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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120/150)

120화

“……예.”

짧게 고개를 끄덕인 메이딜리언이 기사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저마다 눈치만 보던 기사들이 길을 터 준 덕분에, 그는 마력 소모도 없이 수월하게 장애물을 해결했다.

이내 메이딜리언이 달리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골드 드래곤의 심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가야만 했다.

이것이 지금으로선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거기, 잘생긴 청년.”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그를 멈춰 세운 것은 어느 노파였다.

푸른빛의 로브가 눈에 익었다.

“당신은…….”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나?”

대현자 에르퀼이 씩 웃었다.

메이딜리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에르퀼은 마치 이 순간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앞에 홀연히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깊이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예, 필요합니다.”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조금 눈치를 보며 에르퀼에게 물었다.

“……도와주실 겁니까?”

“내가 자네를 안 도와줄 것 같나?”

차마 메이딜리언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윈터를 제외하고는 지금껏 그의 세상에서 대가 없는 도움은 없었다.

기를 쓰고 노력해도 번번이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타인의 알량한 선의나 얻어걸리는 우연에 기대어 살기에는 각박한 삶이었다.

“당연히 도와야지.”

대답도 없이 물끄러미 저만 응시하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에르퀼이 킬킬 웃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윈터에게 들은 몇 가지뿐이었지만 까마득하게 길었던 삶 덕분에 메이딜리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애가 나름 내 제자거든.”

“……그렇군요.”

“그리고 죽을 때 죽더라도 나한테 만타라스 군락이 어디 있는지는 알려 줘야 해서 말이야.”

마지막 말은 반쯤 농담을 섞은 것이었다.

그러나 눈을 찡긋하는 에르퀼을 메이딜리언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좀 웃어 보라고 한 말에도 통 심장이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니 어딘가 한 군데가 망가진 게 틀림없었다.

안도인지 걱정인지 서글픔인지.

울컥울컥 밀려오는 감정을 메이딜리언은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에잉, 재미없는 젊은이구만.”

그런 그를 위로하듯 그의 어깨를 두드린 에르퀼이 이내 시원스레 미소 지었다.

“그럼 이만 우리는 그 못난 꼬맹이를 살리러 가 볼까?”

* * *

사방이 컴컴한 공간은 아주 좁았다.

윈터는 잔뜩 웅크린 채로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인가.’

마지막 폭음과 함께 그녀의 의식은 사라졌다.

고통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슬아슬, 반쯤은 허공에 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목숨이었다.

기꺼이 메이딜리언을 위해 쓸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거짓말.

킥킥 웃으며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흠칫 놀란 윈터가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갑갑한 몸은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쇠판 위를 날카로운 것으로 갉작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내 폭죽처럼 펑, 하고 터진 황금빛 구체가 윈터의 주위를 맴돌며 쉴새 없이 그녀를 비난했다.

―너의 기억을 모두 보았다.

―네 사랑은 참으로 가엾구나.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가져 본 적 없는 이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다니.

―멍청한 일이야.

―탐낼 줄도, 애원할 줄도 모르는 외로운 영혼아.

마치 윈터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목소리’가 한탄했다.

이쯤 되니 윈터에게 의구심이 생겼다.

이것은 정말로 죽음이 맞는가?

‘목소리’의 말처럼 자신은 어리석을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에 했던 다짐을 지키고자 여기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왔으니까.

그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만일 제게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살아 보고 싶었다.

그래, 살고 싶었다.

―아아, 드디어!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묻고 답하던 그 순간, ‘목소리’에 환희가 깃들었다.

윈터의 바람이 그녀를 옥죄고 있던 어둠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물속에 오래 잠겨 있던 사람처럼, 꾹 참고 있던 숨이 한순간에 터졌다.

―문을 열어라, 까마귀야.

누군가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앞으로 고꾸라진 윈터는 끝도 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너의 결말을 끝까지 지켜보겠다.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속삭였다.

* * *

“……허억!”

마침내 윈터가 눈을 떴다.

그녀는 오래 달린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제 왼쪽 가슴을 꾹 눌렀다.

뻐근하게 몰려오는 둔통이 천천히 감각을 일깨웠다.

머리가 어지럽고,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우욱.”

입을 틀어막던 윈터가 흠칫했다.

몸이 어딘가 이상했다.

조금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이 위화감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차렸다.

“……마력이.”

제 입에서 나오는 거칠고 힘없는 목소리는 지독히도 낯설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윈터는 몸 안을 휘돌고 있는 마력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롭던 감각은 어디로 갔는지, 피를 힘차게 뿜어내며 박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나약해진 몸과는 달리 마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했다.

봉인이 없는데도, 멀쩡했다.

“꿈인가?”

아니면 이것은 또 다른 죽음의 경계선인가.

그저 지독히도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작은 인기척과 함께 문이 열렸다.

어둡게 침잠한 붉은 시선이 흐릿한 금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처럼, 아침 이슬을 함빡 맞아 피어나는 장미처럼.

그의 눈에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메이.”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맘처럼 되지 않았다.

잠든 채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인지, 팔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움직이지 마요.”

힘없이 바르작대는 그녀를 보며 바짝 굳어 있던 메이딜리언이 경고했다.

이내 그가 이를 악물고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성마른 손길이 윈터를 잡아채려다 멈칫했다.

그는 그대로 윈터의 손에 제 이마를 묻었다.

“젠장, 젠장…….”

혹시나 윈터가 부서지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이 앞섰다.

차마 그녀를 끌어안지도 못하고 메이딜리언은 연신 욕설만 짓씹었다.

제 손에 닿아 오는 뜨거운 눈물에 윈터 또한 시야가 흐려졌다.

애써 울음을 참아 내며 그녀가 물었다.

“얼마나, 지났어?”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메이딜리언이 대답했다.

“……한 달이요.”

“오래 잤네.”

“치료는 진작 마쳤는데, 당신 스스로 죽었다고 생각해서 쉽게 깨어나지 못하는 거라더군요.”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윈터는 문득 자신이 ‘죽음’을 의심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전까지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

원작에서도 자신은 죽었고, 마력이 폭주했다.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결말에 윈터가 물었다.

살아남은 것에 맘 놓고 기뻐하기에는, 아직까지도 이 모든 것이 현실처럼 와 닿지 않았다.

“제가 당신을 살렸으니까요.”

메이딜리언의 눈빛이 어딘가 싸늘했다.

윈터는 처음 보는 냉랭함이었다.

“윈터.”

“……응?”

“당신은 나를 안 믿었어요.”

“메이, 그게 아니라…….”

“나를 그냥 여기 두고, 자기 혼자 죽어 없어지려고, 그랬잖아요. 그렇죠?”

그의 어깨가 거칠게 들썩였다.

깊은 분노와 절망으로 제대로 호흡하는 방법도 잊은 것 같았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윈터는 시선을 떨궜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이미 자기가 위험할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죠?”

메이딜리언이 천천히 품 안에서 단검을 꺼냈다.

날카로운 검날은 그의 심장을 똑바로 겨누었다.

섬찟한 살기에 윈터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메이딜리언과 눈이 마주쳤다.

“당신이 나를 아프게 했어요.”

그 말과 동시에 메이딜리언의 심장이 그대로 꿰뚫렸다.

“안돼, 메이!”

기겁한 윈터가 창백하게 질려 외쳤다.

그녀는 다급히 메이딜리언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악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반쯤 혼미한 정신으로 윈터는 마력을 운용했다.

본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너 미쳤어!”

“당신이 죽음을 각오했을 때, 이런 상황까지 예비했어야죠.”

눈물이 펑펑 흘렀다.

화가 들끓고 손이 덜덜 떨렸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 윈터도, 메이딜리언도, 침대와 카펫마저도 붉게 물들였다.

윈터는 황급히 메이딜리언의 가슴에 손을 얹어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지금껏 단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치유의 마법을 사용했다.

“내가 바란 건,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야…….”

“당신의 죽음으로 나의 죽음을 바라셨습니다.”

“아니야, 아니라고!”

메이딜리언이 손을 뻗었다.

그의 뜨거운 체온이 눈물 젖은 윈터의 뺨을 쓸었다.

섬뜩하리만치 다정한 손길이었다.

“또 죽고 싶어지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윈터.”

눈앞에서 제 심장을 찔러 놓고도 메이딜리언은 태연했다.

“언제든 제가 당신 뒤를 따르겠습니다.”

윈터는 제가 만들어 낸 악몽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말았다.

동시에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바란 건 네 행복이야. 네가 행복해지길 바란 거라고!”

“어떻게요? 무엇으로요?”

메이딜리언의 물음은 순진무구했다.

“그런 건 당신이 가르쳐주지 않았잖아요.”

“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원하는 것은 뭐든 이루고 사는 삶. 그게 내 소원이었어.”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픽 웃은 메이딜리언이 되물었다.

“그런 사람이 당신 말고 또 있나요?”

“메이.”

“말해 봐요, 윈터. 대체 누가 있죠?”

달콤한 속삭임에 윈터는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깊은 한숨이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널 사랑해 줄 사람은 또 나타날 거야.”

희망도 애정도 모르고 자란 메이딜리언에게, 윈터는 그 사실을 꼭 가르쳐 주고 싶었다.

신뢰와 사랑과 아름다움과 정의 같은 것에 대해서.

그러나 온통 피비린내 가득한 이 공간에 감히 그런 것은 함께 오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터는 포기하지 않았다.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가까이에, 네가 미처 모르는 곳에 있을 수도 있잖아. 예를 들어…….”

“‘칸나’ 같은?”

메이딜리언의 물음에 윈터가 반색했다.

제가 생각하던 이름을 메이딜리언이 먼저 꺼냈기 때문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렇군요.”

메이딜리언의 눈이 접히며 어여쁘게 미소 지었다.

화사한 얼굴 그대로 그가 물었다.

“그게 당신의 계획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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