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칼로프에 메이딜리언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를 눈앞에 두고도 그랬다.
메이딜리언 또한 마찬가지였다.
윈터가 사라지고 매일 밤, 그는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계속 그녀를 불렀지만, 윈터는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검은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몇 번이고 악을 쓰고, 달려가려 해도 몸이 꽁꽁 묶여 움직일 수도 없었다.
메이딜리언은 밤새도록 윈터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다행히―”
윈터의 뺨을 더듬어 가는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다행이에요.”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있어서.
메이딜리언은 속 안에 들어 있는 말을 삼켰다.
윈터는 여전히 혼란 가득한 시선으로 메이딜리언을 바라보았다.
“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메이딜리언은 황제였다.
그가 호위는커녕 혈혈단신으로 칼로프 황궁 근처에 와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메이딜리언 때문에 윈터의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이미 예상한 듯 메이딜리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여기 있으니까요.”
“……너무 무모해.”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윈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
“당신은요?”
“뭐?”
“당신은 어떻게 할 거냐고요.”
“나는…….”
윈터가 입술을 달싹였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동공이 떨렸다.
“나는 여기서 할 일이 있어.”
“무슨 할 일이요? 그럼 그거 마칠 때까지 기다릴게요.”
“메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지금, 장난으로 하는 말 같아요?”
한 발자국 만에 두 사람의 거리가 바짝 좁혀졌다.
윈터가 움찔했다.
메이딜리언의 붉은 눈동자가 연신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도, 또는 확인하는 듯도 했다.
하지만 그가 알아내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윈터는 알 수 없었다.
“나랑 같이 돌아가요.”
메이딜리언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윈터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
“왜요?”
“나는.”
말을 잇던 윈터가 뭔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우뚝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가 느리게 깜박였다.
반들거리는 금빛 동공이 조금 짙어졌다.
“나는 다시 거기에 갇히기 싫어.”
“당신을 가둔 게 아니에요.”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 윈터가 픽 비웃음을 흘렸다.
“정말? 마법을 조금도 사용할 수 없게 아주 진을 촘촘히도 짜 뒀던데.”
“그건…….”
“입구엔 기사들까지 배치했잖아. 그게 감금이 아니면 뭐야?”
“윈터.”
“네 입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거라고 했어. 내 말이 틀려?”
단어 하나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윈터의 표정에 분노가 서렸다.
냉막한 얼음이 깔린 호수를 끌어안는 것처럼 차가운 얼굴이었다.
메이딜리언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윈터가 화를 쏟아 내는 것을 기다렸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돌아가자고? 내가 왜! 너야말로 돌아가. 지금 네 상황을 잊었어? 어떻게 이렇게 무모해. 내가, 내가 너 하나를 황제로 만들자고 무슨 짓을 했는데!”
“그러길래 대체 왜 나를 황제로 만들었어요.”
“……뭐?”
“계속 말했잖아요. 이 모든 게 당신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윈터는 그에게서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자꾸만 뒤로 물러났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느 순간 윈터의 등에 벽이 닿았다.
그녀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마력 폭주가 일어났을 때 당신의 심장은 완전히 파괴되었어요.”
“……알아.”
“그래서 골드 드래곤의 심장을 이식했죠.”
상자에 들어 있던 작은 구슬과도 같은 금빛 심장을 메이딜리언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윈터의 심장에 어려 있던 거친 마력은 대현자 에르퀼이 만들어 낸 보호막까지 뒤흔들며 날뛰었다.
그 야생마같이 날뛰던 마력은 드래곤의 심장을 만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걸로 끝이 아니라고.
“드래곤의 심장이 당신 몸에 적응하려면 안정이 필요했어요. 외부의 마력이 결코 간섭할 수 없어야 했죠.”
“그런 인간이 내 앞에서……!”
윈터가 울컥했다.
잘게 떨리는 손이 이내 꽉 주먹을 쥐더니 메이딜리언의 가슴을 쿵, 쳤다.
혹시나 자신이 정말로 그를 아프게 할까 봐 제대로 힘을 주지도 못한 채였다.
“그렇게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면서 눈 뜨자마자 죽으려고 해?”
“……당신도 나만큼 괴로워했으면 했으니까.”
윈터의 눈앞에서 제 심장에 칼을 꽂아 넣었으면서도, 메이딜리언의 얼굴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그것만은 후회 안 해요.”
그녀가 금방이라도 혼절할 듯이 새하얗게 질려서 그의 이름을 외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공포를 느끼기를 바랐다.
그녀가 죽으면 자신의 목숨도 같이 없어지는 것이라는 걸, 그렇게 해서라도 절대 잊지 않기를 바랐다.
윈터의 눈동자가 원망으로 가득 차 일렁거렸다.
“다 당신을 위한 거였어요.”
“날 위해서 그렇게 해 달라고 한 적 없어.”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뭐?”
“내가 바란 적 없는 걸 날 위해서라며 줬잖아요.”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던 두 사람은 이런 면에서는 지독히도 닮아 있었다.
말을 잃은 윈터가 고개를 푹 숙였다.
메이딜리언의 말이 맞았다.
전부 자신의 잘못이었다.
“놔 줘. 이만 돌아가고 싶어.”
“어디로요?”
“…….”
“내가 없는 곳으로?”
“메이.”
“말해 봐요. 정말 내가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어요?”
윈터는 그저 물끄러미 메이딜리언을 응시했다.
그녀의 입에서 아니라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하, 짧게 헛웃음을 지은 메이딜리언이 이내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아무 데도 못 가요.”
“너는 나를 강제할 수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나 버리고 갈 수 있어요?”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여기 일만 마치고 돌아간다고 했잖아.”
“난 당신이 그 중요하다는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고요.”
결국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오래 달린 사람처럼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윈터는 아까부터 제 머리가 지글지글 끓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이 그대로 튀어나올 것처럼 아팠다.
“바보 같은 짓 그만해요.”
그런 윈터의 고통을 같이 느끼기라도 하듯, 메이딜리언의 이마가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서늘한 그의 체온을 느끼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당신이 나를, 기꺼이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한다는 걸 내가 모르는 것 같아요?”
“너…….”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해요. 그럼 내가 다 용서할 테니까.”
아까부터 줄곧 메이딜리언의 시선은 집요하리만치 윈터만을 쫓았다.
거의 빌기라도 하는 듯한 간절한 말투에 윈터의 눈도 정처 없이 흔들렸다.
“윈터, 제발.”
“…….”
“약속해요. 나랑 함께 돌아가겠다고.”
그러나 끝내 윈터의 입에서는 긍정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윈터는 멍하니 그가 침몰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내 메이딜리언이 푹 고개를 떨궜다.
공간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역시.”
한참 만에, 메이딜리언이 작게 중얼거렸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그의 얼굴에 동요는 사라진 상태였다.
“함부로 약속할 수 없는 거구나, 그렇지?”
대신 서늘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단 한 번도 윈터를 마주한 채 드러낸 적 없던 메이딜리언의 진짜 얼굴이었다.
몸을 기울인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약속하면 영원히 여기 묶일 테니까. 안 그래?”
“뭐?”
“이제 연극은 끝났어. 헛짓거리 그만해.”
“메이, 너 그게 무슨…….”
“아니면 나랑 같이 여기서 죽는 방법도 있고.”
빈정거리는 불량스러운 얼굴을 마주한 채 윈터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자신의 말을 거두지 않았다.
혼란으로 뒤범벅되어 있던 윈터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메이딜리언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곧 킥킥,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똑똑한데?”
윈터의 얼굴을 한 전혀 낯선 존재가 마침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어리석은 제니어스의 후손아.”
메이딜리언을 비꼬며 윈터가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몸 주위로 금빛 아우라가 어리기 시작했다.
골드 드래곤의 심장에 묶여 있던, 길들여지지 않은 마력이었다.
“어떻게 날 알아보았지?”
“처음부터 이상했으니까.”
그가 아는 윈터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졌다.
윈터의 기억을 가지고 그녀처럼 행동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윈터는 아니었다.
“우리 둘은 거의 차이가 없어. 고작 이깟 마력의 흔적은 얼마든지 숨길 수 있고. 그런데 이상했다고?”
“그래.”
“대단하다고 칭찬해 줘야 하나?”
“글쎄. 당신이 너무 허술했겠지.”
드래곤의 말대로 뭔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드래곤이 흉내 내는 윈터는, 조금도 메이딜리언의 심장을 뛰게 하지 못했으니까.
“이런, 미안해서 어쩌나.”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향해 작게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아끼는 이 몸은 이제 내 거야.”
“정말 그럴까?”
하지만 메이딜리언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한껏 거리를 좁힌 채, 윈터의 손에 제 손을 얽었다.
그의 반대쪽 손은 윈터의 허리를 단단히 잡아 붙들었다.
“무, 뭐 하는 거야!”
과하게 밀접한 접촉에 윈터가 버둥댔다.
그런 그녀를 응시하는 메이딜리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나는 윈터를 믿어.”
메이딜리언의 마력이 그의 의지에 따라 반응했다.
새카만 주술이 그의 몸을 타고 윈터까지 동시에 묶었다.
뒤늦게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윈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거 못 놔!”
“못 놔. 그러니까 윈터를 돌려주고…….”
메이딜리언의 이마가 윈터의 이마 위에 포개졌다.
이어서 그의 코끝도 윈터에게 닿았다.
“당장 사라져.”
윈터에게 입을 맞추며 메이딜리언이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