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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2. 7화 (144/150)


 

외전2. 7화

제 이름이 불리자 엘리슨이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지독한 죄책감이 그녀의 눈동자를 물들이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하.”

엘리슨이 눈물을 뚝뚝 떨궜다.

메이딜리언은 엘리슨에게 어째서 자신을 배신했냐고 묻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도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고, 그것만 충족되면 다른 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계약 관계나 다름없었다.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메이딜리언은 엘리슨이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당신은 지금 너무 위험합니다.”

“…….”

“아무리 유약하다고 해도 고삐 없는 폭군보다야, 유약한 1황자가 더 낫겠지요.”

바닥을 구르는 메이딜리언의 몸이 잘게 경련했다.

엘리슨이 하는 말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모든 유물이 그의 손에 있었다.

칸나만 손에 넣으면 완벽했다.

그러면 윈터를 살릴 수 있었는데.

“드디어…….”

메이딜리언이 입술을 달싹였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모든 기회가 날아갔다.

“드디어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챙그랑, 엘리슨의 손에서 피에 물든 칼이 떨어졌다.

도망치듯 뒷걸음질 친 그녀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하.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울컥 피가 쏟아졌다.

빠르게 혈관에 퍼진 독이 시야를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멀어지는 엘리슨의 모습이 흐릿하게 번졌다.

등 뒤가 서늘했다.

메이딜리언은 자신의 몸이 천천히 식어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죽음이 거대한 그림자를 그의 위로 드리웠다.

가끔 올려다보았던 하늘은 여전히 청명한 빛이었다.

그에게 아직 이루지 못한 소원이 있었다.

“……신이여.”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힘을 쥐어 짜내며 메이딜리언은 바닥을 기었다.

그간의 모든 노력이 무용지물이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제 몸이 잘게 갈려 사라진다고 해도 아무 상관 없었다.

그저 윈터만, 이 꿈속에서라도 윈터만 살릴 수 있다면.

“나의 피와 살과 머리카락과 영혼 한 톨까지 모조리 당신께 바치나이다.”

제 혀를 짓씹은 메이딜리언이 후두둑 떨어지는 피로 마법진을 그렸다.

그의 기원을 따라 피로 얼룩진 마법진이 간헐적으로 깜박였다.

비록 불꽃에서 태어난 여자는 제 곁에 없지만, 그래도 여섯 개의 성물이라면.

그리고 이 비천한 목숨이라도 바친다면, 어쩌면.

“제발.”

예언이 이루어질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메이딜리언은 간절하게 바랐다.

“단 한 번만이라도.”

손끝이 뻣뻣하게 굳어 갔다.

목에서 피가 끓었다.

그래도 메이딜리언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 기도를 들어주소서.”

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별자리가 끊겨 있구나. 오래 살기 어렵겠어.’

그녀의 자리도 이 세상 어딘가에 남을 수 있도록.

그렇게 허망하게 스러지지 않도록.

“……부탁이야.”

이 목숨은 전부 남김없이 가져가도 좋으니.

“그 사람을 받아 줘.”

그때 옅은 빛이 그를 감쌌다.

인신 공양까지 한 정성이 갸륵했는지, 머리 위에서 엄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 어리석은 인간아.

메이딜리언은 시체처럼 바닥에 누운 채로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굳이 발음하지 않아도 신이라면 듣겠지.

속에서 처절하게 외치는 목소리를.

살려 달라고. 윈터를 살려서 내게 다시 돌려 달라고.

- 눈을 떠라.

빛이 너무도 환하여 메이딜리언은 눈을 뜰 수 없었다.

더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피로 얼룩진 자리에서 그의 마지막 숨이 떨어질 때, 마침내 간절히 바라던 대답이 들렸다.

- 네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다.

* * *

“……헉!”

훅 숨을 들이켜며 메이딜리언이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온몸을 휘감고 있던 격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오래 자고 일어난 것처럼 머리가 무거웠다.

“메이?”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 놀란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돌렸다.

창밖은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그 앞에 그리웠던 얼굴이 미소 짓고 있었다.

“……윈터?”

그는 순간 자신이 아직도 꿈을 꾸나 싶었다.

아니라면 어떻게 윈터가 지금 여기에 있겠는가.

그는 천천히 제게 다가오는 윈터에게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

“네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잠깐 들렀지.”

메이딜리언은 손을 뻗어 윈터를 꽉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체온과 무게와 향기를 느끼면서도 여전히 현실감이 미약했다.

어쩌면 꿈이 너무 길었는지도 모르겠다.

밤바람이 묻은 머리카락에 잘게 입을 맞추며 그는 불안감으로 술렁이던 가슴을 애써 억눌렀다.

“무슨 꿈 꿨어?”

평소와 달리 메이딜리언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작게 웃은 윈터가 그의 등을 도닥이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메이딜리언은 생각했다.

그건 꿈이지만 꿈이 아니었다.

어쩌면 현실이었을 수도, 잊힌 과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쓰였던 이야기는 사라졌다.

윈터는 여기에 있었다.

창백한 낯이 아니라, 늘 그랬던 것처럼 온기 가득한 눈동자로.

허망한 꿈이 아니라 제 두 발로 현실을 딛고 서 있었다.

“그냥 좀, 무서운 꿈이었어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듯,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폐에 가득 윈터의 향기를 들이마시면서도 두려운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꿈속에서도 그는 몇 번이고 윈터를 끌어안고 싶었다.

품 안 가득, 깊게. 그리고 영원히.

“그런 꿈 꾸면 키 큰다던데.”

목을 울려 웃으며 윈터가 말했다.

어떻게든 메이딜리언의 불안감을 낮춰 주고 싶은 것 같았다.

여전히 저를 어린애 다루듯 하는 말투에도 메이딜리언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는 윈터가 주는 것이라면 뭐든 기껍고 달가웠다.

“으음, 여기서 더 크면 곤란한데 말이지.”

퍽 난처하다는 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능청스러웠다.

결국 메이딜리언도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 들리는 웃음소리에 윈터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서 굳이 이 늦은 밤에 황궁 한복판으로 몰래 숨어들어 왔는데.

지금 생각하니 잘한 일 같았다.

혹시나 꿈이더라도 윈터는 메이딜리언이 홀로 슬프거나 아프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언제는 크면 클수록 좋다면서요.”

품 안에 갇힌 윈터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며 메이딜리언이 툴툴거렸다.

투정을 부리는 어린 연인의 코를 톡 건드리며 윈터가 말했다.

“그건 키 얘기가 아닌데.”

메이딜리언이 멈칫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윈터는 샐쭉 웃었다.

막 잠에서 깨어나 따끈따끈하고 몽글몽글한 기운이 순식간에 두 사람을 감쌌다.

“윈터.”

“응?”

“처음에, 나를 만났을 때 말이에요. 어땠어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윈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우리가 공작가에서 만났을 때 말하는 거야?”

“네, 맞아요.”

“으음…….”

윈터가 작게 침음을 삼켰다.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도, 고민하는 듯도 보였다.

“네게 얘기를 할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마침내 윈터가 말문을 열었다.

“나는 너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어.”

뜻밖의 말에 이번엔 메이딜리언의 동공이 커졌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메이딜리언을 보며 윈터가 부드럽게 웃었다.

“너 혼자 아프고 외롭고 슬프지 않도록.”

“…….”

“그러려고 나는 지금껏 살았던 거야.”

“…….”

“그리고 너는 나를 살려 줬지.”

메이딜리언의 심장이 묵직한 소음을 내며 뛰었다.

기적의 발현이자 소원의 결실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어쩐지 지금껏 전혀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던 꿈속의 윈터와 현실의 윈터가 하나로 겹쳐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를 구한 거네요.”

잠깐 놀란 듯 헛숨을 들이켠 윈터가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뜬금없는 말을 과연 메이딜리언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메이딜리언은 기쁜 듯 보였다.

미처 자신의 감정을 다 추스르지도 못한 것처럼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꿈에서 당신을 봤어요.”

“날 봤다고?”

“당신이 죽고, 세상이 멸망하고, 나는 어떻게든 당신을 되살리려고 모든 것을 망가뜨리죠.”

“…….”

“그리고 소원을 빌었어요.”

윈터는 눈앞의 메이딜리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는 꿈속의 이야기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당신을 살려 달라고.”

그리고 예언은 바뀌었다.

- 네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다.

꿈에서 깨어나기 전 들었던 말은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의 소원은 이루어진 것이었다.

메이딜리언은 윈터를 제 품으로 깊숙이 당겨 안았다.

그녀는 제게 돌아왔다.

“눈 감아요, 윈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제게 전해지는 익숙한 체온에 윈터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콧등과 뺨, 귓가에도 남김없이 입맞춤이 내려졌다.

마침내 그녀의 윗입술을 머금은 메이딜리언이 따뜻한 숨을 불어넣었다.

“으음.”

윈터가 닿아 오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녀를 한 손으로 지탱하며 메이딜리언은 천천히 윈터를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 팔을 짚은 채로 메이딜리언은 윈터의 턱 끝에 쪼듯 키스를 남겼다.

“언제까지 가야 해요?”

열기에 흐릿해진 금빛 눈동자가 느리게 깜박였다.

날짜와 일정을 계산하느라 복잡한 것 같았다.

그녀가 대답을 내려 주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메이딜리언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입을 맞췄다.

“……오래는 못 있어.”

마침내 나온 대답에 메이딜리언이 목을 울려 웃었다.

오래 못 있을 거라고 하는 사람치고는 목소리에 의지라곤 없었다.

오히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있었으니까.

뭔가에 홀린 것처럼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 황홀하다는 듯 응시할 때마다 메이딜리언 역시 환희로 가득 찼다.

“늦는다고 전하세요.”

그리고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밤바람으로 서늘하던 체온은 금세 달아올랐다.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어디로도 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손에 제 손을 얽었다.

맞닿은 이 따스함이 눈물 나도록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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