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데보라의 외침에도 리어트는 그저 심드렁했다.
그녀의 말을 전혀 믿고 있지 않은 듯했다.
“흐아암.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지금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요!”
“으음…….”
늘어지게 하품이나 하던 리어트가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조금?”
“이익!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분통을 터뜨리며 부들부들 떠는 데보라를 보며 낄낄 웃던 리어트가 그대로 카우치에서 굴러떨어졌다.
정확히는 와르르 쏟아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꽤 아플 만한 상황에서도 실성한 것처럼 키득키득 웃는 통에 데보라는 평생 모르던 두통을 느꼈다.
“너무 그렇게 열 쏟지 말고 천천히 말해 봐.”
한참 만에야 웃음을 가라앉힌 리어트가 물었다.
여전히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꼴사나운 모습이었으나 최소한 대화는 통할 것 같은 자세였다.
푹 한숨을 내쉰 데보라가 다시 말했다.
“아가씨가 사라지셨다고요.”
“어디로?”
“그걸 알면 제가 여길 왔겠어요?”
“왜 사라졌는데?”
“그걸 내가 알겠냐고요!”
데보라가 갑갑함을 참지 못하고 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인간의 멱살이라도 짤짤 흔들고 싶었다.
“흐음.”
데보라의 분노가 거세어지면 거세어질수록 리어트의 표정도 꽤 진지해졌다.
저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데보라가 농담을 하는 건 아닌 듯했다.
“큰일이네.”
드디어 리어트가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태껏 한 번도 윈터가 이런 식으로 자취를 감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흐흐.”
“……술이 아니라 뭐 바보 되는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
그러나 복잡한 마음과 달리 실없는 웃음이 자꾸만 비어져 나왔다.
느닷없이 사라진 윈터 때문에 잔뜩 약이 올라 있을 메이딜리언을 생각하니 속이 조금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나사 빠진 얼간이 같은 리어트를 보며 데보라가 자세를 낮춰 그와 눈을 맞췄다.
“대체 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거예요? 뭐, 실연의 아픔 그런 건가?”
“비슷하지.”
리어트는 윈터가 죽음을 선택한 순간, 거기에 있었다.
모든 것을 등지고 그녀 홀로 목숨을 걸었을 때 그는 절망했다.
윈터를 아는 모두가 그녀를 말렸다.
그러지 말라고,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우리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몇 번이고 설득하고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윈터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그 목표의 주인인 메이딜리언을 위해서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졌다.
아마 또 한 번 그런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윈터는 몇 번이고 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리어트는 충격받았다.
아니, 어쩌면 상처일지도 모르겠다.
윈터에게 더없이 완벽한 거절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 말 몰라요?”
“무슨 말.”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는다는 말이요.”
누가 들려준 건지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마치 적힌 글을 줄줄 읽는 듯 어색한 말투에 피식, 리어트가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아가씨만큼 훌륭하고 대단하신 분을 찾는 게 어렵겠지만, 그래도 살다 보면 더 멋진 사람이 나타나지 않겠어요?”
“그렇겠지? 그럼 난 그 멋진 사람을 기다리며 술이나 한잔 더…….”
“아니, 아직은 안 돼요!”
술병을 휙 빼앗아 든 채 데보라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아가씨가 사라졌다니까! 제 말은 뭐로 들었어요!”
“알아, 들었잖아.”
“정말 모르겠어요?”
쿵, 묵직한 술병이 바닥을 울렸다.
“아가씨가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일은 없어요.”
데보라의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리어트를 마주했다.
그녀는 어쩐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거, 당신이 가장 잘 알잖아요.”
여태껏 농담과 장난으로 일관하던 리어트의 표정이 낮게 가라앉았다.
자세를 다시 바로잡은 그가 조금 명료해진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윈터가 사라진 게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죠!”
“굳이 그렇게 추측한 이유는?”
“으음, 그러니까…….”
데보라가 조금 망설였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막연한 예감일 뿐이었는데 이런 걸 근거로 내세워도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지금 몸 상태로는 못 나가.’
윈터의 병문안을 갔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자꾸만 데보라를 괴롭혔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상했다.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꼭 몸만 회복되면 제 발로 알아서 이곳을 탈출하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데보라가 생각했을 때 그건 윈터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윈터라면 메이딜리언과 대화를 했을 것이다.
오히려 지독한 불안에 시달리는 메이딜리언을 기다려 줬을 것이다.
물론 사람이라는 게 늘 그럴 수만은 없겠지만, 데보라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윈터가 이렇게 무턱대고 사라질 리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가씨를 봤을 때.”
“…….”
“이상했어요, 어딘가.”
기이하게 반들거리던 금빛 눈동자가 맘에 걸렸다.
어쩐지 눈앞의 윈터가 윈터답지 않다고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분명 외양이며 말투, 목소리, 몸짓 모두 평소의 아가씨와 똑같았는데도 말이다.
데보라의 날카로운 기감은 그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찾아 줘요.”
“허, 내가 무슨 수로?”
“칼리스타에 이상한 물건들 많잖아요! 그걸로 아가씨 못 찾아요?”
“너는 내가 무슨 만물상인 줄 알아?”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리어트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술을 대중없이 잔뜩 퍼부은 덕에 머리는 어지럽고 속은 타는 듯이 쓰라렸다.
“우욱, 젠장.”
연신 헛구역질을 하는 리어트를 데보라가 흰 눈으로 흘겼다.
“그리고 이 어울리지도 않는 수염은 대체 뭐예요?”
깔끔하고 반짝이던 평소의 모습은 다 어디로 간 건지.
부랑자처럼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을 지적하자 리어트가 반사적으로 꺼끌꺼끌한 제 턱을 쓸었다.
“제가 웬만하면 이런 말 안 하는데 면도부터 좀 하는 게 어때요?”
“어어. 나중에, 나중에.”
반쯤 건성으로 대답하며 휙휙 손을 내저은 리어트가 털썩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반대쪽으로 팔을 쭉 뻗은 그가 서랍을 열더니 안을 마구 휘저었다.
덜그럭, 덜그럭, 서랍 가득 쌓인 물건들이 부딪히며 소음을 만들어 냈다.
“끄응, 찾았다.”
한참 만에야 그가 서랍에서 작고 동그란 아티팩트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게 뭔데요?”
“추적용 아티팩트.”
“귀걸이 모양이네요?”
“어어, 전에 봤지? 윈터가 착용만 하고 있다면…….”
어쩐지 익숙한 모양이더라니.
일전에 만타라스를 찾으러 사막으로 갈 때 썼던 바로 그 아티팩트였다.
데보라는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못 써요.”
“뭐? 왜?”
대답 대신 데보라가 주머니에서 와르르 아티팩트를 가득 쏟아 냈다.
하나같이 눈에 익은 물건들이었다.
“심장 이식을 마치고 절대 안정을 해야 해서 마력에 영향이 갈 만한 물건들은 전부 따로 빼 뒀어요.”
“그럼…….”
“아가씨는 지금 몸에 지닌 아티팩트가 전혀 없어요.”
“하아.”
윈터가 맨몸으로 실종되었다는 말에 리어트가 이마를 짚었다.
저절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쩐지 아까보다 속이 한층 더 울렁거리는 듯했다.
상황이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못 찾아.”
“다른 방법 없어요?”
“없어.”
“당신한테도 아가씨가 어디 간다는 언질을 준 적이 없어요?”
“으음…….”
“아니, 됐어요. 말 안 해도 알겠네요.”
만약 윈터가 연락을 했다면 그가 여기서 이렇게 축 처진 몰골로 있었을 리가 없었다.
리어트도 부정의 말을 내놓으려던 건 맞지만 이렇게 대놓고 한심하다는 눈빛을 받으니 기분이 좀 그랬다.
머리를 긁적이며 그가 다시 서랍을 뒤졌다.
“뭐 찾아요? 다른 방법도 없다면서요.”
“혹시 모르잖아.”
“그래서, 괜찮은 방법은 찾았어요?”
“아니. 다시 찾아봐도 없네.”
리어트가 먼지만 묻어나는 손을 탈탈 털었다.
데보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명색이 칼리스타 부단주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때 뭐라고 핀잔을 주려던 데보라의 뒤에서 잠깐 빛이 반짝였다.
그것을 포착한 리어트가 얼른 책상에서 내려왔다.
“이봐.”
“네?”
“아무래도 나한테 방법이 생긴 것 같은데.”
리어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데보라도 고개를 돌렸다.
한쪽 벽에 걸린 거울에서 흰빛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저게 뭔데요?”
“연락용 아티팩트.”
“저걸로 아가씨랑 연결이 되는 거예요?”
“아니, 다른 사람.”
잠깐 화색이 돌았던 데보라가 금세 실망했다.
“다른 사람 누구요?”
“칼로프의 황태자.”
뜻밖의 인물이 언급되자 데보라가 잠시 멈칫했다.
예전에 윈터와 칼로프의 황태자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부터, 그녀는 그 황태자라는 인간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아가씨를 찾는데 저 황태자가 무슨 도움이 되는데요?”
와락 표정을 구긴 데보라가 물었다.
“그런 게 있어. 일단 잠깐 나가 있을래?”
“왜요?”
“외부인이 황태자랑 대화하는데 있는 건 좀 그렇잖아.”
“안 들키게 잘 숨어 있을게요!”
당당하게 책상을 가리키는 데보라를 보며 리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뭐, 어차피 크게 상관없으려나.”
칼리스타는 칼로프의 황태자가 황위를 찬탈하기 위한 계획에 협조하기로 했다.
그 약속의 증표로 그들은 델에게 연락용 아티팩트를 전달했으나 여태껏 신호가 왔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직 그럴 만한 시기도 아니었고.
그런데 지금 예고도 없이 칼로프에서 연락이 온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아, 아, 리어트? 거기 있어? 내 목소리 들려?]”
“역시.”
리어트가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빛이 차오른 거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라졌다던 윈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