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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1. 3화 (135/150)


 

외전1. 3화

* * *

리어트의 표정은 점차 밝아졌다.

새벽같이 나가서 해가 지고 나서야 마을로 돌아오는 일상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그 사이에 끼어든 윈터라는 존재가 그를 웃게 했다.

두 사람이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다.

윈터는 황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고, 리어트는 수인족 마을에서 생긴 일들을 이야기했다.

바닷가에 굴러다니는 작고 동그란 돌멩이 중에 가장 예쁜 것들을 고르는 시시하고 하찮은 일들도 윈터와 함께라면 늘 즐거웠다.

윈터를 만나러 가며 숲 곳곳에서 꺾은 꽃들을 모아다가 내밀면, 윈터는 세상에서 가장 기쁜 얼굴로 웃어 주곤 했다.

“요새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냐?”

해가 뉘엿뉘엿 지고, 막 집으로 들어선 리어트가 우뚝 멈춰 섰다.

늘 자신이 뭘 하든 관심도 없던 아버지가 오늘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에도 아버지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뭘, 하고 다니냐고, 물었다.”

이를 악물고 내뱉는 따박따박 끊어지는 발음들에 리어트가 흠칫했다.

그는 슬쩍 시선을 피한 채 대답했다.

“그냥 사냥도 하고, 여기저기 구경도 하죠. 딱히 특별한 걸 하는 건 아니에요.”

“너 혼자?”

“네?”

“그걸 너 혼자 하느냐고.”

리어트가 눈을 깜박였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짧은 망설임이 스쳤다.

문득 등 뒤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럼요, 당연하…….”

리어트가 미처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짝, 소리가 나며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리어트가 멍하니 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뺨이 얼얼했다.

분하다거나, 아프다거나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고통이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리적인 눈물이 리어트의 눈가에 고였다.

“아버지,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왜 이러냐고? 네가, 네가 감히!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해!”

“거짓말이라뇨!”

“마을 애들이 말해 주더구나.”

“…….”

“네가 저 아래, 대현자님 댁에 있는 인간 아이와 어울린다고.”

고작 그 몇 마디 말로도 리어트는 훤히 상황을 그릴 수 있었다.

평소에 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마을 애들이 제 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가 리어트가 인간 아이와 어울린다는 말을 속살거렸겠지.

리어트는 인간의 배에서 태어난 존재였고, 인간들의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수인족들은 그런 인간들을, 리어트를 경계하고 배척하기 일쑤였으니까.

어른들도 알게 모르게 리어트를 무시하곤 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늘 리어트를 불러다 앉혀놓고 호되게 가르쳤다.

“몇 번이나, 내가 몇 번이나 인간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했잖느냐!”

그 말에 단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리어트는 아버지의 말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은 늘 그의 발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아서, 그는 여전히 인간이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도저히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요?”

어째서 인간을 가까이하면 안 되는지.

나조차도 인간의 배 속에서 태어났는데.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나의 어머니조차도 인간이었는데.

“인간은 위험해.”

아버지의 말은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의 말처럼 인간은 위험할 수 있을지 몰라도, 리어트가 만나는 인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윈터였다.

그리고 윈터는…….

“그 애는 내 친구예요.”

리어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늘 겉돌기만 하던 그의 곁에 다가와 준, 이상하고 연약하고 어른스러운 유일한 친구였다.

리어트의 말에 그의 아버지는 실소했다.

“네까짓 게 인간과 친구 같은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

“어떤 수인도, 인간과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 알겠느냐?”

아버지는 단언했다.

자신과 똑같은 제비꽃색 눈동자가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리어트는 그 눈동자가 마치 제 안에서 속삭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봐,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잖아. 인간과 수인은 결코 함께하지 못해. 너도 이미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키득키득, 귓가에서 환청처럼 비웃음 소리가 울린다.

리어트의 속이 화르륵 불타오른다.

그는 제 아버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몸의 절반은 인간의 피예요.”

“아니, 네가 인간답지 않은 외양을 한 이상 너는 수인이다.”

짐승의 것처럼 날카로운 동공 주위를 툭툭 두드리며 아버지가 그를 부정했다.

“아무리 꼬리를 감추고 모습을 가려도 너는 수인이야.”

리어트가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새빨간 노을이 집 안을 가득 비췄다.

마치 온 마을이 불에 타고 있는 듯 붉게 물들었다.

“절대 인간에게 속할 수 없어.”

“인간에 섞이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리어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가슴이 갑갑했다.

아버지가 저렇게 말할 때마다 그는 제 존재 자체가 죄악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인간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넌 뭐냐?”

작게 실소하며 아버지가 되물었다.

리어트는 덜컥 말문이 막혔다.

당신의 아들, 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수인족 마을의 리어트, 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그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과연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언젠가 내가 만들 거예요.”

다만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을 뿐이었다.

“수인이니 인간이니, 그딴 거 가리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세상을 만들 거라고요.”

두 주먹을 꽉 쥐고 두 발을 단단히 땅에 붙인 채 리어트가 외쳤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낯선 생물을 마주하는 것처럼 멀거니 그런 리어트를 내려다보았다.

설핏 아주 그리운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아버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그 미소는 전부 거짓말처럼 깨졌다.

“우스운 말을 하는구나.”

“윽, ……켁.”

리어트의 멱살이 우악스럽게 잡혔다.

아버지는 그를 어린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들더니 집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아무래도 쓸데없는 것과 엮여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모양인데, 여기 며칠 갇혀 있으면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할 거다.”

도착한 곳은 집 옆에 있는 작은 창고였다.

아버지는 아무래도 그를 거기에 가둘 심산인 듯싶었다.

그딴 건 상관없었다.

고작 며칠 거기 갇혀 있는 걸로 바뀔 생각이라면, 이렇게 오래 고민하고 이토록 오래 고통스러웠을 리가 없으니까.

“내 어머니도 인간이었어요!”

아버지의 팔에 제 손톱을 박아 넣으며 리어트가 바락바락 대들었다.

“당신도, 당신도 인간을, 어머니를 사랑했잖아!”

“……그래, 그랬지.”

잠시 멈칫하던 아버지가 와락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인간은 너무 약하고, 빨리 죽어 버린단다.”

리어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는 멍하니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저를 붙들고 있는 손은 바위처럼 단단한데, 아버지는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덧없는 것들에 마음을 줘 봤자 너만 괴로울 뿐이다, 리어트.”

그 말을 끝으로 리어트는 창고에 갇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악을 쓰며 창고에서 나가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손이 다 까지고 피로 얼룩져도,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때 문 너머에서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꼴 좋다, 리어트.”

“그러니까 말이야. 한심하기는.”

“멍청한 줄은 알았지만, 설마 정말로 인간이랑 어울릴 줄은 몰랐어.”

“어이, 리어트, 기대 이상이었다!”

꺄르르, 깔깔 웃는 소리는 다음 날에도,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계속되었다.

종종 어른들마저도 그를 향해 들으라는 듯 혀를 차며 숙덕거리곤 했다.

“제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것도 모자라 이렇게까지 속을 썩이다니.”

“인간이라도 되고 싶은 모양이지.”

“에이, 설마요. 암만 피가 섞였어도 인간들 사이에서 살 수나 있었겠어요?”

“철딱서니 없는 것, 쯧쯧.”

구석에 잔뜩 웅크린 채로 리어트는 제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았다.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소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온 세상이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옷을 적셨다.

억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게는 잘못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늘 자신만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는 그대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 뭐야!”

그때였다.

문 너머에서 소란이 일었다.

창고를 둘러싸던 소음들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누구냐! 누가 감히 마을에……!”

“저, 저 애는 분명!”

“인간이다! 인간 아이가 나타났어!”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들린 말에 리어트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빛 한 점 제대로 들지 않는 컴컴한 창고에서 그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 바깥의 소리를 들었다.

쾅, 콰직,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아이며 어른이며 할 것 없이 다들 비명을 질렀다.

뭔가에 겁을 먹고 도망치는 발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는지 말해.”

“저, 저기! 저기에 있어!”

잠시 뒤, 바깥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묘한 예감에 리어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던 그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그가 갇혀 있던 창고 문이 그대로 박살이 났다.

어두운 공간이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졌다.

“으아악!”

리어트는 반사적으로 온몸을 감싸고 웅크렸다.

“허억, 허억.”

그러나 예상하던 습격이나 공격은 없었다.

그저 거칠게 몰아 내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이상하게 그 소리가 익숙해서 천천히 고개를 들자, 뜻밖의 인물이 창고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너, 네가 여긴 어떻게……!”

리어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수인족 마을을 습격한 범인은 다름 아닌 윈터였다.

그녀는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가볍게 훔쳐 내고는 말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친구가 하도 오지를 않아서.”

빛을 등지고 씩 웃는 얼굴이 반짝였다.

“직접 찾으러 왔어, 리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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