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갑작스러운 말에 윈터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엘리슨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러니까 이제 더는 아프지 마시고, 오래오래 전하와 행복하세요.”
더없이 진심인 말에 윈터가 활짝 웃었다.
“네, 그럴게요.”
* * *
어둑한 밤이었다.
익숙한 기척에 윈터가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보였다.
“……메이?”
윈터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려던 그가 움찔하더니 손을 치웠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이 덜 깨 비몽사몽 한 채로 윈터는 멍하니 메이딜리언을 바라보았다.
그는 침대 가까이에 의자를 놓고, 거기에 앉아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주 익숙해 보여서, 윈터는 아마도 제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메이딜리언이 그곳에 앉아 저를 지켜봤을 거라고 짐작했다.
“몸은, 괜찮아요?”
오랜 침묵 끝에 메이딜리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응. 훨씬 나아졌어.”
“조만간 대관식이 있을 거예요.”
“알아. 엘리슨한테 들었어.”
“그날 성년식도 같이 치러질 거예요.”
미처 날짜를 계산해 보지 못했던 윈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년까지만 해도 매해 메이딜리언의 생일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무슨 선물을 줄지 고르면서 시간을 죽였었는데.
“벌써 그렇게 됐구나.”
메이딜리언이 온전히 성년이 된다니 어쩐지 기분이 얼떨떨했다.
대관식과 성년식이라.
황금의 관을 머리 위에 쓴 채 화려한 퍼레이드 한복판에서 메이딜리언이 활짝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윈터가 오래도록 꿈꿔 왔던 일이니까.
만일 그전에 죽게 된다면 영영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그게 꽤 큰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직 성치 않은 몸이지만 그래도 살아 있었다.
그래서 윈터는 용기를 냈다.
“보러 가고 싶어. 그렇게 해 주겠니?”
다행히 메이딜리언은 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전부 당신 보라고 하는 거예요.”
지극히 무던하고도 평범한 그 말에 윈터는 괜히 뺨에 열이 올랐다.
그녀는 어둠을 핑계 삼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이불을 목 끝까지 바짝 올렸다.
“그때 올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할게요.”
메이딜리언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윈터가 거기 있는 걸 봤으니 이제 됐다는 식의 태도였다.
물론 윈터는 아니었다.
“메이.”
멀어지려는 그를 윈터가 붙잡았다.
우뚝 멈춰선 메이딜리언을 향해 윈터가 슬쩍 한쪽 이불을 걷었다.
천이 스치는 소리에 그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누군가 장난처럼 귓가를 물고 간 듯 화끈거렸다.
“들어올래?”
다시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와락 표정을 구긴 메이딜리언이 몸을 돌렸다.
성큼 다가선 그가 윈터를 내려다보았다.
위압적인 자세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태연한 얼굴로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이 흰 피부를 비추며 반짝였다.
밤의 장막과도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흐트러졌다.
메이딜리언의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천천히 몸을 기울인 그가 침대 한쪽을 짚었다.
움푹 들어가는 무게에 윈터의 표정에도 옅은 긴장감이 어렸다.
“내가 자제를 아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지금처럼 안타까울 때가 없군요.”
떨리는 윈터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메이딜리언이 속삭였다.
젖은 목소리가 그녀의 눈두덩 위를 짧게 훑고 지나갔다.
깊은 잠에 빠져 데워져 있던 체온에도 흠칫 어깨가 떨렸다.
쿵, 쿵,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함부로 자극하지 마요. 절대 안정, 잊은 거 아니죠?”
그렇게 말한 메이딜리언은 미련도 없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아무리 윈터가 잡아도 멈추지 않을 것처럼 발걸음이 성급했다.
여전히 침대 한쪽을 비워 둔 채 윈터가 물음을 던졌다.
“메이, 아직도 내가 밉니?”
사실 지금도 윈터가 정말로 바라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이 방을 나갈 수 있었다.
윈터는 일부러 순순히 메이딜리언에게 잡혀 주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메이딜리언 또한 알고 있었다.
윈터가 굳이 이곳에 감금이라는 핑계로 묶여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매일 밤 메이딜리언이 그녀가 잘 있는지 확인하러 오니까.
그 고생을 하며 제 손으로 윈터를 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메이딜리언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요?”
웃음기 한 점 없이 메이딜리언이 되물었다.
감히, 어떻게 제 주인이나 다름없는 윈터에게 원망을 가질 수 있을까.
윈터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는 그녀를 미워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선뜻 메이딜리언은 아니라는 대답을 건네지는 않았다.
“잘 자요, 윈터.”
그저 늘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인사를 남긴 채 방을 나섰다.
윈터는 메이딜리언의 뒷모습을 말없이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잔상이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 * *
그리고 어느 날 밤.
잠의 여신이 윈터를 꿈속으로 데려간 순간, 마침내 전혀 다른 존재가 눈을 떴다.
“킥킥.”
그 존재의 입가가 요요히 휘어짐과 동시에, 윈터의 온몸을 금빛 오로라가 감쌌다.
“멍청하긴.”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가 아, 아, 하고 몇 번 목소리를 냈다.
새로 얻은 몸은 나약했다.
깨어나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길었고, 체력이 회복될 때까지는 이 몸을 지배할 수조차 없었다.
아니, 애초에 아무리 용을 써도 깨어나지 않는 몸의 주인 때문에 ‘그’는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
다행히 다시 깨어난 인간은 착실히 체력을 회복했다.
특히나 하찮은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가진 것이 썩 맘에 들었다.
“그 인간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그’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절대자의 의식이자 마력 그 자체였다.
그것을 깨운 것은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었다.
‘어리석은 누이의 아들들아.’
‘너희는 결코 바라는 결말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쉴새 없이 퍼부어지는 악의가 ‘그’를 전율하게 했다.
전신이 짜릿해지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물론 그 악의의 주인은 이미 목이 잘렸다고 하니 딱히 감사 인사를 전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흐음.”
‘윈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제로 심장을 이식하며 벌어질 부작용을 막고자 결계와 마력 제한이 촘촘히 설계된 감옥이었다.
물론 자신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었지만.
“어린애 장난질 같은 짓을 하는군.”
‘윈터’는 초대 황제의 핏줄이라던 붉은 눈동자의 남자를 떠올렸다.
이 몸의 주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싶어 안달복달하는 꼴이 꽤 우스웠지.
몸과 정신을 지배하려고 인내하는 동안 둘이 삽질하는 걸 구경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답례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 선물이나 주고 갈까.”
작은 콧노래 소리와 함께 윈터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듣자 하니 내일이 대관식이랑 성년식이라던데.
몸의 주인도 내일을 퍽 기대하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대관식이고 성년식이고 볼 일은 없겠지만.
“흠흠, 뭐라고 쓸까.”
잔뜩 신이 난 윈터가 의자에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이내 그녀가 더없이 짤막하고 성의 없는 한 줄을 적어 내렸다.
―생일 축하해, 메이.
그러고는 제 나름대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해.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군!”
싱긋 미소 짓는 얼굴이 경쾌하기까지 했다.
제 할 일을 마친 윈터가 몸의 기억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 볼까…….”
이리저리 헤집어지는 기억 속에서 여러 후보군이 지워졌다.
대현자나 그 제자가 있는 곳은 당연히 제외였다.
‘소공작, 그러지 말고 칼로프로 오는 게 어때?’
여기저기 열심히 헤집은 끝에, 윈터는 기억 하나를 발견했다.
‘원하는 건 뭐든 해 주겠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잘생긴 여자가 여유를 가장한 채 몸의 주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멍청하게도 몸의 주인은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칼로프는 그대에게 언제나 열려 있을 거야. 모든 일을 마친 뒤에 와도 괜찮아.’
‘만약 그때까지도 제가 살아 있다면, 한번 생각해 볼게요.’
마침 약속도 지킬 수 있고, 일석이조였다.
“칼로프, 칼로프라…….”
윈터가 작게 중얼거렸다.
숨이 턱턱 막힐 듯한 무더위와 눈가를 따갑게 스치던 모래바람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 광활한 황무지라면, 새로운 시작으로 꽤 나쁘지 않겠지.
“그래, 거기가 좋겠어.”
홀로 고개를 주억거린 윈터가 눈을 빛냈다.
방에 밀도 있게 깔린 마력 제어 주술이 무색하게도, 금빛 마력은 잔인하게 그 마법들을 찢어발겼다.
이내 그녀의 신형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 * *
메이딜리언은 초조했다.
왜 초조한지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온갖 화려하고 향기로운 것들에 둘러싸인 채로 그는 줄곧 윈터를 생각했다.
나약하고 연약한, 잔인한 그의 주인.
“안색이 안 좋군요.”
술잔을 건네며 아스터가 다가와 말했다.
새로 즉위한 황제라고 하기엔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너무 심란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고맙군.”
여전히 아스터에 대한 경계를 놓지 않은 채, 메이딜리언이 잔을 받아들었다.
계승권을 포기하겠다고 스스로 선언한 그는 조만간 황궁을 떠나게 될 것이었다.
“언제 나가지?”
대뜸 그것부터 묻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아스터가 난처한 듯 미소 지었다.
“내일입니다.”
“빠르군.”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입니다.”
아르만 백작은 아스터의 결정을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메이딜리언의 잔혹성과 비인간적인 면모를 들먹이며 아스터가 황위를 잇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아스터는 도무지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하나쯤은, 제가 원하는 대로 해 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여행을 떠날까 합니다. 아주 멀리요.”
“그렇군.”
메이딜리언의 대답은 형식적이었다.
그가 원래도 남에게 관심이 없긴 했지만, 지금은 아예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연신 연회장 문을 힐끔거리는 것을 보고 아스터는 깨달았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예고도 없이 연회장 홀의 문이 벌컥 열렸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기사가 뛰어들어 오자, 메이딜리언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윈터의 방 앞을 지키는 기사였다.
“폐, 폐하! 공작 각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기사의 외침과 함께 쨍그랑,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며 술을 흘렸다.
피처럼 붉은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