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 6화
“그게 무슨…….”
영 뜬구름 잡는 듯한 말에 메이딜리언은 여전히 대화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일전에 현실의 윈터가 한 번 지나가듯 언급했던 기억은 있었다.
에르퀼이 가끔 윈터를 까마귀라고 부르는 것을 그가 궁금해하자 작게 웃던 그녀가 대답했다.
‘그건 내가 예언 속에 등장하는 까마귀이기 때문이야.’
‘그 예언이 뭔데요?’
뭐든 한 번 들은 것은 좀처럼 잊는 법이 없는 메이딜리언은 당연히 윈터가 말해 준 예언의 내용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윈터와 꿈속의 에르퀼이 말하는 예언은 달랐다.
“죽음의 꼭두각시가 불꽃에서 태어난 여인과 여섯 가지 성물을 모아 바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네.”
“소원이라고요?”
“그래.”
“……내가 아는 예언과는 많이 다르군요.”
“그게 무슨 소리지?”
메이딜리언은 윈터에게 들었던 예언을 그대로 읊었다.
여전히 대체로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의 향연이었다.
에르퀼은 눈을 빛내며 메이딜리언이 한 말을 그대로 받아적었다.
그러나 그 대단하다는 대현자도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자네가 말하는 예언에 나오는 까마귀가, 이 저택의 아가씨라고?”
“맞습니다. 혹시 그분을 봐 주실 수 있습니까?”
“흐음.”
“잠깐이라도 됩니다.”
에르퀼은 크게 내켜 하지 않았으나 메이딜리언의 간곡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현실과 달랐다.
“저 애는 살아남기 어려워. 아니 불가능해.”
약에 취해 잠들어 있던 윈터를 잠깐 보고 나온 것만으로도 에르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시나 해서 기다리고 있던 블라디미르 공작이 휘청거렸다.
나일라가 그런 공작을 부축했다.
잠시 멍해져 있던 메이딜리언이 얼른 에르퀼의 뒤를 쫓으며 재차 물었다.
“심장의 마력을 봉인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었어.”
작게 한숨을 내쉰 에르퀼이 덧붙였다.
“별자리가 끊겨 있구나. 오래 살기 어렵겠어.”
메이딜리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줄곧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되뇌곤 했지만, 아무리 악몽 속이라도 그는 윈터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골드 드래곤의 심장을 이식한다고 해도, 어렵겠습니까?”
“……감당할 수 있겠느냐?”
에르퀼은 골드 드래곤의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제국 황궁 심처에 있는 보물창고에서 골드 드래곤의 심장을 구해 온다니.
단신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만일 가능하다고 해도 그 뒤도 문제였다.
“제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면 심장이 멀쩡하다고 해도 쉬이 살아남지는 못해.”
에르퀼은 냉정하게 메이딜리언을 끊어 냈다.
메이딜리언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악몽은 현실과 너무 많은 것들이 달랐다.
치유의 마력도 쓸 수 없고, 제게는 아직 그럴 듯한 세력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무력하게 윈터를 보낼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 주십시오.”
메이딜리언은 재차 에르퀼을 붙들었다.
간절한 붉은 눈의 청년을 바라보던 에르퀼이 대답했다.
“예언을 이뤄 보는 것은 어떤가?”
“…….”
“자네가 예언을 이루고 소원을 빌면, 신께서도 들으시겠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피어난 희망이었다.
메이딜리언은 뭔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개의 성물.
현실에서는 들은 적도 없는 그것들을 찾아내려 전 대륙을 헤집고 다녀야 하겠지만 상관없었다.
윈터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는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에르퀼의 조언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봤어야 했다.
별자리가 끊겨 있다는 게 과연 무슨 뜻인지를.
* * *
윈터 블라디미르는 열여덟 살의 나이로 죽었다.
어린 시절 개화를 시작한 거대한 마력은 그녀의 몸을 한없이 나약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미친 듯이 폭주해 기어코 황도의 반을 날려 먹었다.
성물을 찾기 위해 대륙을 돌아다니던 메이딜리언은 뒤늦게 황도에 도착했다.
거대한 마력 폭풍을 헤치고 간 곳에서 윈터는 홀로 외로이 피를 토하고 있었다.
‘윈터!’
메이딜리언은 윈터를 살릴 수 없었다.
제 마력은 남의 목숨은 앗아 가도 되돌려줄 수는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죽어 가는 그녀를 품에 안고 가지 말라고,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고 울며 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누구도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너.’
죽어 가는 와중에도 윈터의 금빛 눈동자는 활활 타올랐다.
영영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안간힘을 써서 메이딜리언을 붙든 채 윈터는 말했다.
‘절대, 죽지 마.’
따스함이라곤 없는 냉랭한 말투였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하는 눈빛에 염려가 가득하다는 것을.
그가 기억하는 윈터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명령이야.’
울컥, 윈터가 피를 토했다.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지켰다.
혹시라도 저를 따라 죽지는 않을까 싶어, 마지막까지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걱정했다.
‘살게요.’
메이딜리언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활짝 피었던 꽃이 시드는 것처럼, 서서히 윈터의 눈에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숨이 사그라들며 마력의 폭풍도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메이딜리언은 영원히 이렇게 그녀와 둘이서 폭풍 속에 멈춰 있고 싶었다.
‘살아서, 당신을 다시 되살릴 거예요.’
윈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또 그 소리, 하고 핀잔을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악착같이 메이딜리언을 붙들고 있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그리고 그때는…….’
서늘하게 식어 가는 윈터를 끌어안은 채로 메이딜리언은 끊임없이 속삭였다.
살겠다고. 살아남을 거라고. 그래서 마침내 당신을 되살릴 거라고.
‘그때는 절대 당신을 놓지 않을 거예요.’
작고 가여운 여자는 그렇게 죽었다.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졌다.
무겁고 굵은 빗줄기는 누가 던지는 돌팔매처럼 아프게 어깨를 때렸다.
잠든 것처럼 평온한 얼굴을 메이딜리언은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주위로 흰 꽃이 놓였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윈터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직 아니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윈터는 죽지 않았다고.
연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 * *
메이딜리언은 걸었다.
끊임없이 앞으로 걸었다.
제게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조리 부수었다.
의식이 때때로 뚝뚝 끊겨서,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래도 그는 윈터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녀가 죽지 말라고 했으니, 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살아 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제발 정신 차려, 이 미친놈아!”
눈앞에서 불꽃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메이딜리언의 입술이 달싹였다.
“……칸나.”
예언의 주인공. 불꽃에서 태어난 여자.
메이딜리언은 그녀가 필요했다.
윈터를 되살려야 했으니까.
가능하다면 황위도 있어야 했다.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비해서, 골드 드래곤의 심장도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공작가는 대체 왜 부순 거야. 왜!”
메이딜리언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뒤늦게 피로 얼룩진 제 손이 눈에 들어왔다.
공작가라.
그러고 보니 블라디미르 공작가가 오늘 재로 변했다.
후계를 잃은 공작가는 알버트를 차기 후계로 내세우려 했다.
메이딜리언은 감히 윈터의 자리를 그런 자가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눈에 닿는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그뿐이었다.
“……비켜.”
메이딜리언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혀로 간신히 말을 만들어 냈다.
그는 이미 제대로 된 사고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장애물들을 도륙하고 무찌르고 부술 뿐이었다.
칸나는 그런 메이딜리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고집스레 그의 앞을 막았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너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
“무슨 큰일?”
고삐 없이 날뛰는 짐승의 칼날은 아군이고 적군이고 가리지 않았다.
모두가 입을 모아 메이딜리언은 위험하다고 했다.
결코 황위에 오를 수 없는, 세상의 악과 같은 존재라고 일컬어졌다.
칸나는 차마 제 입에 올리기 어렵다는 듯 우물쭈물했다.
메이딜리언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1황자를 사랑하는 건 상관없어.”
갑작스러운 말에 칸나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뭐? 너 갑자기 그게 무슨…….”
“하지만 너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곁에 있어야 해.”
비이성적인 집착으로 메이딜리언의 붉은 눈이 번들거렸다.
“황위도, 너도, 전부 내 차지야.”
“……미친놈.”
칸나가 질린다는 듯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한때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그의 목줄을 풀어주고, 제멋대로 죽어 버린 여자.
“그러니까 비켜.”
메이딜리언은 칸나를 지나쳤다.
그의 얼굴이 온기라곤 한 점 없이 싸늘했다.
“너, 그러다 죽을지도 몰라!”
멀어지는 메이딜리언의 뒤에 대고 칸나가 외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어차피 상관없었다.
메이딜리언의 모든 목적은 윈터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에게 이것이 꿈인지 악몽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기를 쓰고 발버둥을 쳤다.
윈터를 되살리기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딜리언은 실패했다.
“…….”
멍한 눈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배를 뚫고 나온 싸늘한 은백색 칼날이 내장을 날카롭게 헤집었다.
입가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독이 발려져 있었던 것인지 순식간에 혈관이 타는 듯 고통스러웠다.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메이딜리언은 절망했다.
이제 곧, 윈터를 살리기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음울한 그의 시선이 검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입술을 짓씹으며 잘게 떨고 있는 푸른 머리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현실에서도, 악몽 속에서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메이딜리언은 그 이름을 찾아 냈다.
“……엘리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