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흠칫, 날카로운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윈터의 어깨가 튀었다.
황급히 동요를 숨긴 그녀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계획이라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솔직히 말하자면 계획의 일부는 맞았다.
메이딜리언을 황제로 만들고, 그 곁에는 그가 그토록 바라던 칸나가 있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지금 그렇다고 인정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메이딜리언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윈터의 부정에도 흉흉한 분위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메이딜리언이 그녀의 반응에서 긍정을 읽어 냈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렇군요.”
신경질적인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저, 메이…….”
“제가 그자를 죽이면, 어쩌실 건가요?”
“뭐? 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당신의 계획은 전부 엉망이 되는 겁니까?”
“메이!”
윈터가 기겁하며 메이딜리언을 불렀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당신은 내가 황제가 되어 행복하길 바란다고 했죠. 그건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하고 있는 아름다운 꿈인가요?”
“……그래.”
“거기에 단 한 번도, 당신이 있던 적은 없었나요?”
“…….”
윈터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바란 적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지만, 그녀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었다.
당연히 그녀가 그리는 미래에 자신의 존재는 없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차이였다.
윈터가 그리는 미래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메이딜리언이 그리는 미래에는 그녀가 존재했다.
늘, 언제나.
“하.”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떨궜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미 다 치료가 되었는데도, 아팠다.
어딘가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메이.”
“당신은 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
서늘하게 웃은 메이딜리언이 선포했다.
“제가 알아서 가져가겠습니다.”
그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듯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이내 돌아선 메이딜리언이 윈터에게 말했다.
“이 방 전체에 결계와 마력 제한이 걸려 있어요.”
“……뭐?”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는 뜻이에요.”
어두운 그림자가 메이딜리언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놀라울 정도로 낯선 모습인 그를, 윈터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신은 여기서, 내가 황제가 되는 걸 지켜보세요.”
“잠깐만, 메이!”
도망치듯 메이딜리언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윈터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침대에서 일어서서 그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한 달이나 누워 있던 몸이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일 리 없었다.
몇 걸음 가지도 못해 그대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넘어진다!’
힘없이 허물어지는 몸이 바닥과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을 때 윈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예상하던 아픔은 없었다.
단단하고 뜨거운 체온이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메이.”
“함부로―”
울컥해서 뭔가를 말하려던 메이딜리언이 꾹 입을 다물었다.
이를 악물고 참아 내느라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냉랭하던 시선에는 어느새 옅은 걱정이 스며 있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 한 달이나 누워 있었다는 말을 기억은 하는 겁니까?”
몇 번 눈을 깜박이자 그의 눈에 비치던 걱정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듯 자취를 감췄다.
윈터는 메이딜리언의 팔을 붙잡은 채 간절하게 말했다.
“메이, 칸나는 안 돼. 알지? 응?”
그러나 메이딜리언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작게 헛웃음을 지은 그가 되물었다.
“……이 상황에 걱정할 게 그것밖에 없나요?”
메이딜리언이 묻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윈터가 눈을 깜박였다.
금빛 눈동자에 잠시 낯선 빛이 어렸다.
“너는 어차피 날 못 죽여.”
“당신…….”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잖아?”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한 말투에 이번엔 메이딜리언이 움찔했다.
그 또한 이렇게 솔직하게 본심을 드러내는 윈터의 모습이 낯설었다.
마치 윈터의 모습을 한 다른 사람인 것처럼…….
“해치지 말란 뜻이야.”
픽 웃은 윈터가 덧붙였다.
덕분에 상념에서 깨어난 메이딜리언이 와락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틀렸어. 그건 정답이 아니야.”
윈터의 말이 맞았다.
메이딜리언은 윈터를 죽일 수 없다.
그녀가 너무도 소중하고 유일해서, 윈터가 바라는 것이라면 뭐든 할 것이고, 그녀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제 성질은 잔뜩 죽인 채 얼마든지 온순한 짐승처럼 지낼 수도 있었다.
메이딜리언은 기꺼이 그녀의 발치에 엎드릴 수 있는데, 윈터는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여전히 당신은 날 안 믿는구나.”
윈터가 그저 명령하기만 하면, 메이딜리언은 그녀의 말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윈터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것이 메이딜리언을 때때로 갑갑하게 만들었다.
“이제 당신이 원하던 대로 세계는 내 손안에 있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오래 서 있지 못하는 윈터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점점 몸에 무리가 오는 것 같았다.
“당신이 바라던 착한 아이로 자라지 못해 미안하군.”
그런 그녀를 단단히 붙잡은 채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그러나 윈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충분히 착한 아이였다. 그녀에게만은.
“그래도 어차피 당신은 날 못 놓아. 그렇지?”
대답을 구하듯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그런 그가 어딘지 낯설어서 윈터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나약할 대로 나약해진 몸이 멀리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윈터가 멀어진 만큼 성큼 다가선 메이딜리언이 속삭였다.
“난 영원히 당신 것이니까.”
의식하지 못한 사이, 물씬 피비린내가 풍겼다.
마치 원작의 메이딜리언을 마주한 듯한 느낌에 윈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문득 이 개고생을 하면서 그를 열심히 보필한 게 다 헛수고처럼 느껴졌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누군가 옆에서 열심히 부추기는 것처럼 울컥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이…….”
윈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내 그녀가 메이딜리언의 멱살을 잡고 외쳤다.
“이 미친놈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귀한 몸에 멋대로 상처 내고 죽는다고 협박하고, 칸나를 죽인다고 거짓말하고, 심지어 감금이라니.
아직 회복되지 못한 몸에 열이 오르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던 메이딜리언은 비틀거리는 윈터를 부축해 다시 침대에 돌려놓았다.
그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쉽고 간단했다.
“쉬세요.”
씨근덕거리는 윈터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메이딜리언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내 쿵, 하고 굳게 문이 닫혔다.
* * *
윈터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이유는, 대외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로 포장되었다.
그녀를 방문하는 손님이 있다면 소수 인원에 한해서 허용되었다.
면회가 가능하다는 말에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데보라와 칸나였다.
“아가씨!”
“오랜만이야.”
부쩍 야윈 윈터의 모습을 마주한 채 데보라와 칸나는 한참이나 훌쩍거렸다.
쉽게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데보라를 품에 끌어안은 채 윈터는 칸나에게 경고했다.
“칸나.”
“네, 아가씨.”
“당분간 조심해.”
메이딜리언이 정말로 그녀를 죽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칸나가 암습 같은 걸로 죽을 만큼 약하지 않다는 것은 윈터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칸나를 죽일 수 있을 만한 인물은 메이딜리언 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게 무슨…….”
“특히 메이딜리언이랑은 가급적 한 공간에 단둘이만 있으면 안 돼.”
“네? 제가 그 자식이랑 그럴 일이 있을까요?”
윈터의 말에 칸나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튼, 조심해.”
“네, 그럴게요.”
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윈터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평소에 윈터가 허투루 경고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칸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두 사람은 윈터가 쓰러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전달해 주었다.
“크비누스는 이틀 뒤에 처형될 거예요.”
“그렇게 됐구나.”
“재판장이 아주 아수라장이었는데, 안 보신 게 차라리 다행이에요.”
칸나가 재판 당시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메이딜리언과 아스터가 그간에 크비누스가 벌인 악행들을 모조리 밝혀냈다.
특히나 아르만 백작이 아주 적극적으로 나섰다.
칼리스타와 아르카나도 당연히 힘을 보탰다.
“사실 그동안 아가씨가 모아 놓은 자료들만 해도 충분했을걸요?”
분노한 제국민들은 크비누스가 가는 길마다 오물을 던지고,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선황 독살뿐만 아니라, 신전과 결탁하여 부정을 저지르고 국고를 낭비하며 재산을 착복하는 등, 그동안 저지른 일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아가씨는 재활에만 집중하세요.”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 데보라가 제법 의젓하게 말했다.
“그래야지.”
“그런데 이제 정말 안 아프세요?”
“응, 그럼.”
윈터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평생을 아파했는데,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때때로 윈터는 제 몸을 신기한 듯 바라보곤 했다.
“계속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잠깐 나가 봐요, 아가씨.”
“뭐? 에이, 아니야.”
밖으로 나가자는 데보라의 말에 윈터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냥 여기서 지내는 걸로도 충분해.”
방도 창문도 무척이나 널따랗고 좋았다.
윈터는 온종일 이곳에서 천천히 걸어 다니며 근육을 키웠다.
메이딜리언의 말처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로.
그런 윈터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칸나는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아가씨.”
“응?”
“보니까 앞에 기사들이 지키고 있던데 저게 다 뭐예요?”
마력 폭주에서 벗어난 윈터는 사실상 호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연약하긴 했지만, 체력이 회복만 되면 얼마든지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만큼 멀쩡했다.
따지자면 윈터의 몸은 늘 부서지기 쉬운 상태였으니, 오히려 지금이 더 건강하다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그러니까 그런 그녀가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건…….
“아가씨, 혹시 지금 못 나가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