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 3화
메이딜리언도 나일라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저 화풀이라도 하듯 건물 벽에 주먹질해 댔을 뿐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머저리 같으니라고!”
이 나약한 몸은 윈터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애써 분을 참아 내며 메이딜리언이 씨근덕거렸다.
그는 머리를 식히며 기억을 더듬었다.
며칠은 기다려야겠지만, 윈터는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부를 것이다.
“……그래, 그럴 거야.”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 메이딜리언이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가뜩이나 도움이라고는 안 되는 하찮은 마구간지기의 아들인데, 이렇게 꾀죄죄한 몰골로 있다가는 윈터에게 병이나 더 얻어다 줄 것 같았다.
메이딜리언은 피와 먼지로 얼룩진 제 옷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
잠깐 머리가 아찔했다.
이렇게 더러운 걸 어떻게 윈터는 스스럼없이 만졌을까.
“최악이군.”
제 꼴을 짧게 평한 메이딜리언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윈터가 깨어나는 동안 최대한 멀쩡한 꼴로 만들어 두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 * *
윈터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동시에 공작가 사용인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그녀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문도 들렸다.
알버트는 윈터에게 끌려가 자근자근 밟히고 근신령을 받아 공작령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그동안 메이딜리언은 그저 인적 드문 창고에 숨어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꿈속에서 며칠이 지났다.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꿈속이라는 감각은 기묘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메이딜리언의 신경을 긁는 것은 ‘과연 윈터가 언제 자신을 부를까’에 대한 것이었다.
현실의 윈터가 분명 있는데도 불구하고, 메이딜리언은 어째서인지 이 꿈속의 윈터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꿈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도 몰랐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메이딜리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고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인간의 것이었다.
“허억, 허억, 하아, 찾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스스로 창고 밖으로 기어 나온 메이딜리언을 보고 하녀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과거의 기억 속에서도 윈터의 명령으로 그를 데리러 왔던 바로 그 하녀였다.
“너, 나랑 가자.”
하녀는 메이딜리언을 끌고 그대로 저택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지저분한 몰골을 보고 경악해서 씻고 입히느라 한참은 더 고생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일을 좀 덜었다.
메이딜리언이 미리 제 몸을 씻고 닦고 한 데다 저를 심심하면 불러다 패는 마구간지기를 피해 숨어 있던 터라 크게 상처가 나거나 부러진 곳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멀끔한 옷으로 갈아입는 일만 마치고 메이딜리언은 윈터의 방 앞에 설 수 있었다.
“아가씨, 꼬마를 데려왔습니다.”
하녀는 오는 내내 아가씨 앞에서 주의해야 할 것들을 늘어놓았다.
마치 잔뜩 골이 난 맹수를 앞에 둔 것만 같은 태도에 메이딜리언은 실소했다.
그런 그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한 건지 하녀는 하늘이 노래진다는 듯 이마를 짚었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윈터가 메이딜리언에게 손찌검 같은 걸 할 리가 없었으니까.
“들어와.”
곧 윈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녀도 메이딜리언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물론 이유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지만.
이내 문이 열리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느슨하게 앉아 있는 윈터가 보였다.
“블라디미르의 소공작, 윈터 블라디미르 아가씨를 뵙습니다.”
메이딜리언의 인사에 다들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잘것없는 마구간지기의 아들이라기에는 말투나 행동에 묘하게 기품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윈터가 픽 웃었다.
“화풀이 인형치고는 행색이 나쁘지 않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윈터가 그대로 메이딜리언의 머리채를 잡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메이딜리언은 당황했다.
다른 하녀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애써 동요를 감출 뿐이었다.
“다들 나가.”
“아, 아가씨…….”
“두 번 말 안 해. 아니면 이 자식 대신 내게 자근자근 밟힐 용기 있는 인간이라도 있나?”
헉, 하고 헛숨을 들이켠 하녀들이 일제히 바깥으로 나갔다.
잔뜩 겁을 집어먹고 물러나는 그들을 보며 윈터는 그저 코웃음을 쳤다.
메이딜리언은 반항 한번 없이 그저 윈터에게 잡혀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보다 큰 남자애를 눕혀 놓고 때릴 만큼 건강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은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다니는 마구간지기의 아들 하나도 제 맘대로 하기 어려워 보였다.
머리채를 휘어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으니까.
“……짜증 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윈터는 털어 내듯 메이딜리언의 머리를 밀치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 잠깐의 움직임도 무리가 되는 듯 숨이 거칠어진 상태였다.
치밀어오르는 분을 채 갈무리하지도 못한 채 윈터의 예리한 시선이 메이딜리언에게 꽂혔다.
“너.”
“예, 아가씨.”
“아까부터 뭐가 좋다고 웃는 거야?”
자신이 웃고 있었다고?
메이딜리언은 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윈터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메이딜리언은 얼간이처럼 히죽대고 있었다.
느리게 눈을 끔벅이던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좋아서요.”
“그러니까 뭐가 그렇게 좋…….”
“아가씨가요.”
뚝, 윈터의 말이 멎었다.
생전 처음 듣는 이국의 말인 것처럼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 뭐?”
보기 드물게 당황하는 낯에 메이딜리언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해졌다.
그는 윈터와 똑바로 눈을 맞추고 천천히 다시 말했다.
“아가씨가 좋아서요.”
“……너 혹시 미쳤니?”
윈터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저 비실비실한 마구간지기의 아들이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대놓고 면박을 주는 말에도 메이딜리언은 그녀의 말마따나 그저 미친놈처럼 웃었다.
“아가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죠.”
“참나, 내가 죽으라면 죽기라도 할 것 같다?”
“원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담담하게 돌아오는 말에 윈터의 어깨가 파드득 떨렸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진심이라는 걸 윈터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문득 윈터는 머리가 지끈거리며 어지러웠다.
“그냥 화풀이 인형인 줄 알았더니 어디서 이런 변태 또라이가 나타나서는.”
메이딜리언의 기억 속 윈터는 상처투성이의 어리숙한 그를 능숙하게 보듬던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가와 굳게 빗장이 걸려 있던 마음의 문을 비집고 들어온 유일한 존재였다.
그가 가진 기억과는 달리 지금 메이딜리언을 바라보는 눈빛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시종일관 저를 화풀이 인형이다 뭐다 하며 부르는 것은 위악이 아니었다.
정말 하찮은 것을 보듯 냉랭한 시선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냥 윈터와 꿈속에서도 함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내가 오늘 너를 이렇게 부른 건, 내가 너 때문에 쓰러졌기 때문이야. 알고 있어?”
“네, 알고 있습니다.”
“이익! 네가 알긴 뭘 알아! 다들 내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수군거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순식간에 나약해진 몸은 윈터를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잔뜩 예민해져 털을 곤두세운 짐승처럼 윈터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 물건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본능적으로라도 제게 날아오는 물건들을 피할 법도 하건만, 메이딜리언은 그저 윈터에게 밀쳐졌던 그 자세 그대로 굳건히 그 자리에서 버텼다.
이번에도 먼저 지친 것은 윈터였다.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는 윈터에게 메이딜리언은 익숙하게 물을 한 잔을 떠서 내밀었다.
분명 오늘 처음 와 보는 공간일 텐데, 그녀의 화풀이 인형은 퍽 익숙하게 방을 돌아다녔다.
그런 메이딜리언을 시선으로 쫓던 윈터는 메이딜리언이 버릇처럼 저와 눈을 맞추자 황급히 컵을 빼앗아 들었다.
그 사이 메이딜리언은 다시 제가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고분고분한 태도가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윈터는 자꾸만 자기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짜증이 올라왔다.
“웃지 마.”
“네.”
“거기 서 있지도 마.”
“그럼 앉을까요?”
“안돼! 앉지도 마!”
“으음…….”
“목소리도 내지 마. 숨도 쉬지 마.”
메이딜리언은 그저 순순히 윈터가 시키는 대로 했다.
정말로 숨을 참는 것처럼 충혈되는 그의 눈동자를 보고 윈터는 기겁해서 외쳤다.
“아니야, 취소! 취소라고, 이 멍청아!”
벌떡 일어난 윈터가 메이딜리언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마침내 가까이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거칠어진 숨을 고르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그 호흡이 일정한 속도로 맞춰졌을 때, 메이딜리언이 눈을 접어 웃었다.
마치 불에 덴 듯 뜨거운 시선에 윈터가 화다닥 뒤로 물러났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꾸만 심장이 울렁거려 윈터는 제 가슴을 꾹 내리눌렀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그런 그녀의 이상을 기민하게 눈치챈 메이딜리언이 얼른 다가와 물었다.
기껏 윈터가 벌려 둔 거리는 금세 소용이 없어졌다.
저를 괴롭히면 괴롭혔지, 친절이라고는 요만큼도 베푼 적 없는데.
대체 이 미친놈은 제게 왜 이러는 걸까.
윈터는 잔뜩 경계 어린 시선으로 메이딜리언을 노려보았다.
메이딜리언은 그 날카로운 적대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윈터의 상태였다.
“의원을 부를까요?”
“소란 피우지 마. 그럼 진짜 죽여 버릴 거야.”
당장이라도 바깥으로 나가 의원을 불러오려는 듯한 메이딜리언을 윈터가 불러 세웠다.
그녀의 말이 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행히 메이딜리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그 뒤통수만 보고 있어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서 윈터는 끝내 입을 열었다.
“그대로 그냥 나가. 사라져. 그리고 너, 당분간 내 눈에 띄지 마. 알겠어?”
“……네, 아가씨.”
메이딜리언은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를 마주한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안쪽에서 뭐가 깨지는 소리와 악을 쓰는 소리가 한참 났었는데, 바깥으로 나온 마구간지기의 아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