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으음…….”
정곡을 찌르는 말에 윈터가 난처하게 웃었다.
여기서 어설픈 거짓말을 해 봤자 금세 들통이 날 게 뻔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던 것처럼 데보라와 칸나가 동시에 경악했다.
“세상에!”
“맙소사, 감금이라니!”
칸나가 정확히 상황을 짚어 냈다.
뒤늦게나마 감금이 아니라고 해 볼까 싶었지만 어떻게 잘 포장하려고 해도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 또라이가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특히나 칸나의 분노가 대단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메이딜리언의 멱살이라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심정인 듯했다.
여기서 말리지 않으면 정말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메이딜리언과 한 판 붙을 기세였기에 윈터는 황급히 칸나부터 붙들었다.
“두 사람 다 그만해. 난 괜찮아.”
“괜찮다뇨!”
칸나가 역정을 내듯 소리쳤다.
누가 보면 감금당한 사람이 윈터가 아니라 그녀인 듯했다.
“당분간 조심하라고 했잖아.”
윈터는 침착한 얼굴로 칸나를 진정시켰다.
“아가씨,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칸나가 반발했다.
윈터는 아팠다.
메이딜리언을 살리기 위해 그 아픈 몸으로도 여태 최선을 다해 왔다.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는 건 칸나 또한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그건 그 상황에서 윈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난데없이 감금이라니.
칸나가 생각했을 때 메이딜리언 그 멍청이가 하는 짓은 한참 잘못된 일이었다.
지금 어르고 달래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윈터에게 이렇게 험악한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차피 지금 몸 상태로는 못 나가.”
마음씨 착한 윈터는 또 그런 미친 메이딜리언을 다 받아 주고 있었다.
칸나의 눈길이 안쓰럽다는 듯 윈터를 향했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던 몸이 무너져 사경을 헤매며 한 달간 누워 있던 터라, 사실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이어지는 윈터의 말은 명쾌했다.
마력을 담은 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딘가 평소와 달리 반들거리는 눈을 마주하며 데보라와 칸나가 움찔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느낌이 착각이라는 듯 기묘한 눈빛은 금세 사라졌다.
“그래도 혹시 저희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데보라가 윈터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만약 윈터가 지금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둘러업고 뛰쳐나갈 기세였다.
그런 두 사람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윈터는 그저 푸스스 웃었다.
“그래, 알겠어. 고마워.”
아직 윈터의 몸이 온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얼마 있지 않아 돌아갔다.
그 잠깐의 대화도 몸에 꽤 무리가 된 듯 그 뒤로 윈터는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며칠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윈터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같이 찾아오던 엘리슨이 마침내 면회를 허락받았다.
“오랜만이에요, 엘리슨.”
윈터가 활짝 웃으며 반겼다.
그러나 엘리슨의 표정은 참담했다.
그녀는 윈터가 목숨을 던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한 장본인이었다.
천천히 회복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전보다 한참이나 마르고 연약해진 모습에 엘리슨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살아 계셔서 다행입니다.”
엘리슨이 더없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당시 평원에서 전투를 하며 거대한 마력 폭풍에 휘말렸을 때, 윈터는 잠깐이지만 숨이 멎었었다.
심장에 담겨 있던 마력들이 폭주하며 스파크를 일으켰고, 감히 누구도 그녀의 주위로 다가가지 못했다.
메이딜리언과 대현자 에르퀼이 아니었다면 윈터는 그때 정말로 죽었을 거였다.
“크비누스가 처형되었습니다.”
“네, 들었어요.”
윈터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에만 갇힌 신세였지만 궁인들을 통해 바깥소식은 어느 정도 전해 듣고 있었다.
“선대 공작 각하께서 아직 영지의 일을 정리하느라 올라오지 못하셨지만, 조만간 입궁하신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엘리슨은 윈터의 어머니이자 선대 블라디미르 공작인 오필리아의 소식도 전해 주었다.
두 모녀도 쌓인 이야기가 많을 것이나 주변 사정 때문에 선뜻 만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윈터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엘리슨은 그런 윈터를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그자, 목이 잘리는 순간에도 빌지 않더군요.”
“크비누스요?”
“예.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엘리슨이 처형 날을 회상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녀를 포함한 아르카나의 일원들은 모두 선황 미쉘라가 베풀어 준 은혜를 갚고자, 궁을 나와 오랜 시간 숨어 살며 크비누스의 목을 칠 날만을 기다려 왔었다.
마침내 복수가 이루어지던 순간을 그들은 똑똑히 지켜보았다.
반성은커녕 더없이 떳떳하다는 듯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처형장으로 들어서던 머저리의 최후를.
“홀가분하신가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윈터의 물음에 엘리슨이 마른세수를 했다.
오직 복수만을 바라며 살아왔는데, 막상 목표를 이루고 나니 다음 단계로 무엇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윈터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다음에 하실 일이 정해지지 않은 거라면, 메이를 도와주세요.”
엘리슨이 작게 웃었다.
“아가씨는 여전히 전하 생각뿐이시군요.”
“그, 런가요?”
윈터가 어색하게 귓가를 문질렀다.
자기도 알지 못한 사이 마음을 들킨 게 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아가씨는 어떻습니까?”
“뭐가요?”
“원하시던 걸 이룬 기분이요. 홀가분하신가요?”
“으음, 글쎄요.”
말끝을 늘인 윈터가 곰곰이 자신의 계획을 되짚어 보았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그나마 완벽에 가까웠다고 생각한 계획들을.
과정은 때때로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그러졌고, 결말은 전혀 다른 곳에 다다랐다.
“제가 바라던 끝은 아니지만, 나쁘지는 않네요.”
그것이 오랜 고민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작게 미소 짓는 얼굴이 후련해 보여서 엘리슨은 안도했다.
“대현자님께서 골드 드래곤의 심장을 이식했습니다.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습니까?”
“네. 다행히도요.”
윈터의 심장은 매일 아침마다 의사가 와서 검진하고 있었다.
의사가 놀랄 정도로, 심장은 윈터의 몸에 잘 안착해 적응하는 중이었다.
근육이 빠진 것 외에는 겉으로 봤을 때 윈터는 크게 아픈 곳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언제 심장이 부작용을 일으킬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한동안은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채 침대 신세를 져야 할 것이었다.
“크비누스가 골드 드래곤의 심장을 봉인한 상자에 무슨 이상한 주술을 걸었다고 들었는데, 그건 아무 이상도 없는 모양입니다.”
“그러게요.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다행이군요.”
“심장을 봉인했던 상자가 제 역할을 아주 잘했나 봐요.”
윈터의 대답에 엘리슨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에 들었던 메이딜리언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전하가 오랫동안 바라던 겁니다.”
“네?”
“아가씨 심장이요. 골드 드래곤의 심장을 주겠다고 황위에 오르신다고 하셨거든요.”
갖은 이유를 대도 황제는 안 하겠다던 작은 꼬마가 윈터의 심장 얘기를 꺼내자마자 태도가 돌변하던 게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 맹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전히 두렵고 이상한 황자지만, 엘리슨은 끝내 제 목표를 이룬 메이딜리언이 나름대로 대견했다.
“흐음, 그랬군요.”
윈터가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엘리슨이 물었다.
“혹시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
픽 웃은 윈터가 대답했다.
“그럴 거면서 대체 왜 날 감금했나 싶어서요.”
“……예?”
엘리슨은 순간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감금이라니, 대체 누가?
눈만 슴벅이던 그녀는 금세 상황 파악을 끝냈다.
윈터가 두문불출하고 방 안에서 요양만 하는 게, 몸을 정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감금되었기 때문이었다니.
“아직 사춘기가 안 끝났나 봐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윈터가 중얼거렸다.
“전하께서는 이미 사춘기를 겪으셨고 훌륭하게 잘 자라셨습니다.”
“그럼 대체 왜 저러는 거예요?”
엘리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늘 메이딜리언과 윈터 사이에서 윈터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메이딜리언의 편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엘리슨은 윈터가 사경을 헤매는 것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고, 피칠갑을 하고 나타나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던 메이딜리언 또한 지켜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윈터가 없으면 메이딜리언은 황제는커녕 당장 세상을 등지고 말리라는 것을.
“본인이 한 말과 행동을 돌아보세요.”
“……저요?”
“네. 개를 길들였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셔야죠.”
“개……라니.”
어디까지나 비유였지만 윈터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엘리슨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본인이 키우시던 개니까 주워 가서 다시 잘 키워 보세요, 제발. 네?”
“그, 그럴게요.”
윈터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대관식이 있을 겁니다.”
“벌써요?”
“예. 아르만 백작의 반발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크비누스가 제안한 후계자 경합의 과제를 먼저 완성한 건 2황자 전하시니까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엘리슨이 간략하게 상황을 전했다.
“결정적으로, 1황자 전하께서 계승권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랬군요.”
윈터의 표정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럴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아스터의 계승권 포기가 빨랐기 때문이었다.
“아르만 백작의 충격이 상당했는지 벌써 며칠째 저택에서 끙끙 앓는다는군요.”
엘리슨이 픽 웃으며 빈정거렸다.
그녀는 선황의 친위대 시절부터 아르만 백작을 탐탁지 않게 여겼었다.
평생 제 아들을 앞세워 권력을 탐할 생각만 하더니,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라 속이 시원했다.
“아가씨.”
방을 나서기 직전, 엘리슨이 윈터를 불렀다.
“예?”
“아가씨가 살아야 우리도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