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잠깐 난처한 표정을 짓던 메이딜리언이 말을 골랐다.
“당신 몸에 있던 드래곤의 심장이 좀 나쁜 짓을 했던 거예요.”
“……좀 나쁜 짓이 아닌 것 같은데.”
윈터는 이제 상처 하나 남지 않은 그의 가슴 위를 쓸었다.
조심스럽고 간질간질한 접촉에 흠칫, 메이딜리언의 어깨가 튀었다.
그러나 윈터는 미처 그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늦게 죄책감과 부채감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생일 축하 못 해 줘서 미안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매년 챙겨 왔던 일인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울적하게 가라앉는 윈터의 얼굴을 보던 메이딜리언이 짧게 웃었다.
“했어요. 짧지만, 편지로.”
“그건 나 아냐.”
윈터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점차 돌아오기 시작하는 기억들 속에서, 그녀는 자신조차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 홀로 중얼거리던 무례한 말들이 또렷이 떠올랐다.
‘멍청하긴.’
‘답례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 선물이나 주고 갈까.’
그 편지는 사실상 조롱에 가까웠다.
그걸 뻔히 아는 윈터의 표정은 점점 울상이 되어 갔다.
차라리 속상하다고, 왜 드래곤의 망령 같은 거에 씌어서 일을 이렇게 만드냐고 시원하게 원망이라도 해 주면 좋겠는데.
메이딜리언은 그저 속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대관식도 못 봤는데…….”
“까짓것 한 번 더 하죠.”
“뭐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여전히 철딱서니 없는 소리만 일삼는 메이딜리언을 윈터가 밉지 않게 흘겼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이제 황제고, 이 모든 건 다 당신을 위한 거잖아요.”
윈터는 잠시 그런 메이딜리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피로와 안도, 피와 먼지로 얼룩진 아름다운 사람의 이마를 쓸어 주었다.
주인에게 온 마음을 내어주는 어린 짐승처럼, 메이딜리언은 그 작은 손에 제 몸을 온전히 기댄 채 친근하게 비볐다.
맞닿아 오는 체온에 윈터의 심장에 몽글몽글 작은 보풀들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굳이 그렇게는 안 해도 돼. 어차피 다 영상 아티팩트로 남겨 놓으라고 했으니까.”
“네?”
메이딜리언은 순간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윈터 역시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생긋 천사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혹시 몰라서 내가 못 보는 일이 생기면 꼭 기록으로 남겨 달라고 했거든.”
“……당신이 못 보는 상황이 무슨 상황인데요?”
“글쎄, 이런 상황?”
죽을 때를 대비해서 한 말이었지만, 윈터는 굳이 그런 가정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불안에 떠는 메이딜리언을 더는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깐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던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아픈 데는 없어요?”
“응, 괜찮아. 너는? 불편한 데는 어디 없어?”
“불편한 데는, 음…….”
보이는 데에 외상은 없는데, 메이딜리언은 드물게 대답을 망설였다.
덕분에 윈터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왜 그래? 뭐야, 어디가 불편한데? 응?”
메이딜리언은 말없이 윈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을 더듬고 있는 윈터의 손으로 향했다.
“……앗.”
메이딜리언의 눈길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가던 윈터가 얼른 손을 뗐다.
“나, 나도 모르게 그만…….”
어설픈 변명에 픽, 그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으면 기꺼이 받아줬을 텐데 말이죠.”
메이딜리언이 눈을 접어 웃었다.
그 얼굴이 너무 자극적이라 윈터의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상황이, 어, 어떤 상황인데?”
“간단히 말해서…….”
천천히 고개를 숙인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귓불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움찔 윈터의 어깨가 튀었다.
씩 소리 없이 웃은 메이딜리언이 입을 열던 순간이었다.
“윈-터! 살아 있어? 어? 죽었으면 죽었다고 말이라도 해 줘!”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윈터와 메이딜리언 모두 긴장감이 푸스스 흩어졌다.
작게 한숨을 내쉰 메이딜리언이 이어 말했다.
“저런 상황이요.”
윈터는 금세 저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의 주인이 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숫제 울먹이고 있었다.
그때 휙, 섬광처럼 윈터의 머릿속에 상황들이 펼쳐졌다.
‘듣기로는 갑자기 쿵 소리가 나더니 황궁 한복판에 그대가 떨어졌다고 하더라고.’
‘대단해, 공작. 설마 여기까지 단신으로 쳐들어올 줄 몰랐어.’
단편적인 기억들이 휙휙 넘어갔다.
“헉, 설마…….”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윈터가 제 입가를 또 한 번 틀어막았다.
“여, 여기 칼로프야?”
“네.”
“내가 진짜 미쳤었구나.”
정신이 없던 사이에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일들에 윈터가 이마를 짚었다.
여전히 나른하게 웃고만 있던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칼로프인 걸 몰랐어요?”
“어어.”
윈터가 제일 먼저 떠올린 기억들은 메이딜리언에 관한 것뿐이었다.
설마 자신이 칼로프에 와서 델과 만났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한숨을 푹 내쉰 윈터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부서진 나무 조각과 돌 조각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야?”
“건물이 무너졌어요.”
“뭐?”
“우리는 지금 거기에 깔린 상태인 거죠.”
메이딜리언의 대답은 더없이 명쾌하고도 상큼했다.
그와 반대로 윈터의 머리는 점점 어질어질해졌다.
“대체 이 미친 드래곤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그러자 메이딜리언이 하하,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윈터는 그 얼굴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 번도 그가 그렇게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내 웃음을 가라앉힌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이마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윈터.”
메이딜리언의 목소리에 아직까지 떨림이 남아 있었다.
그의 심정을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헤아릴 수 있었기에 윈터는 그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게 건네준 입맞춤을 그대로 돌려주며 윈터가 화답했다.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 메이.”
윈터의 말에는 그녀를 찾으러 칼로프까지 온 메이딜리언을 따라 함께 가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말을 이해한 메이딜리언의 눈동자가 서서히 부풀더니 이내 예쁜 반달 모양을 그리며 접혔다.
보기 좋게 올라간 두 뺨과 호선을 그리는 모양 좋은 입술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활짝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온몸으로 기쁨을 드러내며 반짝거리는 메이딜리언을 윈터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럼 이만 나가 볼까요?”
“좋아. 여기 더 있다가는 황태자 전하 목이 다 쉬겠어.”
두 사람은 가볍게 마력을 운용했다.
이내 그들 위를 덮고 있던 건물의 잔해들이 잘게 떨리다가 여기저기로 나가떨어졌다.
예고도 없이 벌어진 기현상에 여전히 무너진 건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오오, 감탄했다.
“서, 설마, 윈터?”
델은 이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 몇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신 목놓아 윈터를 외치던 델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부서진 돌과 나무들을 헤치고 나오는 두 사람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아닉타시여!”
사막의 신에게 짧게 기도를 드린 델이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새 눈물 콧물 다 뺀 그녀는 윈터를 와락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물론 윈터와 델의 포옹은 오래가지 못했다.
메이딜리언과 무니스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을 떼어 냈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상대를 천하의 몹쓸 난봉꾼처럼 흰 눈으로 쳐다보는 꼴이 퍽 우스웠다.
“오랜만이에요, 전하.”
많이 놀랐을 델의 등을 쓸어 주며 윈터가 말했다.
“엉? 오랜만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뜻밖의 인사에 델이 눈을 끔벅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어 윈터가 뺨을 긁적였다.
반사적으로 메이딜리언을 돌아보니 그가 괜찮다는 듯 눈짓했다.
“말하자면 긴데요…….”
잠시 뒤, 윈터를 통해 대강의 사정을 짧게나마 듣게 된 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하, 그렇게 된 거였군.”
“아무리 드래곤이 그랬어도 제가 전하를 돕겠다고 한 말은 철회하지 않을 거예요.”
“당연하지, 고마워, 공작. 그런데…….”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델이 말했다.
어쩐지 그녀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이었다.
“지금은 일단 가 줘야겠어.”
“네?”
“갑자기 건물이 폭삭 무너졌잖아. 보나 마나 황궁에서 진상 조사를 나오겠지.”
거기까지 말한 델이 눈을 찡긋했다.
“우리는 이 일이랑 아무 관련이 없어야 좋지 않겠어?”
“그렇죠.”
“특히나 사벨라 황후 마마한테 걸렸다가는 영 곤란하니까 말이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델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윈터의 등을 밀며 잔뜩 몰려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훠이훠이, 무슨 사고뭉치 꼬맹이들을 쫓아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윈터는 그저 델이 알려 주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사랑싸움은 앞으로 적당히 해.”
“네, 네?”
“국경을 넘어서 건물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스케일이라니.”
와글와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사이에 섞여 델이 작게 혀를 차는 건 들리지도 않았다.
아니, 사실 지금 델의 목소리 반 이상이 날아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윈터는 대체 저 인간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덕분에 그들의 뒤를 착실하게 따라오고 있던 메이딜리언과 무니스도 멈춰 섰다.
“전에 망명이니 뭐니 했던 소리도 다 잊어버려.”
갑작스러운 말에 윈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걸핏하면 탐나는 인재니 뭐니 하더니, 어느새 델은 당장이라도 윈터를 저 멀리로 보내 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제니어스에서 행복하게 살라고, 공작.”
아쉬움은커녕 후련함만이 가득한 델의 표정을 보며 윈터는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윈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한 채,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네, 꼭 그럴게요.”
<흑막 키우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