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150)

119화

“무, 뭐?”

“외숙부님께서 제 어머니를 죽이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날, 저는 이미 그때부터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복수를 위해서였냐고 묻는다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희미했고, 덕분에 복수심도 옅었다.

그러나 아스터는 아주 오래전부터 크비누스의 실각을, 그리고 누가 진짜 선황 시해범인지 알려지는 것을 바랐다.

그것이 어머니의 유언이었고, 진실을 밝히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비누스는 제가 한 짓은 모두 잊어버린 것인지, 마치 아스터가 천인공노할 짓을 벌인다는 듯 험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도 2황자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로구나. 어찌 내게 누이를 죽였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예배당에 있는 어머니 그림.”

더는 크비누스의 거짓말을 듣고 있기 어려웠던 아스터가 대뜸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 이따금 홀로 술래잡기를 하러 예배당으로 숨어들고는 했다.

기억마저 희미한 어머니의 얼굴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그 그리움이 그림 뒤에 가득 피어난 만타라스를 발견하게 도와주었다.

“그 뒤에 뭐가 있는지 제가 알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신가요?”

아스터가 그림을 언급한 순간, 크비누스의 표정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애써 충격을 감추려는 듯 눈동자에 동요가 가득했다.

이내 뒤로 물러선 크비누스가 버럭 외쳤다.

“역도들이다!”

쩌렁쩌렁 울리는 선언에 공기가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크비누스가 매서운 시선으로 눈앞의 세 사람을 노려보았다.

“감히 어처구니없는 허황된 주장으로 짐을 모욕하려 드니, 저들 모두 목을 베어 황실의 권위를 드높일 것이다.”

대화를 듣고 있던 시종과 기사들은 우왕좌왕했다.

아스터의 말에 따르면 크비누스는 선황의 살해범이었다.

크비누스는 두 황자를 역도라고 칭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에,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다.

“지금이라도 본인의 죄를 깨끗이 인정하세요.”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한숨을 푹 내쉬며 아스터가 말하자 크비누스가 그를 비웃었다.

실제로 크비누스가 섭정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런 의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크비누스는 이미 오래전에 종교에 귀의했던 데다가, 청빈한 사제로 이름이 높았었다.

누이를 아끼고 우애가 깊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결정적으로 선황 미쉘라의 죽음에서 그의 혐의를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섭정으로서의 권력이 공고해지자 더더욱 선황 시해 의혹을 입에 올리는 자는 없었다.

“내게는 죄가 없다.”

지독히도 뻔뻔하고 낯부끄러운 소리에 아스터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참아 내던 메이딜리언이 앞으로 나섰다.

“여기서 이렇게 낭비할 시간 없어.”

그러자 크비누스의 눈이 빛났다.

분명 상황이 제게 불리한 와중인데도 비죽 입가에 걸리는 미소가 불길했다.

“네가 왜 하필 이곳으로 왔나 했더니…….”

오른쪽에 서 있던 시종에게서 자루 하나를 갈취한 크비누스가 안을 뒤적이더니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보였다.

“혹시 이걸 찾나?”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순도 높은 마력에 순간 아스터나 칸나도 움찔할 정도였다.

평범한 인간의 마력이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 메이딜리언의 신형이 사라졌다.

크비누스의 손에 들린 것이 제가 그토록 찾던 골드 드래곤의 심장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커흑.”

메이딜리언은 소리도 기척도 없이 크비누스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의 손이 아니라 온몸을 압박하는 살기 때문에 크비누스는 숨쉬기가 어려워 꺽꺽댔다.

한순간에 벌겋게 물든 얼굴을 하고도 크비누스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죽여.’

두 사람의 시선이 첨예하게 부딪혔다.

메이딜리언의 눈에서 타오르는 증오가 금방이라도 크비누스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듯했다.

‘죽여 봐라.’

히죽 웃으며 크비누스가 메이딜리언을 도발했다.

금방이라도 끓어 넘칠 듯한 살기에 아스터가 황급히 달려가 메이딜리언을 말렸다.

“안돼, 그만둬!”

궁에 있던 기사들이 속속들이 창고 앞으로 모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서서 메이딜리언과 아스터, 그리고 칸나를 제압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끝내 분을 참지 못한 메이딜리언이 크비누스를 먼저 공격하고 말았다.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검을 빼 들었다.

칸나도 질 수 없었다. 그녀는 마력으로 온몸을 감싼 채 두 황자들의 뒤를 지켰다.

문 앞을 막고 선 칸나의 기세 때문에 기사들은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그저 서로 경계만 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대로 죽여 버리면, 이번엔 네가 섭정 시해범이 되는 거야.”

아스터가 메이딜리언의 팔을 꽉 붙든 채로 속삭였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의 눈은 여전히 크비누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상관없어.”

“윈터는 아닐 거야.”

그 이름에 흠칫 메이딜리언의 어깨가 튀었다.

돌아보는 붉은 눈이 섬뜩했다.

“함부로, 이름 부르지 마.”

이 상황에도 그게 중요한 모양이었다.

아스터는 메이딜리언을 자극할 의사가 없다는 의미로 그에게서 손을 떼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크큭.”

그때 크비누스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누이의 아들들아.”

고작 윈터의 이름 하나만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메이딜리언의 악력이 약해졌다.

그것이 그리도 우스울 수 없었다.

얄팍한 인간의 감정으로 감히 권력을 탐하려 하다니.

“너희는 결코 바라는 결말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저주와 함께 크비누스의 눈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눈뿐만이 아니었다.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검은 그림자가 넘실대며 그의 손에 들린 상자까지 물들이려 했다.

“젠장, 안 돼!”

메이딜리언이 강한 힘으로 크비누스를 그대로 밀쳐 냈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크비누스가 벽에 처박혔다.

“으윽…….”

공간을 뒤흔드는 괴력에 아스터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는 황급히 크비누스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 숨은 붙어 있는 상태였으나 부상이 심각했다.

“폐하!”

그걸 기사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마른 지푸라기에 불이 붙듯 순식간에 교전이 시작되었다.

칸나는 여유롭게 기사들을 무력화시켰다.

고작 한 명에게 철저히 당하며 기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젠장, 젠장…….”

다른 이들이 싸우거나 말거나 그건 메이딜리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상자를 주웠다.

다행히 겉이 반쯤 검게 물들기는 했으나 아직 멀쩡했다.

메이딜리언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눈앞에 있는 거슬리는 자들을 모두 치우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들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었다.

“섭정 폐하를 시해하려 한 역도다! 다들 물러서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그들에게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메이딜리언에게는 그저 눈엣가시일 뿐이었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처럼 검은 마력을 피워 내려던 메이딜리언이 잠시 멈칫했다.

몸이 한계였다.

이대로 이들을 쓰러뜨리면, 윈터에게 갈 자신이 없었다.

“다들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그때 기사들의 뒤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들을 헤치고 나온 것은 아르만 백작이었다.

“감히 1황자 전하를 역도로 몰다니, 자네들이 진정 제정신인 건가!”

“……아버지?”

앞으로 나선 아르만 백작이 노성을 터뜨리자 기사들이 주춤했다.

그들 대부분이 아르만 백작의 후원으로 기사가 된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길을 트게.”

“하오나 백작님.”

“이 사람들이 그래도……!”

“섭정 폐하를 시해하려 한 자입니다.”

1기사단 단장인 그레고리 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르만 백작은 동요하기는커녕 피식 그를 비웃었다.

백작의 시선은 바닥에 추하게 널브러진 크비누스에게 향했다.

“섭정이라니? 설마 저 선황 폐하 시해범을 말하는 것인가?”

최근 들어 아스터의 동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아르만 백작은 아들을 감시하는 눈을 평소의 두 배로 붙여 두었다.

평소에 돈이며 권력을 아낌없이 써 둔 덕분에 그는 크비누스의 도움 없이도 진실에 가 닿았다.

아스터는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 2황자와 크비누스 사이를 갈가리 찢어 놓았을뿐더러 크비누스의 실각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메이딜리언과 손을 잡아야 했을 것이나, 어차피 2황자는 황제의 자리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어 보였다.

평소에 그렇게 소극적이고 나약하던 아들이 이토록 대범하고 철두철미한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에 아르만 백작은 더할 나위 없이 뿌듯했다.

“……선황 폐하 시해범이라니요?”

“저자가 선황 폐하를 시해한 정황과 증거를 모두 발견했네. 곧 재판을 열어 명명백백하게 진실을 밝힐 것이야.”

대체 왜 이런 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르만 백작은 아스터가 역도로 몰려 체포되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진실이야 어쨌든, 그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러니 자네들은 내 아들, 아니 1황자가 아니라 저자를 체포해야겠지?”

아르만 백작의 손끝에는 크비누스가 걸려 있었다.

“아르만, 네놈이 감히……!”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던 크비누스의 양 뺨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그에게 보란 듯이 비죽 웃은 아르만 백작이 선고를 내렸다.

“당장 저자를 지하 감옥에 가두게.”

“하지만…….”

“만일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내가 다 책임지겠네.”

“……예, 예!”

아르만 백작의 말에 기사들은 옳다구나, 하고 그의 지시에 따랐다.

선황 시해니 뭐니 하는 복잡한 일에 엮이느니 그저 아르만 백작이 시켰다, 라고 하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는 훨씬 단순하고 수월했다.

“……허.”

아스터는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제 아버지가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 듯했으나, 지금 여기서 눈치 없이 정정할 수는 없었다.

“2황자.”

대신 그는 메이딜리언에게 얼른 눈짓했다.

“지금입니다. 빨리 가 보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