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심장이 뛰었다.
메이딜리언의 정신은 깊고 검은 물 아래로 침잠했다.
그는 그저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고,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윈터 블라디미르는 살아 있다.
반드시 살릴 것이다.
연신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앞으로, 계속해서 앞으로 향했다.
때때로 기사들의 검이 그를 베어 내도, 진즉에 흡수했던 생명력이 상처를 모조리 지워 내고도 남았다.
흙먼지와 피를 뒤집어쓰고도 생채기 하나 없는 메이딜리언의 모습은 지극히 섬뜩하고 이질적이었다.
“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그런 메이딜리언의 곁에서 대등하게 달려 나가는 것은 칸나뿐이었다.
괴물 둘이 지나간 자리는 폐허였다.
다들 해쓱해진 얼굴로 묵묵히 남은 기사들을 처리하며 메이딜리언의 뒤를 따라갔다.
“이렇게 가다간 네가 먼저 죽게 생겼어, 이 멍청아!”
숨을 헐떡이며 칸나가 외쳤다.
아까부터 메이딜리언이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었다.
그를 저렇게 만들 만한 것은 윈터뿐이었다.
‘메이를 지켜 줘.’
그렇게 말하던 윈터의 얼굴이 아직도 또렷했다.
평소보다 진지하고, 비장하던 표정은 마치 죽음을 각오한 것 같았다.
그래서 한사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 것이었는데.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서 칸나는 울음을 꾹 삼켰다.
지금은 메이딜리언을 살피는 게 먼저였다.
그게 윈터가 자신에게 부탁한 것이었으니까.
이를 악문 칸나가 그대로 메이딜리언 앞에 뛰어들었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두 사람의 검이 그대로 맞붙었다.
“내가 뭘 하면 되는지 말해.”
활활 타오르는 눈빛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메이딜리언이 잠시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는 그사이 말조차도 잊은 것 같았다.
“윈터를.”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툭 떨어졌다.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는 이제 완전히 빛을 잃었다.
그때 그의 이성의 끈도 끊어졌다.
“살려야 해.”
“……알겠어.”
그대로 검을 거둔 칸나가 몸을 돌렸다.
의욕이라곤 없는 병사들은 슬금슬금 그들을 피하고 있었다.
“다들 통구이 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비켜!”
칸나가 배에 힘을 주고 버럭 외쳤다.
흠칫 놀란 병사들이 비실비실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났다.
아까 그레이가 곤죽이 되어 저세상으로 떠난 뒤 그들의 사기는 촛불처럼 훅 꺼져 버렸다.
“이익! 다들 지금 뭐 하는 건가! 이 한심한……!”
그 꼴을 보다 못한 기사 하나가 분에 가득 차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만은 없다는 듯 객기를 부리는 모습에 칸나는 작게 혀를 찼다.
원래라면 한 번 정도는 더 설득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촌각을 다투는 급한 일이 있었다.
“거기 아저씨.”
칸나가 손에 새파란 불을 피워올리며 남자를 불렀다.
“알아서 잘 피해. 나는 길을 뚫어야겠으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화염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으, 으아악!”
“살려 줘! 뜨거워, 뜨겁다고!”
“끄아아악!”
비명이 축포처럼 터져 나왔다.
곳곳에서 펑, 펑 폭음이 들려왔다.
소리만 들으면 마치 축제를 방불케 했다.
그 축제가 피의 대축제라서 문제일 뿐.
칸나가 말했던 것처럼 이제 그들의 눈앞에는 새카만 재로 만들어진 길뿐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길을 터 주며 칸나가 메이딜리언에게 손짓했다.
“가시죠, 전하.”
불길로 이루어진 검은 카펫 위를 메이딜리언이 내달렸다.
반복되는 전투 끝에 속은 진탕이 되었고, 과도한 마력 사용으로 심장이 깨질 것같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이까짓 통증은 그의 발길을 묶어 놓지 못했다.
윈터를 살려야 했다.
“히, 히이익! 살려 주십쇼!”
이동 마법진을 관리하던 마법사가 메이딜리언의 등장에 납작 엎드렸다.
안 그래도 그는 야차처럼 병사들을 뚫고 오는 메이딜리언과 칸나를 보고 잔뜩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황궁으로.”
“예, 예?”
“지금 당장, 황궁으로.”
“아, 알겠습니다!”
칸나의 지시에 마법사들이 허겁지겁 마법진에 손을 올렸다.
뒤에 서 있던 메이딜리언이 워낙 살기등등했던 터라 그들은 이미 제 목이 달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재빨리 움직였다.
덕분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순간, 메이딜리언과 칸나는 황궁에 도착한 상태였다.
“허어억!”
“2, 2황자다! 2황자가 나타났다!”
예고도 없이 황궁 한복판에 피 칠갑을 하고 나타난 메이딜리언 덕분에, 궁인들은 난리가 났다.
줄곧 초조하게 메이딜리언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아스터가 제일 먼저 그 난리를 알아차렸다.
“……전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그를 코델리아 부인이 잡았다.
그녀는 아스터를 통해 이미 모든 계획을 전해 들은 뒤였다.
싱긋 희미한 미소를 띤 아스터가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
“난 괜찮아.”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바라 마지않았던 순간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비록 다른 이의 손으로 이루게 되겠지만.
“이번 일 마치면 여행이라도 가야겠어.”
아스터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힘이 넘쳤다.
“탁 트인 바다가 보고 싶네.”
코델리아는 그런 아스터를 향해 그저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녀오십시오, 황자 전하.”
“응. 고마워, 코델리아.”
1황자 궁을 나선 아스터가 황급히 소란이 일어난 곳을 향해 달렸다.
다들 무슨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잔뜩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달아나기 바빴다.
“으음, 확실히…….”
점점 마법진에 가까워질수록 아스터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그럴 만한 모습이긴 하네.”
피에 젖은 악귀 같은 모습으로 메이딜리언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기겁한 시녀 하나가 황급히 아스터를 붙들었다.
“저, 전하! 얼른 피하십시오!”
“걱정은 고마운데, 나도 일단은 저쪽이랑 한패라서.”
“……예?”
시녀가 황당하다는 듯 눈을 끔벅댔다.
그 모습에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 들어 아스터가 환하게 웃었다.
그는 살면서 한 번도 제가 선택한 제 편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의 마지막에 잡은 손이 메이딜리언이라는 것이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꺼웠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준비는 전부 마쳤…….”
그가 메이딜리언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초점이 나간 메이딜리언의 눈동자가 잘 보였다.
“황실 보고(寶庫)는 어디에 있지?”
“……거긴 갑자기 왜?”
“그 사람을 살려야 해.”
말을 하는 순간순간에도 메이딜리언의 눈에서 살기가 불티처럼 튀었다.
시선을 한군데 가만두지 못하며 초조함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는 메이딜리언의 모습이 퍽 낯설었다.
“원하는 건 전부 들어주겠다.”
메이딜리언이 대뜸 말했다.
아스터의 표정도 서서히 굳어졌다.
메이딜리언이 이런 상태라는 건 동시에 다른 어떤 이에게도 아주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제발, 빨리.”
애원하는 메이딜리언을 뒤에 두고 아스터가 돌아섰다.
“따라와.”
메이딜리언과 아스터, 그리고 칸나는 말없이 달렸다.
대부분의 병력이 블라디미르 공작령으로 향했기에 황궁은 지금 무방비했다.
궁인들은 머리로 이해조차 되지 않는 뜬금없는 조합에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살기등등한 메이딜리언과 눈이 마주치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덕분에 가는 길을 막아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
한참 달려가던 끝에 아스터가 탄식했다.
“왜 그러세요?”
메이딜리언이 상황을 물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칸나가 얼른 되물었다.
“열쇠가 섭정에게 있어.”
이유도 모른 채 메이딜리언의 요청에 따라 그저 보물 창고로 달리기는 했는데, 열쇠가 없으면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잠시 멈칫하던 칸나가 되물었다.
“그냥 힘으로 부수면 안 될까요?”
“신성 마법으로 보호받는 거라서 아마 불가능할 거야.”
“그렇군요. 그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궁인들의 비명 때문에 메이딜리언이 황궁에 온 사실이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가 황궁 보물 창고로 향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보나 마나 크비누스를 노릴 것이라 생각하고 다들 그쪽으로 달려갔겠지.
사실 여부를 떠나 어쨌든 지금 메이딜리언은 반역도였으니 말이다.
“……갈 필요 없어.”
잠자코 달리던 메이딜리언이 앞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아스터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어찌 된 영문인지 이미 보물 창고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이 다가오는 세 사람을 보고 일제히 검을 빼 들었다.
“멈춰라!”
“……비켜.”
“이야압!”
메이딜리언이 경고했으나 들을 리가 없었다.
기합과 함께 달려드는 그들은 순식간에 검은 마력에 휩싸였고, 소리도 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손짓 한 번으로 열 명이 넘는 기사들이 죽어 나가자 다들 전의를 상실했다.
아스터와 칸나가 나머지 기사들을 제압하는 사이 메이딜리언이 문이 열린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주 뜻밖의 인물과 조우했다.
“네, 네가 여긴 어떻게…….”
다름 아닌 크비누스였다.
메이딜리언이 황궁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도망치려 했던 것인지 크비누스와 그 곁에 있는 시종들의 손에 묵직한 자루가 여럿 들려 있었다.
뒤이어 안으로 들어온 아스터 또한 그 모습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외숙부님.”
“아스터, 네가 왜 거기 있는 것이냐.”
설마 메이딜리언과 아스터가 함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크비누스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하, 이제 보니 네가 간악하게도 첩자 노릇을 했구나!”
분기탱천한 크비누스가 버럭 소리쳤다.
“내 너를 믿었거늘 어찌! 대체 언제부터였느냐! 언제부터 날 배신하려 한 것이야!”
시종들과 기사들의 뒤에 숨어서 그저 황금만을 탐하는 섭정의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제 목숨을 노리던 것이 고작 저런 남자였다는 것에 아스터는 입맛이 썼다.
씁쓸한 표정으로 그가 대답했다.
“처음부터요.”