 건가?”
“그뿐이야? 칼리스타의 주인이기도 하시잖아.”
“아, 맞네! 칼리스타도 공작 각하 소유였잖아?”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업적이라기엔 하나 같이 대단하네.”
정말 한 명에게 이리도 많은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가 싶었지만, 모두 윈터를 가리키는 말이 맞았다.
그녀에게 어느 것 하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지금 윈터는 명실상부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게다가 황제 폐하의 연인이기도 하시지!”
시녀 하나가 외친 말에 나머지가 흠칫 놀라 주위를 살폈다.
메이딜리언은 여전히 황궁에서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물론 그 무시무시한 황제 폐하가 시녀들의 휴게실까지 쫓아올 리는 없었지만.
“처음엔 그저 충심이라고 하시더니.”
메이딜리언의 충신으로 알려졌던 윈터는 2황자가 황위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세간에 떠도는 모든 염문설을 부정했었으나, 근래에는 그 양상이 꽤 많이 달라졌다.
“그 미모를 매일 같이 보고 있으면 없던 감정도 생기겠더라.”
“그러면 뭐 해. 황제 폐하는…….”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타인에게 자비는커녕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황제는 오직 윈터의 앞에서만 느슨하게 풀어졌다.
무감정한 인형처럼 존재하던 그에게 숨을 불어넣고 그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윈터가 유일했다.
그러니 감히 메이딜리언의 곁에 윈터가 아닌 다른 존재를 가져다 대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번에 메디아가 봤다더라.”
“응? 뭘?”
“공작 각하가 황제 폐하의 침실에서 나오는 거.”
“어, 어머, 진짜?”
잠깐 얼어붙었던 분위기는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역시 남의 연애 얘기가 가장 재밌는 법이었다.
아무튼 건강도 되찾고, 사랑도 얻게 된 여인은 활짝 핀 여름의 꽃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평소와 달리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보며 아이셀이 물었다.
창밖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윈터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건 아니고…….”
윈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아이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궁에서 되게 잘 지내는 줄 알았더니 아닌가 봐?”
그녀는 조만간 다시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원래도 한곳에 오래 머무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이번엔 윈터를 돕느라 황도에 꽤 오래 있었다.
떠나기 전에 윈터를 만나고자 공작저에 찾아갔을 때 윈터가 최근엔 황궁에서 지낸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그러나 제집 놔두고 황궁에서 지낼 정도로 연애에 푹 빠진 사람치고는 윈터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메이가 이상해.”
잠시 망설이던 윈터가 말문을 열었다.
그새 얼마나 제 입술을 못살게 굴었는지 아랫입술만 벌겋게 부은 상태였다.
아이셀은 픽 실소했다.
그러면 그렇지. 어차피 윈터의 삶에서 고민도 고난도 전부 메이딜리언과 관련된 일뿐이었다.
“뭐가 이상한데?”
이번엔 또 뭐가 문제인가 들어 보자 싶어 아이셀이 되물었다.
“……날 피하는 것 같아.”
“뭐어? 그게 말이 돼?”
전혀 뜻밖의 대답에 아이셀이 와락 표정을 구겼다.
그녀는 윈터와 메이딜리언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봐 왔다.
사춘기도 채 지나지 않은 꼬마들이 그때부터 떨어지면 죽는 것처럼 애절하던 걸 뻔히 아는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이셀이 아는 메이딜리언이라면 온종일 윈터 곁에 들러붙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너넨 참 유난이었어.”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듯 아이셀이 중얼거렸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어린 녀석들 사이에 끼어서 못 볼 꼴 많이 봤었다.
남의 연애에 참견할 시간이 있으면 제 앞가림이나 잘 해야 했는데.
덩달아 아이셀의 표정도 우중충해졌다.
“설마 자라서까지 이럴 줄은 몰랐네.”
메이딜리언이 윈터를 피하다니.
아이셀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10년도 더 전부터 죽느니 마느니 지지고 볶고 염병 천병 했으면서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그러나 윈터는 더없이 심각했다.
“분명 나랑 약속했는데…….”
“무슨 약속?”
초조한 듯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도 윈터의 입술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윈터와 메이딜리언은 그동안 갖은 오해와 비밀들로 수많은 고난을 겪어 왔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데, 두 사람은 또다시 그런 쓸데없는 일로 감정 소모하거나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약속했다.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분명 그랬는데.
“여기 딱 앉아서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
보다 못한 아이셀이 윈터를 질질 끌어서 자리에 앉혔다.
“그게, 그러니까…….”
또 한 번 푹 한숨을 내쉰 윈터가 이내 입을 열었다.
* * *
얼마 전 윈터는 공작령에서 밀린 일들을 모두 마치고 황도로 돌아왔다.
다행히 선대 공작 오필리아와의 깊은 감정의 골도 어느 정도 해소했다.
딱히 특별한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저 몇 날 며칠 밤새도록 오필리아의 침실 앞을 지키고 서 있었더니 결국 딸의 고생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오필리아가 고집을 꺾었다.
“정말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어머니.”
“이제 그만해도 된다니까.”
오랜만에 오필리아를 마주하자마자 윈터는 펑펑 눈물이 나왔다.
무릎 꿇고 싹싹 비는 딸을 보며 오필리아도 애써 울음을 참았다.
자신과의 약속을 저 버리고 끝내 죽음을 택한 윈터가 원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살아 돌아온 딸이 기특했다.
오필리아는 그저 용기가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자신은 딸이 죽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둔 어머니였으니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필요치 않은 사과를 했고, 필요치 않은 용서도 나누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난 그 자식은 반대다.”
우느라 두 눈이 퉁퉁 부은 윈터를 불러다 앉히고 오필리아는 줄곧 마음에 담아 뒀던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너무 본론부터 얘기하는 바람에 윈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그 싹수가 노란 녀석 말이야.”
“……설마 황제 폐하를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던 건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어머니.”
“다른 건 다 괜찮아도 그 녀석은 안 돼!”
오필리아가 단호하게 외쳤다.
윈터를 꼭 닮은 금빛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메이딜리언이 맘에 들지 않았다.
“속이 너무 시커멓잖아.”
“그건 맞지만요.”
윈터는 순순히 인정했다.
이 세계에서 그녀만큼 메이딜리언의 인성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잘생겼잖아요.”
오필리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 나온 말에 도무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애써 격해진 감정을 억누른 오필리아가 다시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물론 그만한 인물이 흔한 건 아니지만…….”
“단언하는데 메이만큼 잘생긴 사람은 없어요. 심지어 제 취향이에요.”
그러나 윈터는 단호했다.
결국 오필리아의 이마에 희미하게 힘줄이 돋아났다.
그녀는 딸에게 버럭 외쳤다.
“평생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잖아!”
“왜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그녀의 딸은 강적이었다.
“전 재력도 능력도 권력도 다 있어요.”
“그건, 그렇지.”
“제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은 뭐라도 저보다 한 가지 정도는 잘난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어디 흔한가요?”
“끄응.”
“사실상 메이가 유일하다고 봐야죠.”
메이딜리언은 미모와 권력을 모두 갖춘 황제였다.
어릴 적부터 윈터가 죽고 못 사는 상대이기도 했고.
오필리아는 차마 반박할 만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메이딜리언은 완전무결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윈터가 가장 원하는 상대였다.
“그래도 사람은 인성이 중요해.”
오필리아는 애써 고집스레 인성을 강조했다.
“저한테만 착하면 됐죠.”
윈터는 그 말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메이딜리언이 거의 윈터의 발닦개 수준으로 설설 긴다는 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결국 오필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여지는 남겨 두거라.”
“무슨 여지요?”
“다른 사람도 좀 만나 봐야지. 넌 어릴 때부터 그 자식만 싸고돌았잖아.”
이내 오필리아가 흐뭇하게 웃었다.
“뭐, 굳이 네가 찾아다니지 않더라도 알아서 줄을 설 테지만.”
“에이, 설마요.”
픽 웃은 윈터는 어머니의 말을 가볍게 넘기고 그 길로 즉시 황도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