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익숙한 체온이 닿자 흠칫 놀란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르륵, 피 끓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전신에서 저릿저릿한 살기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메이딜리언은 붉은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며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윈터의 주위에서 빛나던 금빛 오로라가 요동을 쳤다.
동시에 그 마력에 반응이라도 하듯 건물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으아악!”
“거, 건물이 무너지려나 봐!”
“맙소사, 무니스, 자네도 얼른 피하게!”
델은 한창 놀이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사람들의 소란에 그녀가 위층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이 지진이 아무래도 저 위에 있는 요란한 커플 덕분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델은 상황을 파악하고자 무니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무니스가 맡긴 일은 잘 처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델은 한층 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미치겠네, 진짜. 대체 뭘 어떻게 처리한 거야?”
건물 벽이 흔들리며 샹들리에가 태풍 속 나뭇잎처럼 무력하게 흔들렸다.
벽에 걸린 액자며 장식품들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깨지며 연신 날카로운 소리를 빚어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재빨리 머리를 감싸고 바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명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윈터가 이상합니다.’
밖이 난리가 나든 말든 메이딜리언은 오직 윈터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대현자 에르퀼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흐음, 역시 그때 그 ‘얼룩’ 때문인가.’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크비누스 말이야.’
이미 처형돼서 없는 사람을 언급하는 말에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굳었다.
그 역시도 그때 검게 물들었던 상자가 마음에 걸렸다.
크비누스가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악의가 골드 드래곤의 심장에 영향을 준 것이 분명했다.
‘설마 드래곤이 아직 살아 있는 겁니까?’
‘그럴 리가. 굳이 표현하자면 그건…….’
고개를 가로젓던 에르퀼이 고심 끝에 단어 하나를 내뱉었다.
‘사령에 가깝지.’
윈터의 몸 위로 금빛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환영이 보인다.
그녀의 몸속에 여태껏 제 몸을 숨기고 있던 드래곤의 망령이었다.
강대한 드래곤의 마력은 오랫동안 봉인된 상태로 묶여 있었으나, 크비누스의 농간으로 의지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차지하게 된 윈터의 몸을 제 것처럼 사용하려고 했다.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이제 윈터의 온기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방에서, 메이딜리언은 말했다.
‘윈터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요.’
‘으음, 아마 자네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제 턱을 톡톡 두드리던 에르퀼이 방법을 말했다.
메이딜리언은 에르퀼의 말을 토씨도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집중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아무리 드래곤의 사령이라도 아직 그 몸의 주인은 윈터야.’
그때, 윈터의 손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자라나 그대로 메이딜리언의 어깨를 꿰뚫었다.
어떻게든 제 몸에서 메이딜리언을 떼어내고자 발악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꿈쩍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에르퀼의 말을 회상했다.
‘드래곤이 완전히 그 애를 잡아먹기 전에 윈터를 깨워야 해.’
파르륵 분노로 떠는 윈터의 뺨에 비늘 같은 것이 돋아났다.
맞닿은 입술은 평소와 달리 서늘했다. 마치 파충류의 것처럼.
혀를 얽고 살을 맞대는 순간이 전투처럼 치열했다.
함부로 저를 끊어 낼 수 없도록 메이딜리언은 윈터의 턱을 잡아 고정했다.
‘그러려면 드래곤은 아주 극렬하게 거부할 만하고, 윈터라면 기꺼이 반길 만한 짓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에르퀼의 표정이 짓궂었다.
킬킬 장난스레 웃은 에르퀼이 방법을 속삭였을 때, 메이딜리언마저도 움찔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게…….’
‘응. 찐하게 해 주고 와.’
‘하.’
과연 그걸로 드래곤의 사령을 퇴치할 수 있기는 한지, 메이딜리언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그의 불만을 눈치챈 에르퀼이 말을 이었다.
‘뭐, 정 자네가 싫다면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크게 상관은 없을 테지. 후보는 많으니까 말이야. 누가 있더라…….’
‘아닙니다.’
후보를 꼽아 보려는 듯 손가락을 접는 에르퀼을 보며 메이딜리언이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어차피 그렇지 않아도 올 생각이었지만.
이런 일을 감히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캬아아악- 불에 덴 듯 고통스러워하는 드래곤의 비명과 함께 메이딜리언의 마력이 퍼부어졌다.
그의 잿빛 마력은 윈터와 자신을 감싸며 상처를 치유하고, 사령이 만들어 낸 금빛 마력을 밀어냈다.
드디어 자신이 윈터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메이딜리언은 퍽 기뻤다.
“당장 거기서 사라져. 그리고…….”
윈터의 윗입술에 짧게 새가 쪼아 대듯 키스를 남기며, 메이딜리언은 간절히 바랐다.
“내게 돌아와요, 윈터.”
그의 의지에 반응하듯 팽팽하게 힘을 겨루던 두 마력이 그대로 폭발을 일으켰다.
눈 부신 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동시에 출렁이는 수면처럼 맥없이 흔들리던 건물이 굉음을 내며 그대로 내려앉았다.
“……콜록, 콜록.”
“사, 살려, 살려 줘!”
“으아악! 젠장, 내 돈! 내 보석!”
한편 바깥에서는 미리 건물을 빠져나왔던 사람들이 저마다 머리를 부여잡고 통곡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재산상의 손해가 막대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소중한 아지트가…….”
델은 한때 자신의 놀이터였던 것을 바라보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뭔가를 깨달은 듯 새하얗게 질렸다.
“마. 망했어, 나는 망했어…….”
“왜 그러십니까?”
줄곧 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무니스가 물었다.
“왜 그러긴! 내가 아무래도……!”
버럭 외치려던 델은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인식했다.
슬쩍 목소리를 낮춘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황제를 암살한 것 같으니까 그러지!”
두 사람의 애정 전선에 도움이라도 줄까 해서 일부러 자리를 만들어 줬는데.
그 자리가 설마 그들의 무덤이 될 줄은 몰랐다.
절망에 빠진 델을 보며 무니스는 담담하게 되물었다.
“차라리 잘된 일 아닙니까?”
“무, 뭐……?”
“어차피 우리의 경쟁 상대이지 않습니까.”
언젠가 죽일 놈들 미리 죽여서 다행이라는 듯 천연덕스러운 말에 델이 무니스의 멱살을 붙들고 짤짤 흔들었다.
“야,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리 사람 일은 모른다지만 아직까지는 우방이거든?”
“그딴 우방 같은 거 없어도 전하는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아, 말을 말자.”
델은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애써 꾹 참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으휴, 이 무식한 놈.”
델은 충심에 눈이 먼 우직한 멍청이를 한 대 툭 치고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윈터! 어디 있어! 주, 죽은 거 아니지? 응? 살아 있으면 대답 좀 해 봐!”
울먹임이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무니스가 쯧, 하고 작게 혀를 찼다.
윈터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멀리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터! 윈터!”
천천히 흐릿한 시야에 초점이 잡혔다.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애절하게 그녀의 이름을 외치는 붉은 눈동자였다.
윈터가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메이?”
“윈터!”
와락, 메이딜리언이 윈터를 끌어안았다.
건물이 무너지며 만들어진 잔해가 그들을 덮쳐 왔을 때, 메이딜리언은 천만다행으로 빈틈을 찾아 살아남았다.
그가 필사적으로 윈터를 끌어안고 보호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작은 생채기를 빼면 크게 다친 곳도 없었으나, 메이딜리언은 그것마저도 보기가 싫어 전부 치유해 버렸다.
덕분에 사실상 그들은 무척이나 멀쩡했다.
“으윽, 여기 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윈터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마치 아주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자꾸 몸에 힘이 빠졌다.
“정신이 들어요?”
“어어.”
“어디까지 기억해요?”
“……뭘?”
“당신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부터 찬찬히 생각해 봐요.”
묘한 질문에 윈터가 열없이 눈을 깜박였다.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지했기에, 그녀는 주변 상황은 미처 파악하지도 못 한 채 제 기억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깊은 물 속에 잠겨 우글우글해져 있던 일기장을 발견한 것처럼, 서서히 흐린 장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메이를 부탁한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파노니아 평원에서 있었던 마력 폭주 사건이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녀는 기적적으로 한 달 만에 깨어났고, 그런 그녀를 찾아왔던 메이딜리언이…….
‘또 죽고 싶어지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윈터.’
‘언제든 제가 당신 뒤를 따르겠습니다.’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기억을 되짚어가던 윈터의 표정이 일순 창백해졌다.
“너……!”
저를 보호하듯 제 위에서 버티고 있는 메이딜리언을 윈터가 잡아챘다.
메이딜리언은 그녀의 양옆으로 짚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여기서 섣불리 움직였다가 건물의 잔해가 윈터를 덮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제 의지대로 딸려오지 않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쉰 윈터가 그의 셔츠를 풀어 심장 쪽을 더듬었다.
당연히 상처라곤 하나 없는 말끔한 몸에 윈터가 작게 안도했다.
“하아.”
분명 이미 일어난 일들이 조각난 그림처럼 여기저기로 흩어져 있었다.
뒤늦게 당황한 윈터의 손이 잘게 떨렸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메이딜리언이 남긴 피로 얼룩진 기억을 애써 털어 냈다.
그러자 뒤이어 떠오른 것은…….
‘너는 어차피 날 못 죽여.’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잖아?’
‘메이, 들어올래?’
‘아직도 내가 밉니?’
‘나는 다시 거기에 갇히기 싫어.’
‘입구는 기사들까지 배치했잖아. 그게 감금이 아니면 뭐야?’
윈터가 경악스러운 심정을 애써 억누르고자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도무지 자신이 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낯선 말과 행동으로 가득했다.
“혹시 내가…… 잠시 미쳤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