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50)

126화

“공작, 내가 뭐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네, 물어보세요.”

“2황자, 아니 당신네 황제 폐하 대관식, 봤어?”

원래의 윈터라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어야 할 질문이었다.

그녀는 2황자 지지자를 꼽을 때 둘째가라면 서러울 열렬한 충심의 소유자였으니까.

그런데 어째서일까.

어깨를 움찔한 윈터는 그저 은은하게 미소만 지을 뿐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델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혹시 둘이 무슨 일 있었어?”

“그럴 리가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게슴츠레한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채 윈터가 부정했다.

싱긋 웃는 얼굴이 어딘지 낯설었다.

묘한 위화감에 델이 고개를 갸웃했다.

“윈터.”

“네, 전하.”

“그대, 정말 괜찮은가?”

“그럼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인 윈터가 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응? 갑자기 손은 왜 내밀어?”

“지원군을 부를까 해서요.”

“지원군?”

“네. 전에 제가 드린 아티팩트, 아직 가지고 계시죠?”

델의 동공이 크게 부풀었다.

그녀를 마주한 윈터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 * *

화기애애한 칼로프 황궁과 달리 제니어스 황궁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새로 즉위하신 황제 폐하가 갑자기 광증이 들었…….”

“쉿!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말을 해!”

귀를 쫑긋거리던 궁인 하나가 소문의 주체가 황제라는 것을 알고 기겁했다.

뒤늦게 입을 막긴 했지만 이미 중요한 말은 다 빠져나온 뒤였다.

아무리 쉬쉬해도 소문이 번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다른 얘기도 있는데.”

입을 틀어막혔던 궁인이 난간을 닦다 말고 또 말문을 열었다.

“너, 황제 폐하 얘기라면 입도 벙긋하지 마.”

“이번엔 아니야. 으음, 아닌가? 약간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얘기인데?”

속닥거리는 두 사람의 얘기를 묵묵히 듣던 다른 궁인이 물었다.

“뭐야, 너 원래 이런 쪽으로는 관심 없지 않았어?”

“근데 네가 궁금하게 만들잖아.”

“크흠, 뭐, 내가 좀 그렇긴 하지.”

쓸데없이 으스대던 궁인이 잔뜩 몸을 낮췄다.

주위에 있던 다른 궁인들이 귀를 쫑긋거리며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다들 별궁 손님 알지?”

“그……공작 각하?”

“그래! 그 손님, 얼마 전에 실종되셨대.”

“뭐?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근데 그냥 실종이 아니라…….”

잔뜩 신이 나서 입을 털던 궁인이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다들 뒷이야기가 궁금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누군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제게 한껏 집중된 시선을 즐기던 궁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1황자 전하와 사랑의 도피를 했대!”

* * *

와그작,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살기가 넘실거렸다.

황궁에 도는 소문을 전한 궁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납작 엎드렸다.

“소, 소인은 그저 소문만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만하면 됐다. 이만 물러가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궁인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메이딜리언이 작게 혀를 찼다.

“사랑의 도피, 라.”

소문을 되짚으며 메이딜리언은 아스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여행을 떠날까 합니다. 아주 멀리요.’

당시에는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말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윈터와 아스터가 사라진 시기가 얼추 맞아떨어지며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는 듯했다.

“정말로 그 두 사람이 함께 떠났을까요?”

곁에서 궁인의 이야기를 함께 보고 받던 에른스트 후작이 넌지시 물었다.

메이딜리언은 짧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윈터가 다시 깨어난 뒤로 아스터를 만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아스터가 여행 얘기를 꺼낸 그 시간, 이미 윈터는 황궁에 없었다.

그런 전제들을 모두 지우고서라도 메이딜리언은 그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그런 표정이십니까?”

에른스트 후작은 줄곧 메이딜리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메이딜리언은 지금 제 얼굴이 어떤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 표정이, 뭐가 어떻단 말인가?”

“굉장히 불쾌해 보이십니다.”

“아아.”

메이딜리언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아무리 소문이라지만 둘이 엮인 것 자체가 불쾌하니까.”

“……예?”

타오를 듯한 적개심에 에른스트 후작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메이딜리언은 꽤 오래전부터 아스터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섭정의 비리를 밝힐 증거를 모두 제공하겠습니다. 그 대신.’

‘대신 소공작을 내게 줘.’

아니, 사실 처음부터 무척이나 거슬렸다.

‘진심입니다.’

‘내게 와요, 소공작.’

다행히 윈터가 그를 거절했고, 그 후로 순순히 포기한 듯싶지만 그래도 맘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새삼 잊고 있던 짜증까지 몰려와 메이딜리언이 신경질적인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때 그냥 죽일 걸 그랬나.”

그의 살벌한 중얼거림을 에른스트 후작은 애써 못 들은 척했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던 후작의 눈에 한창 황궁 마법사와 토론하는 엘리슨이 들어왔다.

윈터가 머물던 별궁을 조사하며, 마법사는 연신 감탄을 마지않았다.

“놀랍군요. 설마 이렇게 간단히 주술을 파훼하고 심지어 이동마법을 썼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당연하죠! 이건 평범한 인간의 솜씨라고 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황궁 마법사는 눈앞에 만약 윈터가 있었다면 그 앞에 납작 엎드려 경배라도 할 듯한 얼굴이었다.

메이딜리언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그들에게 다가섰다.

마법사가 한 말 중에 걸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고?”

“헉, 폐, 폐하를 뵙습니다!”

“오셨습니까, 폐하.”

예고도 없이 나타난 메이딜리언을 보고 다들 창백한 얼굴이 됐다.

오직 엘리슨만이 태연한 얼굴로 새 황제를 맞이했다.

그녀는 얼마 전 황제의 보좌관으로 입궁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맡게 된 사건이 바로 윈터 실종사건이었다.

‘아가씨가 살아야 우리도 삽니다.’

그렇게 간곡하게 당부했었는데.

엘리슨은 밀려오는 한숨을 꾸욱 내리눌렀다.

윈터가 없는 황궁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녀는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과 같은 메이딜리언을 걱정스레 응시했다.

“어디로 갔는지 추적해라.”

“예? 그건 현재 불가능합니다. 마력이 너무 혼재되어 있는 데다 마력 제어 주술이 오히려 추적을 방해하고 있거든요.”

“……하.”

이 와중에 황궁 마법사는 눈치 없이 안 된다는 말이나 지껄이고 있었다.

물론 마법사의 말이 거짓일 리는 없겠지만, 지금 곧이곧대로 안 된다고 했다가는 대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폐하, 일단은 저희가 최대한 찾아보겠습니다.”

엘리슨은 황급히 마법사를 밀어내고 말했다.

그녀의 뒤에 선 마법사는 안 되는 걸 안 된다고 말했는데 대체 왜 이런 반응인지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아직 몸이 회복되기 전이니 멀리 가지는 못하셨을 겁니다.”

메이딜리언은 엘리슨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그 몸 안에 있는 심장이 어떤 것인지 모르나?”

엘리슨의 말대로 다 괜찮을 것이라고, 얼마 안 가 돌아올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기엔 메이딜리언은 윈터를 꽤 잘 알았다.

이렇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갑자기 사라질 리도 없고, 심지어 그런 한 줄짜리 성의 없는 쪽지를 남길 리도 없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그녀가 오랫동안 고대하던 그의 대관식이었다.

메이딜리언의 생일이기도 했다.

얼굴을 보지 못했던 지난 시간에도 윈터는 꼬박꼬박 메이딜리언의 생일을 챙겼다.

그를 생각하며 고심했을 선물들과 섬세하고 유려한 필체로 적힌 길고 긴 편지들을 메이딜리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어디로든지 갈 수 있다.”

두 사람이 냉전 아닌 냉전을 벌인 것은 맞지만, 이런 식으로 끝낼 만한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정말로 윈터가 그에게 화가 나서 사라진 거라면 메이딜리언은 이렇게 불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찾아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애써 불안감을 억누른 채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부디. 내 인내심이 닳아 없어지기 전에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그런 그의 앞에서 다들 깊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 *

똑똑, 빛 한 점 들지 않는 방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리어트는 대답 대신 눈앞에 보이는 아무거나 집어 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집어던진 게 술병이었던 모양이었다.

“저, 부단주님.”

“부르지 마.”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돌려보내.”

“이익! 그게 무슨 무책임한 소리예요!”

리어트가 건성으로 대답하는 소리를 듣다못한 손님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데보라였다.

그녀는 어두컴컴한 방 안을 들여다보자마자 코부터 틀어막았다.

“우욱, 술 냄새.”

카우치에 폐인처럼 늘어져 있던 리어트가 힘없이 손을 들었다.

“안녕.”

“안녕은 개뿔. 안녕 못하거든요!”

“나도 그런데.”

실없는 소리를 하며 리어트가 낄낄거렸다.

술에 절어 있는 그의 한심한 꼴에 데보라가 작게 혀를 차더니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으윽.”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햇빛에 리어트가 잔뜩 웅크렸다.

마치 햇빛에 닿으면 안 되는 음침한 식물 같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당장 정신 차려요!”

데보라가 리어트의 등짝을 철썩 내리쳤다.

그녀의 요구에 따라 데보라를 부단주의 방으로 어쩔 수 없이 안내했던 길드원이 흠칫 놀랐다.

저런 짓을 하고도 손목이 날아가지 않는 사람은 윈터를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아, 아파.”

“내가 더 아프거든요? 무슨 사람 몸이 돌덩이 같아?”

리어트가 영혼이라곤 요만큼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히려 데보라가 얼얼한 제 손을 문지르며 버럭 외쳤다.

“비상이에요! 아가씨가 사라졌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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