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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1. 5화 (137/150)


 

외전1. 5화

* * *

마누트라 섬에서 지내는 윈터의 생활은 단순했다.

식사하고, 실험을 받고, 리어트를 만나고.

사실상 그게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윈터는 종종 바닷가에 나가 그림을 그렸다.

손바닥만 한 종이에는 섬 곳곳의 꽃이나 풀, 모래사장과 작은 게, 조약돌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전부 한 번씩은 윈터가 ‘예쁘다’라고 말했던 것들이었다.

“또 그림 그리고 있네.”

오늘 윈터는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바닷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며 리어트가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가까이 오기도 전에 미리 기척을 알아채고 돌아보곤 했는데, 그림에 얼마나 열중했던 건지 그가 오는 것도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화들짝 놀란 윈터가 손에 들고 있던 그림을 얼른 뒤로 숨기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어, 언제 왔어?”

“방금.”

짧게 대답한 리어트가 윈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사적으로 그림을 숨기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힐끔 눈치만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작게 실소한 리어트가 물었다.

“그건 뭐야?”

“어, 어어?”

리어트의 손가락을 따라 윈터가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눈길을 끈 것은 윈터가 가져온 그림 도구 옆에 놓인 작은 상자였다.

상자 안에는 그림 속에도 있었던 자그만 조약돌이나 예쁘게 말린 꽃 따위가 들어 있었다.

리어트의 시선이 상자로 향하자 윈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냥…….”

평소와 달리 심상치 않은 반응이었다.

부득불 제게 숨기려 드는 윈터를 보고 사실 리어트는 내심 기대했다.

혹시나 저 그림이며 상자 안에 든 물건들을 자기한테 주는 건 아닐까 하고.

“곧 생일이거든.”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의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생일? 누가?”

“있어.”

수줍게 미소 짓는 얼굴이 낯설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윈터와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맹세코 저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리어트의 심장이 따끔거렸다.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질투였다.

일 년 내내 그에게 전해 줄 선물을 고르고, 어떤 고통이 찾아와도 그를 위해 버티고,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를 지켜 주고 싶어 했다.

윈터의 세상은 온전히 그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게는 윈터가 유일한데, 윈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리어트는 싫었다.

어린 마음에 화가 나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것뿐이지만, 언젠간 더 좋은 것들을 선물해 주고 싶어.”

그의 마음은 전혀 모른 채로, 윈터가 꿈에 부풀어 말했다.

리어트는 괜히 심통이 나서 불퉁한 말투로 핀잔을 줬다.

“이 작은 섬에서 그런 걸 어떻게 해?”

“할 수 있게 만들어야지.”

돌아보는 얼굴은 확신에 가득했다.

당시의 리어트는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기억이 있는 순간부터 그는 마누트라 섬이라는 좁은 세계에서만 지냈으니까.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섬에서 점점 자라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마침내 윈터는 제가 한 말을 이뤘다.

* * *

“그거 알아?”

오래전 기억을 되돌아보며 리어트가 픽 웃었다.

잠시 공작령으로 내려간 윈터를 대신해 칼리스타에 방문했던 데보라가 난데없이 건네진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를요?”

“칼리스타가 생긴 이유.”

멀쩡히 일하다 말고 갑자기 칼리스타가 생긴 이유를 제게 왜 묻는단 말인가.

평소에도 선문답 같은 알쏭달쏭한 말을 자주 하는 리어트를 아는 데보라는 순순히 그의 대화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으음……. 그냥 정보 조직 아니에요?”

처음엔 윈터가 가진 신묘한 예측을 이용해 정보 조직을 구성했다.

그 뒤로는 아이셀과 공동으로 개발한 마법 아티팩트를 팔며 자금을 쌓았다.

메이딜리언이 황제가 되는 데에도 크게 한몫을 했고, 나아가 이번엔 칼로프에도 그 힘을 쏟아 델이 황위를 찬탈하는 것도 도왔다.

이제는 제국에 수인족들이 자리 잡는 것을 도와주기 위한 정책을 만들어 내는 데에도 힘을 보태고 있었다.

“처음엔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의 생일선물을 챙겨 주려고 만든 거였어.”

“네에?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

데보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떡 벌렸다.

리어트가 말하는 여자와 남자가 제가 주군으로 모시는 사람들이라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난 아마 거하게 사기를 당한 것 같아.”

리어트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바보 같던 어린 시절은 맹목적으로 윈터를 좇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 이뤄 주고 싶었다.

제 꿈을 포기해서라도, 언젠가 섬을 떠날 윈터의 뒤를 따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윈터는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 꿈, 내가 살게.’

윈터에게 꿈이 있는 것처럼, 리어트에게도 꿈이 있었다.

제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포부를 밝히고 언젠가는 꼭 이루겠다며 당당하게 외쳤던 꿈.

치기 어리고, 어리석었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도 모르고 계획도 없던 무모한 꿈에 윈터는 기꺼이 투자했다.

제 꿈을 이뤄 주겠다고, 같이 이루자고 하는 말에 혹했다.

정확히는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에 홀랑 넘어간 것이지만.

“근데 지금은 선물 가게라고 하기엔 너무 커졌잖아요?”

“하하, 그건 그렇지.”

‘선물 가게’라는 말에 리어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단순한 데보라의 말은 의외로 핵심을 찔렀다.

아직 낯설기는 하지만 새로운 정권은 윈터를 필두로 수인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칼리스타를 통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수인족들은 점점 사회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메이딜리언은 숙청된 크비누스의 잔재들을 처리하고 그 빈자리에 시민권을 준 수인족들을 채워 넣었다.

권력과 재력과 제도의 힘으로 수인족들이 함께하는 세상은 꽤 빠르게 찾아오게 되었다.

“덕분에 요새 아가씨는 아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구요.”

“하긴, 그렇기야 하겠지. 벌인 일이 좀 많아?”

“전 이제 가끔은 쉬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작게 투덜거리는 데보라의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건지, 예전의 쌩쌩하던 얼굴은 어디 가고 잔뜩 푸석해진 모양새였다.

리어트가 히죽 웃으며 데보라에게 말했다.

“그냥 이참에 푹 쉬어. 어차피 네가 쉬어도 윈터는 아무 말도 안 할걸?”

“이익! 그건 안 되죠! 전 아가씨의 보좌관이란 말이에요.”

발끈한 데보라가 다시 활활 불타올랐다.

그녀의 말마따나 공작이 된 윈터는 무척이나 바빴다.

제가 벌려 놓은 일이 아무리 많아도 좀 쉬엄쉬엄하면 좋을 텐데, 옆에 도와주는 사람이 넘쳐도 윈터는 꼭 한 번씩은 모든 걸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하고 넘어가야 했다.

예전에는 약한 몸이 따라 주지 않아서 못했던 일들이었지만, 골드 드래곤의 심장을 통해 마력도 체력도 보통 사람을 훨씬 웃돌게 된 덕분에 꽤 신이 난 모양이었다.

물론 곁에 있는 그 자식은 아주 안달복달하는 것 같지만.

“그래서, 그 남자가 누군데요?”

“있어. 재수 없는 어린놈.”

쌤통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킬킬대고 있는데 타이밍도 좋게 데보라가 물어 왔다.

리어트는 칼리스타를 만든 이유가 된 그 남자에 대해서 유감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의 말에서 악의가 뚝뚝 떨어져서, 데보라는 더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럼 리어트 씨는 뭐 받은 거 없어요?”

“어? 뭐라고?”

뜻밖의 질문에 리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여자한테 말이에요. 선물 같은 거 못 받았어요?”

“그럴 리가.”

리어트가 거리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인간과 수인족들이 섞여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지나치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나한테는? 나한테는 뭐 다른 선물 같은 거 없어?’

철이 없던 어린 시절,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모르던 메이딜리언을 질투하며 리어트가 물었던 적 있다.

저 또한 매해 윈터가 고심해서 고른 선물들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리어트는 자신도 메이딜리언처럼 윈터의 인생에서 크게 한 부분을 차지하고 싶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윈터는 언제나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꾸 그렇게 재촉하면 주고 싶던 마음도 싹 사라지겠지?’

정정한다.

미소만 천사 같고, 거기에 담긴 말은 아주 매서웠다.

‘참나, 나름 네 유일한 친구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조금만 기다려.’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다가도 문득 윈터는 진지해지곤 했다.

‘언젠가 내가 수인족들의 세상을 열 거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확고한 미래를 그리는 금빛 눈동자는 늘 리어트의 말을 잃게 했다.

그저 속절없이 쿵, 쿵, 요란스럽게 뛰어 대는 심장 소리를 감출 뿐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도와줘.’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이던 어린애는 사실 무척이나 커다란 사람이었다.

제 날개로 온 세상을 다 감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을 때마다 리어트는 안도했다.

‘잊은 거 아니지? 내가 네 꿈 샀잖아.’

그때 그 웃음소리를 리어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니, 사실 윈터와 함께한 순간은 모두 선명하게 그의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매일 제 심장을 부수려 날뛰는 마력과 싸우면서 윈터는 앙숙 같던 수인족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더 많은 수인족을 만나 그들을 칼리스타로 포섭했고, 마침내 그의 꿈을 이뤄 주었다.

정말로 그가 바라던 세상을 열어 주었다.

“아주 많은 걸 받았지.”

언젠가 꿈에서만 그리던 장면들이 현실이 되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렇기에 리어트는 매 순간 윈터에게 반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내일도, 그다음 날에도 그럴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나 반한 사람이 한참 손해라고, 그는 이번에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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