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50)

124화

“부, 분명 어제 저녁때까지만 해도 계셨는데…….”

“예,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 연회에 참석 준비를 도와드리러 가 보니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셨습니다.”

연회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연회의 주인공이 기사의 말을 듣기 무섭게 바깥으로 뛰쳐나갔으니 남은 이들끼리 파티를 즐길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부의 침입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살기나 마력 같은 것이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렇다는 것은…….”

보고를 듣는 메이딜리언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기사들의 말을 조합해 보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윈터는 자력으로 이 방을 탈출했다.

무수히 많은 주술과 문 앞을 철통같이 지키는 기사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연기처럼.

“저, 폐, 폐하.”

보고하는 내내 기사들은 덜덜 떨었다.

메이딜리언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이전에 크비누스와 황궁 보물창고에서 대치 상황일 때부터 그의 무자비한 손속은 익히 알려져 있던 터라, 다들 곧 목숨을 잃으리라 생각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방을 이리저리 수색하던 궁인 하나가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그녀가 잡은 종이 끝이 파르르 진동했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메이딜리언이 이내 쪽지를 받았다.

안에는 짤막한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생일 축하해, 메이.

아직 제대로 근육이 생기지 않아서인지 삐뚤빼뚤하고 끝이 흐릿했지만 익숙한 필체였다.

우스울 정도로 낯설고 잔인한 문장에 픽, 메이딜리언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축하한다, 고.”

윈터는 분명 자신에게 대관식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어차피 이 모든 게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당신은 나를 떠났나.

“축하한다, 라…….”

길게 구구절절 적은 사연이라도 쓰여 있었다면 지금보다 기분이 나았을까.

메이딜리언은 알 수 없었다.

그저 깊은 구덩이에서 누가 그의 발목을 붙들고 끌어 내려가는 것처럼 한없이 침잠했다.

주인을 잃은 텅 빈 방은 허망했다.

이곳이 영영 다시 채워지는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문득 메이딜리언의 머리 위로 지독한 공포가 끼얹어졌다.

진득하고 시커먼 악의가 그의 귓가에서 혀를 날름거리기 전에, 메이딜리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장 수색대를 꾸려라.”

자리에서 일어선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사라진 윈터 블라디미르 공작을 찾아라.”

“예, 폐하!”

마치 끈을 잃어버린 마리오네트 같았다.

* * *

“으음…….”

온몸이 욱신거리는 느낌과 함께 윈터가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고개를 돌리니 침대도, 가구도 모두 낯선 것이었다.

“뭐지?”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킨 윈터는 당황했다.

생전 처음 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초면인 여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윈터가 깨어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뭐라고 말을 걸었다.

“어?”

들어 보니 그것은, 칼로프 어였다.

흠칫한 윈터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언젠가 그림에서 한 번 보았던 생경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흰 벽, 하얀 천, 모래바람. 금방이라도 살갗을 태울 듯한 쨍쨍한 햇빛.

“설마…….”

“[괜찮으십니까? 정신이 드세요?]”

척 봐도 충격이 가득한 윈터의 모습에 여자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윈터는 다행히 유창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 칼로프 어를 할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더듬더듬 어설픈 칼로프 어 발음에 여자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황궁입니다.]”

“맙소사.”

제니어스 제국 황궁에 칼로프 어를 하는 여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칼로프 황궁에 있다고?”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 윈터가 애꿎은 제 머리만 쥐어뜯었다.

분명 메이딜리언의 대관식과 성년식을 축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대체 자신이 왜 지금 여기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뭔가에 의해 강제로 차단이라도 된 것처럼 새카맣게 칠해진 머릿속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깨어났다고?]”

“[네. 조금 전에 깨어났습니다, 전하.]”

멍한 머리로 애써 상황을 정리하던 윈터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물러가라.]”

“[네, 전하.]”

여자들을 물린 남자가 성큼성큼 윈터를 향해 걸어왔다.

그녀의 귓가에서 피어싱이 반짝였다.

“안녕, 소공작. 드디어 정신이 들었나?”

씩 웃는 시원한 얼굴은 다름 아닌 델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전하.”

드디어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된 윈터가 작게 안도하며 인사했다.

“소공작도 오랜만이군. 아니지, 이제 공작 각하라지?”

“네, 뭐.”

“소문은 대충 들었어.”

칼로프에서는 항상 제니어스 제국의 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특히나 섭정의 부정과 처형, 그리고 새로 즉위하는 황제에 대한 것은 당연히 예민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델은 추가로 블라디미르 공작가에 대한 소문도 수집했다.

“죽었다 살아났다며. 근데 이렇게 막 움직여도 되는 거야?”

제니어스에서 칼로프 황궁까지는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한 달 만에 깨어난 사람이 장거리 여행까지 감수하며 올 만큼 대단한 게 있지도 않았고.

그렇기에 델의 눈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게 제가 사실, 눈 떠 보니 여기였던 거라 기억이 잘…… 안 나서요.”

“뭐, 하긴, 그럴 것 같더라.”

윈터가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이며 하는 말에 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시 제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아시나요?”

“듣기로는 갑자기 쿵 소리가 나더니 황궁 한복판에 그대가 떨어졌다고 하더라고.”

“……예?”

“그대도 황당하지? 우리도 그랬어. 다들 습격은 아닌지 잔뜩 긴장해서 갔더니 딱 봐도 칼로프 제국민이 아닌 외양이라잖아.”

윈터의 얼굴과 복식을 가리키며 델이 히죽 웃었다.

“대단해, 공작. 설마 여기까지 단신으로 쳐들어올 줄 몰랐어.”

“그, 제가 쳐들어온 게 아니라…….”

“알지, 알아.”

대체 어떻게 갑자기 칼로프 황궁까지 오게 된 건지 윈터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단신으로 타국 황궁에 쳐들어온 인물이 지하 감옥이 아니라 꽤 좋은 방에 고이 모셔졌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무니스가 그대를 알아봤어.”

“무니스?”

“내 호위.”

“아아.”

윈터는 델 근처에 항상 있던 남자를 떠올렸다.

무표정한 장신의 무사는 늘 자신의 주인을 충직하게 호위했다.

“덕분에 그대는 지금 내 손님 신분이야. 정확히는 음, 애인?”

델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느끼하게 말했다.

윈터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으웩.”

“생명의 은인에게 정말 상처가 되는 반응이군, 공작.”

“다시 한번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익숙하게 농담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나 델은 더욱 유쾌해 보였다.

늘 긴장감 가득하던 황궁에서 이렇게 웃어 본 게 얼마 만인지 까마득했기 때문이었다.

이내 웃음을 가라앉힌 델이 윈터에게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칼로프로 오게 된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허.”

“그대가 잘 모르는 것도 있나?”

“그러게요.”

“몸은, 괜찮아?”

“네, 다행히 멀쩡해요.”

단순히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윈터는 정말로 어디 생채기 하나 없이 말짱했다.

사막을 빙빙 돌며 고생하다 갑자기 황궁에 나타났다기에는 복장도 이상했다.

제니어스에서 많이 입는 실내복 원피스 차림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제니어스 황도 어딘가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칼로프 황궁에 뚝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러려면 이동마법으로 그 먼 거리를 단숨에 와야만 하는데, 애초에 그 가설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델은 떠오른 생각 위에 금세 직직 줄을 그었다.

“겉은 멀쩡해 보이긴 하는데 아직은 회복이 필요할 듯하군. 일단 식사부터 하면서 찬찬히 다시 기억을 떠올려 봐.”

델이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떤 이유로 칼로프에 왔든, 그녀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니어스에서 만났을 때부터 줄곧 델은 윈터를 제 밑에 두고 싶었으니까.

마침 윈터가 그토록 아껴 마지않던 메이딜리언이 황위도 이었으니 이제 큰 산은 넘었을 것이다.

모든 일이 다 끝나면 칼로프로 오는 것도 재고해 보겠다는 약속도 있었으니, 잘만 하면 이대로 윈터를 칼로프에 눌러 앉힐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내가 황궁 구경도 시켜 주지.”

“예에, 환대에 감사합니다, 전하.”

델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 이럴 때가 아니지.”

이내 그녀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활짝 문을 열었다.

“모처럼 궁에 손님이 왔으니 그대에게 정식으로 내 사람부터 소개해 주겠어.”

“되게 들떠 보이시네요, 전하.”

“아아, 당연하지. 친우가 우리 집에 놀러 온 것은 처음이니까.”

윈터의 말에 델은 순순히 긍정했다.

친우가 놀러 온 것도 처음인데 마침 그 친우가 무척이나 탐이 나는 인재였으니 저절로 기분이 둥둥 떠다녔다.

이내 문밖으로 쏙 머리만 내민 델이 외쳤다.

“[무니스!]”

“[네, 전하.]”

“[이리 들어와. 네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거구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모래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온통 사막을 닮은 남자였다.

윈터를 마주하고 잠시 미간을 좁힌 무니스가 자신을 향하는 델의 시선에 마지못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무니스, 입니다.]”

“[반가워요. 저는 윈터 블라디미르예요.]”

어설프지만 명료한 칼로프 어에 무니스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동요는 잠깐이었다.

곧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니스를 유심히 살피던 윈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나를 맘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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