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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2. 5화 (142/150)


 

외전2. 5화

한쪽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메이딜리언은 금세 멀어졌다.

“야.”

입술을 삐죽이던 윈터가 작게 그를 불렀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일말의 미련도 없이 착실히 멀어졌다.

“야, 거기 너!”

윈터가 조금 더 목소리를 돋웠다.

그러나 이번에도 메이딜리언은 돌아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돌멩이들을 죄다 멀찍이 발로 차던 윈터가 끝내 잔뜩 표정을 구겼다.

마침내 그녀가 버럭 외쳤다.

“에이씨, 메이!”

순간 메이딜리언은 소름이 돋았다.

우뚝 발을 멈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 그렇게 분한지 씨근덕대는 그녀의 얼굴이 낯설었다.

생각해 보면 현실의 윈터는 한 번도 제게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제 이름, 알고 계셨어요?”

“누굴 바보로 알아?”

메이딜리언은 쪼르르 다시 윈터에게로 달려왔다.

“같이 가.”

여전히 툴툴거리긴 했지만, 크게 선심 썼다는 듯 윈터가 말했다.

“대신 내 발목 잡으면 진짜 가만 안 둘 줄 알아, 알겠어?”

“네, 안 그럴게요.”

메이딜리언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내 두 사람은 순식간에 담장 아래 개구멍을 통해 공작가를 탈출했다.

* * *

메이딜리언은 윈터를 글로바인 가 421번지로 안내했다.

선황 친위대 아르카의 본거지인 제니마 상회가 있는 곳이었다.

현실에서는 이 시기에 둘 다 황도 지리를 잘 모르는 바람에 불량배에게 쫓기기도 하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꿈속의 메이딜리언은 달랐다.

“넌 자주 나와 봤나 봐?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

말투는 시비 거는 것 같아도 윈터의 표정에는 감탄이 가득했다.

“꽤 익숙해요.”

“그래서, 여기가 어딘데?”

“제니마 상회요.”

“약초상……?”

상회를 슬쩍 보던 윈터는 안에서 풍겨 나오는 익숙한 향기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험상궂고 커다란 곰 같은 남자가 상회 앞을 알짱거리는 두 꼬마에게 다가왔다.

한타였다.

“이봐, 여기는 너희 같은 꼬맹이가 있을 곳이 아니…….”

평소처럼 퉁명스러운 말투로 잡상인 쫓아내듯 말을 건네던 한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앞에 나타난 두 사람 모두 죽어 간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뭘 제대로 먹지도 못한 건지 병색이 완연한 바싹 마른 여자애와 상처투성이의 꼬질꼬질한 남자애라니.

특히 메이딜리언에게서 그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그 이유를 모를 리 없는 메이딜리언은 최대한 시간을 단축하고자 말했다.

“가서 엘리슨에게 전해.”

“예, 예?”

“메이딜리언 카데르 제니어스가 왔다고.”

* * *

제가 실종된 2황자임을 밝히고 난 뒤에도 악몽은 계속되었다.

꿈속에서 메이딜리언은 착실히 나이를 먹어 갔다.

에른스트 후작가와 접촉하고, 제니마 상회의 도움으로 제 자리를 찾기 위해 기를 쓰면서도 메이딜리언은 계속 공작가에 남았다.

그의 의지는 물론이고, 윈터도 그것을 바랐다.

물론 직접 표현한 건 아니지만.

‘내 화풀이 인형을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대체 다들 왜 난리야!’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쇠약해지는 윈터는 여전히 공작가의 폭군이나 다름없었다.

공작은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 주려고 했다.

비록 마력 개화 때문에 함께할 수 없을 때가 더 많았지만 그래도 메이딜리언은 이 세계에 그녀의 화풀이 인형으로 남았다.

“아가씨.”

작게 노크한 메이딜리언은 안쪽에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어두웠다.

메이딜리언은 금세 침대에서 얕은 기침을 하는 윈터를 찾아냈다.

어둠은 그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덕분에 바싹 마른 등이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

현실에서는 저 정도로 병을 심하게 앓지는 않았는데, 뒤늦게 아이셀을 다시 수소문해 봤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해 마누트라 섬으로도 사람을 보내 연락해 봤지만 거기에도 대현자는 없었다.

이 악몽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현실과 많은 것이 달랐다.

“일어나 보세요, 아가씨.”

“……뭐야.”

“오늘 저녁 식사를 거르셨다면서요.”

메이딜리언은 이 세계에서 제 마력을 치유력으로 변환할 수 없었다.

분명 원리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했다.

어차피 윈터에게는 치유의 마력이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묽은 수프라도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필요 없어. 가져가.”

“아가씨.”

윈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직 약제로 날뛰는 마력을 억제하느라 그녀는 무척이나 예민했다.

작은 것에도 짜증스러워하며 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윈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다들 조심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그녀에게 다 들리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습게도 윈터는 그런 메이딜리언에게 가장 덜 신경질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윈터가 식사를 거르거나 치료를 거부하는 일이 있으면 꼭 그가 불려 왔다.

다행히 메이딜리언은 이미 윈터를 달래는 데에는 도가 텄다.

“이거 다 드시면, 이따가 밤에 몰래 같이 놀러 나갈게요.”

그의 제안이 솔깃했는지 윈터의 어깨가 움찔했다.

잔뜩 날을 세운 기세도 좀 느슨해졌다.

간이 테이블에 가져온 수프를 내려놓은 메이딜리언은 천천히 윈터를 일으켰다.

손에 닿는 무게가 부쩍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메이딜리언은 윈터의 등에 베개를 댔다.

다행히 윈터는 순순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메이딜리언은 어린애 들듯이 가뿐하게 그녀를 부축했다.

“넌 점점 튼튼해지는구나.”

손으로 눌러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한 팔을 보며 윈터가 쓸쓸히 말했다.

“아가씨도 곧 그렇게 될 거예요.”

“웃기는 소리.”

메이딜리언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는 묵묵히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수프를 가져와 한 숟갈씩 윈터에게 먹였다.

목으로 음식물을 넘기는 것 자체가 고역이라는 듯 식사는 굼뜨기만 했다.

채 몇 숟갈 먹지도 않고, 윈터는 금세 팩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지겹지 않니?”

“뭐가요.”

“이렇게 사는 거.”

말과는 달리 이불을 움켜쥔 그녀의 손은 잘게 떨고 있었다.

저녁도 거르고 싶어서 거른 게 아니라, 그저 소화를 못 해 내는 것뿐이었다.

윈터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서우세요?”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윈터는 여전히 고집스레 고개를 돌린 채였다.

그녀의 목이 크게 울렁거렸다.

“같이 죽어 드릴까요?”

메이딜리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수프를 옆으로 치우는 일상적인 행동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 때문에, 윈터는 순간 제가 뭘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뒤늦게 흠칫한 그녀가 일갈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가 아가씨 살릴 거예요.”

“또 그 소리.”

윈터는 작게 실소했다.

“나는 너한테 잘해 준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우리가 그럴 만한 사이인가?”

그녀의 말이 맞았다.

꿈속의 윈터는 그에게 애정 한 조각도 없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 주세요. 이건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잠시 멈칫하던 윈터가 물었다.

“……뭐가 좋은데.”

그러면 메이딜리언은 버릇처럼 대답한다.

마치 아주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아가씨가요.”

윈터는 그 대답을 예상했으면서 일부러 물어봤다.

늘 메이딜리언의 말이 당황스럽고, 어이도 없고 떨떠름하다는 반응만 돌려줬지만.

“…….”

평소와 달리 이상하게 오늘은 윈터가 잠잠했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더니, 뒤이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뭐. 나쁘진 않네.”

테이블을 치우던 메이딜리언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황급히 시선을 돌린 윈터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메이딜리언은 그대로 제 심장이 녹아 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의 눈동자가 줄곧 제게 고정되어 있자 하는 수 없이 윈터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가. 잘 거야.”

“……네, 그럴게요.”

메이딜리언은 윈터를 다시 침대에 눕혀 주고 꼼꼼히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어차피 시녀들이 다시 와서 그녀의 잠자리를 봐 줄 테지만, 그래도 제가 해 주고 싶었다.

윈터도 당연하다는 듯 메이딜리언의 시중을 받았다.

마치 잔뜩 털을 곤두세우던 고양이가 온전히 제게 몸을 맡기는 것만 같아 메이딜리언의 심장이 또 한 번 뻐근해졌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씨.”

한 손에 쟁반을 든 채로 메이딜리언은 바깥으로 나왔다.

“메이딜리언.”

“……안녕하세요.”

문 앞에는 나일라가 서 있었다.

온 지 꽤 된 것 같은데 왜 들어오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다.

메이딜리언은 다시 소리 없이 문을 열어 주려 했지만 나일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지 마. 어차피 내가 볼일이 있는 건 네 쪽이니까.”

“무슨 일이신데요?”

“널 찾아온 손님이 있다.”

“……손님이라고요?”

뜻밖의 말에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누가 이 늦은 시간에, 심지어 공작저로 저를 찾아온단 말인가.

설사 찾아왔다고 해도 그걸 왜 나일라가 알려 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순순히 그녀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갔다.

그는 곧 이 모든 의문을 해소할 만한 손님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신은…….”

“날 아는가, 젊은이?”

“대현자.”

빙그레 웃는 노파의 얼굴이 익숙했다.

세간에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도 한참이 지났는데, 메이딜리언이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알고 있자 에르퀼은 내심 놀랐다.

놀란 건 메이딜리언도 마찬가지였다.

대륙은 물론이고 마누트라 섬까지 사람을 보내 대현자를 찾았을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설마 직접 자신을 찾아왔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저를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습니까?”

“당신이 예언의 적합자인 것 같아 찾아왔네.”

반사적으로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동안 그가 에르퀼을 마주했을 때는 항상 두 사람 사이에 ‘윈터’라는 공통의 화제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고 일컬어지는 대현자이니 만큼 이번에도 윈터의 병이나 그 치료에 관한 이야기 때문에 찾아온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 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무슨 예언 말입니까?”

제 앞에 놓인 차를 호록 마신 에르퀼이 뜸을 들였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참 만에야 침묵을 깬 에르퀼이 입을 열었다.

“별의 예언.”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내게 오래전 계시가 내려왔네. 여섯 개의 성물과…… 불꽃에서 태어난 여자에 대한 예언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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