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리어트, 내 말 들리지?]”
“어어, 잘 들려.”
서서히 거울에 윈터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다.
헉, 하고 놀라던 데보라가 약속대로 얼른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나타난 사람이 칼로프의 황태자도 아니고 그녀가 그토록 찾던 윈터였는데.
대체 왜 숨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리어트는 굳이 데보라를 지적하지 않았다.
“[뭐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어두컴컴한 방에서 거지꼴을 한 리어트를 보자마자 윈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리어트는 잠시 후회했다.
아까 데보라의 말을 그냥 흘려넘기지 말고 제대로 들어 둘 걸 그랬다.
“뭐,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오히려 죽다 살아난 건 네 쪽 아니야?”
“[그건…… 그렇지.]”
리어트의 지적에 윈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녀는 짧은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저, 리어트.]”
“왜.”
“[……미안.]”
많은 말이 함축된 사과였다.
리어트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꾹 내리누른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나중에 술이나 사.”
“[당연하지. 꼭 그럴게.]”
이미 다 지난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아직 리어트에게 미련과 분노가 남아 있었지만, 그걸 윈터에게 들이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더는 죽음 곁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은 꽤 맘에 들었다.
지금은 윈터가 그저 살아 있기만 하다면 충분했다.
“그나저나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거기 설마 칼로프야?”
“[어어, 어쩌다 보니.]”
윈터가 그녀답지 않게 말끝을 얼버무리며 뺨을 긁적였다.
영 석연치 않은 반응에 리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설마 황태자랑 같이 있…….”
“[여어, 안녕, 부단주 씨.]”
리어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델이 윈터 곁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대강 상황을 짐작한 리어트가 끝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갑자기 끼어든 델을 주욱 밀어낸 윈터가 빠르게 속삭였다.
“[자세한 얘기는 내가 나중에 다 할게. 지금은 일단 이쪽으로 지원을 좀 보내 줘.]”
“무슨 지원?”
“[우리가 전에 얘기했던 거.]”
윈터가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해야겠어.]”
그 모습에 리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칼리스타가 델을 지원하는 일은 물론 중요했다.
후계 경합에서 델이 메이딜리언을 밀어주며 맺은 계약이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해 윈터가 저렇게 다급하게 지원 요청을 할 정도로 우선적인 일은 아니었다.
거기서 리어트는 처음 위화감을 느꼈다.
“윈터.”
“[응?]”
“듣자 하니 너 지금 실종됐다던데.”
“[아, 응. 맞아.]”
윈터가 삐걱거리는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돌아갈 거야.]”
“언제?”
“[여기 일 다 도와주고.]”
“말은 하고 나온 거야?”
“[뭐어, 그런 셈이지.]”
말을 늘어뜨리는 걸 보니 척 봐도 거짓말이었다.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는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데보라가 여기까지 찾아와 윈터의 행방을 내놓으라고 징징댄 것만 봐도 답이 나왔다.
윈터는 지금 누구에게도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본인도 왜 그래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이것이 리어트가 느낀 두 번째 위화감이었다.
“알겠어. 준비해 둔 것들 전부 진행할게.”
“[응, 고마워.]”
금방 화색이 도는 얼굴로 윈터가 말했다.
통신을 마치기 직전 리어트가 그녀를 붙들었다.
“윈터!”
“[어? 왜?]”
“다친 데는 없는 거지? 어디 이상한 데 없지?”
“[당연하지. 딱 봐도 멀쩡하잖아.]”
윈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제 양팔을 벌려 보였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리어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이네. 곧 다시 연락할게.”
“[알겠어. 또 보자.]”
거울 속에서 윈터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뿜어져 나오던 흰 빛이 사라지고, 고요한 방 안에 데보라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울렸다.
순간 제 귀를 의심하던 리어트가 성큼성큼 걸어가 책상 밑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지금 설마 우는 거야?”
“다친 데 하나 없이 멀쩡하시다잖아요.”
“……그런데?”
“정말 다행이어서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데보라를 보며 리어트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누가 보면 네가 낳은 줄 알겠다.”
“흐어엉.”
“근데 있잖아.”
“훌쩍, 네, 왜요?”
“네 말대로 좀 이상하네.”
리어트가 제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그가 아는 윈터는 어떤 상황에서든 메이딜리언이 우선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졌건 어쨌건 그건 윈터를 이루는 필수 요소였다.
그런데 전후 상황을 모두 제외하더라도, 통신이 이루어지는 동안 윈터는 단 한 번도 메이딜리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건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죠? 제 말이 맞죠?”
“……그래.”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의 윈터는 윈터가 아닌 것 같았다.
“넌 일단 돌아가 있어. 내가 윈터랑 조금 더 접촉해 볼 테니까.”
데보라를 책상 아래에서 끄집어내며 리어트가 덧붙였다.
“특히 그 재수 없는 황제한테는 윈터가 칼로프에 있다는 말…….”
리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보라가 주머니에서 아티팩트를 꺼냈다.
대체 주머니가 얼마나 깊은 건지, 아직도 꺼낼 아티팩트가 남은 건가 싶어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데보라의 손에 들린 붉은 펜던트가 유독 익숙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윈터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 너 설마…….”
불길한 예감에 리어트가 와락 표정을 구겼다.
어느새 눈물이 쏙 들어간 얼굴로 데보라가 샐쭉 웃었다.
“[좋은 정보 고마워. 답례로 그 무례한 말버릇은 잊어 주지.]”
리어트의 추측을 확인시켜 주듯 펜던트에서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딜리언이었다.
“[그쪽도 차차 새로운 사람 찾아봐.]”
여전히 시건방진 말투였다.
슬슬 올라오는 열에 리어트의 뺨이 경련했다.
어떻게든 메이딜리언에게는 윈터의 행방을 늦게 알려 주고 싶었는데, 그런 그의 생각을 예측이라도 한 듯 저 여우 같은 황제는 데보라를 통해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엿듣고 있었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다잖아, 들었지?]”
아티팩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얄미웠다.
윈터 앞에서는 갖은 착한 척, 순진한 척은 다 하는 망나니가 이죽거리는 소리에 리어트가 까드득 이를 갈았다.
메이딜리언이 하는 말이 퍽 익숙했다.
“누가 해 준 말인가 했더니…….”
데보라가 리어트의 시선을 피했다.
“[뭐, 아무튼 수고했어.]”
“……야!”
리어트가 버럭 외치는 것과 동시에 아티팩트의 붉은빛이 툭 꺼졌다.
방 안은 다시 침묵으로 가득 찼다.
* * *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붉은 펜던트를 손에 쥔 채로, 메이딜리언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옆에서 윈터와 데보라, 리어트의 대화를 함께 들었던 엘리슨이 불안한 얼굴로 되물었다.
요 며칠 수색대를 꾸려 황도 곳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윈터의 흔적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칼로프라니.
심지어 칼로프의 황태자와 함께라니.
“당장 기사들을 파견할까요?”
타국의 황궁까지 어떻게 기사들을 보내야 하냐는 건 차치하고, 일단은 윈터를 다시 데려오는 게 중요했다.
그들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금 윈터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냐.”
“그럼 아르카나 단원들을 보낼까요?”
“내가 직접 간다.”
“……예?”
엘리슨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분명 메이딜리언의 말을 들었는데, 제대로 인식이 되지 않았다.
“내가 말을 더듬었나?”
왜 되묻냐는 우회적인 물음에 엘리슨이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듣기는 들었는데, 그러니까…….”
마른침을 삼킨 엘리슨이 재차 물었다.
“칼로프로, 폐하께서 직접…… 가신다고요?”
“그래.”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안 된다고 결사반대를 하기에는 메이딜리언의 의사가 너무 확고했다.
대현자 에르퀼과 그 제자인 아이셀에게 전해 들은 내용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메이딜리언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엘리슨은 감히 다른 사람을 보내 윈터를 데려오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지금 윈터를 찾지 못하면 메이딜리언도 같이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준비하겠습니다.”
결국 엘리슨이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 * *
한편 칼로프의 황궁에서는 윈터가 한창 추궁을 당하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게슴츠레 저를 응시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윈터가 자꾸만 뒤로 몸을 물렸다.
그러나 델은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윈터를 탐색했다.
“공작.”
“……네?”
“혹시 가출했어?”
“예? 아뇨, 그럴 리가요.”
가출이라는 황당한 말에 윈터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델도 나름대로 굳이 ‘가출’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 실종은 대체 무슨 말이야?”
조금 전 칼리스타의 부단주와 나눈 대화가 무척이나 수상했다.
리어트는 윈터가 현재 제국에서 실종된 상태라고 했다.
윈터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자신이 칼로프에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듯했다.
문제는, 아직까지 그녀가 왜 굳이 칼로프에 왔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칼로프로 오게 된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 말이 영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델이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공작.”
“네, 전하.”
“혹시 제니어스의 새 황제가, 그대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모르나?”
“그…….”
“아니, 질문을 정정하지. 그는 공작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인가?”
윈터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동시에 델이 이마를 짚었다.
“망했네.”
“저기, 전하?”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미처 윈터에게까지 전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망연자실하는 델의 표정만 봐도 뭔가 심상치 않았다.
델은 부쩍 촉촉해진 눈빛으로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봤다.
“……미리 준비를 좀 해 둬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