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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125/150)

125화

윈터의 생각을 지지라도 하듯 델이 무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원래 좀 까칠해.”

“그런가요?”

“응, 그런 편이지. [특히 내 애인들을 질투해.]”

델은 일부러 뒤 문장을 칼로프 어로 말했다.

흠칫한 무니스가 금세 발끈한 듯 외쳤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기는. 넌 늘 그러잖아.]”

“[질투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흐응, 진짜 아니야? 너 기억 안 나? 그때 이프스가 나한테…….]”

두 사람이 워낙 빨리 말한 탓에 윈터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델은 시종일관 히죽거렸고 무니스는 몇 번이고 울컥해 반박하는 걸로 봐서, 일방적으로 무니스가 델에게 당하는 상황인 듯했다.

“[알겠어, 알겠어. 그런 걸로 할게.]”

“[하아, 전하는 정말…….]”

놀릴 만큼 충분히 놀렸는지 델이 킥킥 웃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던 무니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 놀리셨으면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애인 분이랑 좋은 시간 보내시죠.]”

무니스는 일부러 윈터 보고 들으라는 듯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또박또박 발음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네임택 픽스델이 확인까지 해 주고 나니 새삼 놀라웠다.

쌩하니 바깥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윈터는 그저 멍하니 입만 벌렸을 뿐이었다.

델은 이제 아예 배를 부여잡고 낄낄댔다.

“봐, 질투 맞지?”

“더 놀렸다가는 전하랑 다시는 말도 안 섞을 것 같은데요.”

“그런가? 아아, 역시 귀엽다니까.”

얼마나 웃은 건지 찔끔 흐른 눈물을 닦으며 델이 중얼거렸다.

“전하, 혹시…….”

“응?”

“저 사람도 아나요?”

윈터는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그래도 델은 충분히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아니, 몰라.”

무니스는 델이 여자라는 것을 모른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델이 확인까지 해 주고 나니 새삼 놀라웠다.

“하여간, 바보라니까.”

무니스가 나간 방향을 보며 델이 툴툴거렸다.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면서도 그 눈빛에 애정이 가득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누군가 속삭였다.

―잘됐네. 당분간 여기서 숙식 해결하며 저 얼간이 돈이나 뜯어내자.

“그래, 좋은 생각이야.”

“응? 뭐라고?”

델이 되묻는 말에 윈터가 눈을 깜박였다.

“뭐가요?”

“방금 그대가 뭐라고 중얼거리지 않았나?”

“아뇨. 전혀요.”

“내가 잘못 들었나 보군.”

잠깐 갸웃하던 델은 이내 윈터의 방에 성대한 식사를 차려 주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도 한참이나 깔깔대며 웃었다.

그리고 이 대화를 통해 델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윈터가 한 달 만에 깨어난 뒤로도 바깥 생활은 거의 하지 못했다는 것을.

제니어스의 일에 대해 물을 때에도 전부 타인에게 전해 들은 내용뿐이었다.

그것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델은 선뜻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쪽으로 쭉 가면 도서관이 있어. 정확히는 고문서들이 가득하다고 해야 하나.”

“흐음, 흥미로운걸요.”

“그대가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알려 준 거야.”

“전하께서는 관심 없으세요?”

“내가 그런 활자 나부랭이를 좋아할 것 같나?”

“으음, 전혀요.”

식사를 마친 뒤에는 델이 직접 황궁 내부를 안내했다.

지나가는 궁인들은 델과 윈터를 신기한 듯 쳐다보며 속닥거렸다.

다행히 타인의 시선에 이미 이골이 나 있던 터라 두 사람은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윈터는 그림으로만 보던 칼로프식 건물 양식들을 눈에 담으며 연신 감탄했다.

상대의 반응이 좋으니 델은 더욱 신이 나서 열심히 황궁 곳곳을 소개했다.

“[산책은 즐거우십니까, 황태자.]”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앞에 뜻밖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후 마마.]”

한창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윈터는 궁인들을 가득 이끌고 있는 물빛 머리카락의 미녀를 마주하고는 얼른 칼로프식 인사를 건넸다.

“[아닉타의 가호가 가득하시길. 제니어스의 윈터 블라디미르가 칼로프의 주인을 뵙습니다.]”

황궁이니 당연히 칼로프의 황제와 황후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윈터는 어디까지나 조금 소란스럽게 궁을 방문한 델의 손님이었다.

설마 황후가 직접 나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델이나 윈터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만나서 반갑군요, 공작.]”

칼로프 제국의 사벨라 황후.

어린 황자를 앞세워 델의 지위를 위협하는 정적이자, 예언이 두려워 제 딸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인 폭군을 강아지 다루듯 손쉽게 조종하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사벨라 황후는 늘 델에게 관심이 지대했다.

특히나 얼마 전 델이 부득불 우겨 제니어스에 사절단으로 참석한 것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어제 난데없이 황궁을 습격한 괴한의 정체가 바로 그 제니어스의 공작이라고 하니 직접 그 얼굴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 델과는 꽤 친밀해 보이는군요.]”

얼마 전 즉위한 2황자의 충신인 윈터 블라디미르 공작을 사벨라 황후가 뜯어보듯 살폈다.

악명과 달리 영 비실비실해 보이는 외양이었지만, 그녀는 방심하지 않았다.

저 안에 얼마든지 독사가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 네. 우연히 사고를 겪어 황궁에 불시착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황태자 전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아직 정확한 이유를 기억해 낸 것은 아니라서 윈터는 적당한 변명거리를 언급했다.

그러나 사벨라 황후는 딱히 그녀에게 벌어진 사고를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흐음, 그래요? 사고라. 그것참 안된 일이군요.]”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내 궁에도 들러요.]”

“[……네?]”

사뿐사뿐 고양이처럼 걸어온 사벨라 황후가 요요한 눈빛으로 윈터에게 속삭였다.

“[내가 제니어스에 대해 제법 관심이 있어서, 공작에게 여러 가지를 묻고 싶군요.]”

“[저, 그러니까…….]”

윈터가 답을 망설이는 사이 델이 얼른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마마, 제니어스에 관심이 그토록 크셨다니, 미처 몰랐습니다.]”

“[그래요. 그대의 불찰이지요. 이 어미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지 않습니까.]”

“[제니어스에 대해서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면 제가 얼마든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암만 그래도 제국의 공작만 할까.]”

부채를 살랑이며 싱긋 웃는 얼굴이 아름다웠다.

독한 향수 냄새가 공기를 타고 넘실거렸다.

델은 애써 초조한 기색을 감춘 채 미소 지었다.

“[짧은 여독을 풀고 나면 이자는 금세 황궁을 떠날 것입니다.]”

“[어머, 그래요? 안타까워라.]”

“[그러니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제게…….]”

“[그럼 내일 어때요?]”

사벨라 황후가 델의 말을 끊어 내고 대뜸 물었다.

자칫 집요하고 무례해 보일 수 있는 요구였으나 타국의 황후가 거듭 요청하는 일이었다.

감히 허락도 없이 황궁에 발을 들인 공작 따위가 거절할 수 없었다.

윈터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마마.]”

곁에서 델이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사벨라 황후의 웃음소리에 가려져 금세 자취를 감췄다.

“[좋아요. 그럼 내일 사람을 보내지요.]”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짓던 사벨라가 윈터에게 속삭였다.

“[그대에게도 아닉타의 가호가 가득하길.]”

바라는 것을 얻어 낸 사벨라 황후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궁인들이 총총 발걸음을 옮겼다.

“하아.”

사벨라 황후가 멀어지고 나자 델이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것인지, 윈터 또한 바짝 굳어 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델은 근처 벤치에 털썩 주저앉더니 말했다.

“사실 그대는 그리 좋지 못한 타이밍에 왔어.”

“어떤 타이밍인데요?”

“내가 드디어 일을 저지를 타이밍.”

짙은 그늘이 드리운 얼굴로 델이 중얼거렸다.

일을 저지를 타이밍이라면, 아마도 물밑에서 오래도록 다퉈 오던 두 세력이 드디어 전면전을 펼칠 때라는 의미인 듯했다.

정확히는, 델이 예언을 이루려는 것이겠지.

‘새벽의 별 아래 태어나 아비를 죽이고 마침내 제왕이 되는 사막의 여인이 있다.’

예전에 델이 언급했던 예언을 떠올리며 윈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약속을 지키죠.”

델에게 다가간 윈터가 가볍게 말을 건넸다.

“뭐?”

느닷없는 약속이라는 소리에 델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윈터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도와드리겠다고요.”

씩 웃는 얼굴이 퍽 자신만만했다.

“원래 일 저지르는 건 제 전문이거든요.”

그러나 델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윈터가 칼리스타의 주인이자 블라디미르 가문의 공작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막 병상에서 일어난 데다, 갑자기 타국의 황궁에 떨어졌고 어째서 그런 일이 발생한 건지 아직 정확한 이유를 기억해 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맨몸으로, 그게 가능한가?”

윈터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히 꿰고 있는 제니어스 제국도 아니고, 타국에서 혈혈단신으로 과연 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 델의 생각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아주 맨몸은 아니죠.”

이내 윈터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위로 찬란한 황금빛 마력이 맺혔다.

척 봐도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밀도가 높은 마력이었다.

방대한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던 심장의 문제가 사라졌으니, 윈터는 혼자서 너끈히 군대를 상대하고도 남았다.

“역시 탐나는 인재야.”

그 마력을 알아본 델이 작게 감탄했다.

그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윈터에게 재차 제안했다.

“그쪽 황제도 즉위했던데, 이제 정말로 이쪽으로 넘어오는 건 어떤가?”

“으음, 글쎄요.”

그러나 이번에도 윈터의 반응은 영 미적지근했다.

보란 듯이 입술을 삐죽인 델이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2황자가 즉위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날짜가 겹쳤다.

메이딜리언의 대관식 날, 그의 충직한 지지자인 윈터는 칼로프의 황궁에 떨어졌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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